
1513년에 그려진 보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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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홈페이지의 봉안위차도는 현황만 있고, 왜 저렇게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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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대유학당 대표(철학박사)
보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의 개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유교를 집대성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仁) 사상을 확립한 성인이다. 맨 위에 있는 「대성지성문선왕전」(大成至聖文宣王殿)이라는 편액에서 공자와 그 사상을 이어받은 문인들이 모여 있는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네 분 성인인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십철(十哲)을 그렸다.
전각 아래에는 좌우로 72명의 제자들을 배치하였는데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 홀(笏)을 든 모습에서 제후로 추존되었지만 본래 모습은 학자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제일 하단에는 당(한유), 송(주돈이, 소옹, 정호, 정이, 장재, 주희, 사마광), 원(허형, 오징)의 이름난 학자 10명을 그렸는데 그림 좌측 하단에 중국 명나라 연호인 정덕(正德) 8년(1513, 중종 8)에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이 어떤 목적에서 그려졌고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공자님과 그 도맥(道脈)을 잇는 학자들을 함께 그림으로써 명나라 때 도맥의 정통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의 면면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공자묘에 신위만 놓지 않고 목조인형으로 조성하고 그림으로 그려서 함께 모신 흔적을 알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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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를 설명하기 쉽게 1~6의 번호를 붙였다.
1의 다섯 분, 2-1의 다섯 분, 2-2의 다섯 분, 이렇게 15인은 ‘대성지성문선왕전’ 안에 앉아 계신다. 이들은 ‘왕(공자님)’ 또는 제후의 5등급 벼슬 중에 최고 등급인 ‘공작’의 벼슬을 추존 받았다. 3-1, 3-2, 5-1, 5-2는 2등급 제후 벼슬인 ‘후작’이고, 4와 6은 3등급 제후 벼슬인 ‘백작’이다.
선성(先聖)과 제자들의 배열은 소목(昭穆) 제도를 원용한 것이다. 즉 선성을 중심으로 하여 왼손 쪽이 ‘소(昭)’이고, 오른손 쪽이 ‘목(穆)’이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에 이르기를 “공자는 제자가 3,000여 명에 이르렀고,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나 되었다. 안탁추(顔涿鄒)와 같이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고도 72명에 들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육예를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시·서·예·악을 배우는 것이 기본이었으므로 공자님이 “시로 흥기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게 하고, 악으로써 이루게 한다”라 하여서 『시·서·예·악』을 강조하셨다.
『주역』은 복서(卜筮, 길흉을 점침)할 때 보는 점풀이 글이고, 『춘추』는 제후국의 역사 기록이라 선비가 익히는 과목은 아니지만 공자님께서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찬술하고, 『춘추』를 춘추필법이라는 정법으로 수정하셨다. 그러므로 『시·서·예·악』의 네 가지에 『역』과 『춘추』까지 겸하여 육예로 보고, 이를 통달한 이가 72명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72명의 제자는 모두가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뛰어난 제자가 72명이었고, 그 외에 가르침을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으니 공자님의 ‘교불권(敎不倦) 학불염(學不厭)’ 공로가 대단한 것이다.
동곽자혜(東郭子惠)가 자공에게 “선생의 문하에는 어찌하여 이리도 잡다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까?”하니 자공이 “숲 가장자리에는 구부러진 나무가 많고, 명의(名醫)의 문전에는 병자가 많이 모입니다. 숫돌 곁에는 무딘 쇠붙이가 많습니다. 선생께서 도(道)를 닦아 천하를 기다리시니 찾아오는 이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1. 문선왕과 4대 성인의 배향(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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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과 가까운 쪽(북쪽)이 윗사람인데 같은 서열이면 오른쪽이 윗사람이다.
배향(配享)은 제사의 주인공(본위(本位), 예를 들어 공자나 임금)에 가깝고, 공이 많은 제자나 신하 등을 함께 모셔 제향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역경』이나 『시경』에서처럼 “하느님께 제사 지낼 때 자신의 조상을 배향”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한 밥상에서 흠향(歆饗)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공자님과 4대 성인’ 및 ‘공문십철(孔門十哲)’까지 총 15인은 ‘문선왕전’에 올라 앉아 있고, 나머지 72제자와 10인의 후학자는 ‘문선왕전’ 밑에 좌정하고 있다. 다만 ‘문선왕전’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4대 성인’은 ‘배향한다’고 하고, 좌우로 좌정한 10철은 ‘종사(宗祀)한다’고 하였다.
1) 성인의 서열 배치, 1737년 만에 공자님 학통의 정통 확립
북쪽의 정중앙에 좌정한 분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님)’이시다.
공자님과 배향된 네 분의 서열은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의 순이다. 그러므로 오른쪽의 윗자리에 연국 복성공(兖國 復聖公) 안자의 좌정된 상을, 왼쪽 윗자리에 성국 종성공(郕國 宗聖公) 증자의 좌정된 상을, 오른쪽 아래에는 기국 술성공(沂國 述聖公) 자사자의 좌정된 상을, 왼쪽 아래에는 추국 아성공(鄒國 亞聖公) 맹자의 좌정된 모습을 그렸다.
처음부터 공자님 묘당에 함께 4대 성인이 배향된 것은 아니었다.
안자는 처음부터 배향되었지만 증자는 송나라 철종(哲宗, 재위 1085-1100)이 1087년에 배향했고, 자사는 남송의 고종(高宗, 재위 1127-1162)이 1139년에 배향했으며, 마지막으로 남송의 이종(理宗, 재위 1224-1264)이 1258년에 맹자를 아성공이라 하면서 배향한 뒤에 4대 성인의 배향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공자님이 졸(卒)하신 뒤 1737년 만에 ‘안자→증자 →자사자→맹자’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통이 확립된 것이다.
2) 성인의 추존봉호(追尊封號)와 뜻
(1)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 공자님(기원전 551-479)
‘왕’은 하늘(一)과 사람(一)과 땅(一)을 하나로 꿰어서(丨) 다스리는 임금(一 + 一 + 一 + 丨= 王)으로 모든 제후를 통섭해서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의 왕을 비롯한 제후의 벼슬은 추존된 것이므로 명예직이다.
한나라 평제(平帝, 재위 기원전 1-기원후 5)가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의 권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유교를 드높인다’는 명분으로 기원후 1년에 공자를 추존하여 ‘선니공(宣尼公)’이라 한 뒤로 후세 사람들이 공자를 ‘선보(宣父)’라 하기도 하고, ‘선니(宣尼)’라 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739년에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려는 의지를 앞세워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존하고, 공자님의 후손이 ‘문선공’의 작위를 세습하며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선공(宣公)’에 ‘문(文)’을 더하고, ‘공’을 ‘왕’으로 높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문선’은 학문을 문체 나는 글로 써서 널리 알려지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때 안자는 복성공으로 승작하고, 10철 역시 제후로 추존되었지만 나머지 3대 성인의 배향은 없었다.
‘지성(至聖)’은 성인 중에서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송나라 진종(眞宗, 재위 997-1022)이 1008년에 ‘원성문선왕(元聖文宣王)’이라고 추존했다가 4년 뒤인 1012년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 고쳐 추존하며 정해졌다.
‘대성(大成)’은 『맹자』의 ‘집대성(集大成, 백이(伯夷)·이윤(伊尹)·류하혜(柳下惠)의 성스러움을 모두 합함)’에서 나온 말로 모든 철학, 특히 유교의 철학을 집대성하셨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감소고어(敢昭告於) 선성(先聖)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선사(先師) 연국공, 선사 추국공”이라고 했는데, 원(元)나라 무종(武宗, 재위 1307–1311)이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공자)’의 존호에 ‘대성’을 가호(加號)한 것이다.
그러니까 ‘선니공’에서 ‘문선왕’으로, ‘원성문선왕’에서 ‘지성문선왕’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성지성문선왕’으로 추봉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공부자(孔夫子)’라고 호칭하는데 이는 공자님께서 살아계실 때 노나라 사구(司寇, 법무부 장관)를 역임하셨기 때문에 ‘장관(대부)까지 지내신 우리 스승님’이라는 뜻으로 ‘부자(夫子, 대부의 ‘부(夫)‘에 ‘스승 자(子)’를 합칭)’라 호칭한 것이고, 후대에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성씨인 공(孔)을 덧붙여 ‘공부자’라고 하였다. 『논어』에만 ‘거백옥(蘧伯玉), 공숙문자(公叔文子), 극자성(棘子成)’ 등 ‘부자’라고 호칭된 사람이 셋이나 되기 때문이다.
‘대부’보다 훨씬 등급이 높은 ‘왕’은 추존된 호칭이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일까? 구준(邱濬)의 말대로 공자님은 ‘도’로 존숭을 받는 분이고 벼슬이나 명칭이 아니니 ‘선사공자(先師孔子)’ 혹은 ‘선성공자(先聖孔子)’라고 호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 연국 복성공(兖國 復聖公) : 안자(顔子, 기원전 521-481)
‘연국 복성공’은 연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인데 그 등급은 5작의 제후(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중에 최고 등급인 ‘공’이라는 뜻이다. 노나라 안에 있는 연주(兗州) 출신이기 때문에 ‘연’을 봉토로 받게 되었다. 이하 제자들의 봉국을 정한 이유도 대동소이하다.
또 ‘연공, 기공’ 등 제후로 봉해진 봉토에 관작을 이어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라 국(國)’자를 더 붙인 것은 금(金)나라 장종(章宗, 재위 1189-1208)이 1197년에 공자묘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찬문(贊文)을 쓸 때 ‘봉호가 공(公)인 사람은 국공(國公)으로 승작해서 쓰고, 후(侯)였던 자는 국후(國侯)로 승작’한 것에 기인한다.
안회(顔回)의 자는 자연(子淵)으로, 공자님보다 30세가 어렸다. 성인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 공부를 해서 거의 완성했으나 41세의 이른 나이에 죽었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역경』 계사전에 “머지않아 다시 태어난다(不遠復)”고 통곡하며 안타까워하셨기 때문에 ‘성인(聖)으로 회복(復)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복성’이라고 시호를 한 것이다.
남북조시대인 위(魏)나라 문제(文帝, 재위 220-226) 때 “『논어』, 『상서』, 『예기』의 강독을 차례로 마친 뒤에 태상(太常)에게 벽옹에서 공자님께 석전(釋奠)을 지내라 하고, 안회(顏回)를 배향(配享)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안자를 공자님의 유일한 배향 제자로 하였다는 것은 안자를 수제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다만 공자님보다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학통을 전할 수 없었다.
(3) 성국 종성공(郕國 宗聖公) :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
‘성국 복성공’은 성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인데 그 등급은 5작의 제후 중에 최고 등급인 ‘공’이라는 뜻이다. 공자님 도의 종지(宗旨)를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종’자를 써서 ‘종성’이라고 하였다. 증자의 자(字)는 자여(子輿)이고, 공자보다 46살 어렸다. 공자는 그가 효도의 도리를 잘 통달하였다고 여겨 『효경(孝經)』을 짓게 하면서 유학의 종지를 전수했다.
특히 공자님이 증자에게 전수했다는 “몸의 모든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니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또 출세하여 세상에 도를 펴며 후세에 명성을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효의 완성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그러니 효라는 것은 부모님을 모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뜻과 이름을 세우는 것으로 완성하는 것이다(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는 내용은 유교의 종지가 담긴 대체(大體)를 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조상)와 나는 한 몸이고, 계속 순환을 한다는 유교의 세계관과 나를 완성해서 세상을 위해 편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수신, 제가해서 치국, 평천하를 하면 그 보답으로 나와 나의 조상이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면 그 후광을 받은 내 후손은 다시 또 수신, 제가해서 치국, 평천하를 하는 선순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증자의 효를 알 수 있는 말이 전한다.
“내가 처음 관리가 되었을 때, 녹봉이 겨우 부모님을 봉양할 정도였지만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녹봉이 많아서가 아니라 도(道)를 즐기며 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남쪽 초나라로 가서 존귀한 벼슬을 얻어 집은 높이가 아홉 길이고, 들보가 세 자나 되며 수레가 백 대나 되는 위세를 누렸다. 그러나 오히려 북쪽을 향해 울었으니 관직이 천해서 슬퍼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다시는 뵐 수 없음을 슬퍼한 것이다”
공자 사당에서 안자만을 배향하다가 북송 철종 때인 1087년에 유학을 진흥하려는 정책에 힘입어 ‘종성공(宗聖公)이라는 칭호로 처음 배향되었다. 드디어 공자의 정통을 이어받은 제자로 인정된 것이다. 이렇다 할 저술이 없고 제자도 없는 안자를 이어받는 형식이 된 것이다.
(4) 기국 술성공(沂國 述聖公) : 자사자(子思子, 기원전 483-402)
자사자는 공자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고 손자이다. ‘기국 술성공’은 기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인데 그 등급은 5작의 제후 중에 최고 등급인 ‘공’이라는 뜻이다.
공자의 인(仁) 사상을 구체화해서 “천명으로 부여한 것이 성품이고, 그 성품대로 사는 것이 바른 길(道)이며, 혹 잘못된 길로 갈 때는 교육을 통해 바로 잡는다”는 것을 요지로 『중용(中庸)』을 기술했다. 공자 사상의 요체를 『중용』으로 기술했다고 하여서 ‘글로 표현할 술(述)’자를 봉호로 받았다.
공자님의 도를 증자가 이어받았고, 자사는 증자에게 배워 공자님으로부터 전해진 바를 이어받았다.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잘못될까봐 전수 받은 뜻을 깊이 연구하고 반복 고찰하여 『중용』을 지었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로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중용』은 공자님의 도맥을 이어주는 중요한 경전인 것이다.
(5) 추국 아성공(鄒國 亞聖公) :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추국 아성공’은 추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인데 그 등급은 5작의 제후 중에 최고 등급인 ‘공’이라는 뜻이다.
맹자는 자사의 문인으로부터 공자의 학문을 배웠다. 성선설(性善說), 양지론(良知論), 사단설(四端說)을 세움으로써 유교를 ‘공맹의 도’라고 일컬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공자님 다음 간다’는 뜻으로 ‘버금 아(亞)’ 자를 시호로 받게 되었다.
『자치통감』에는 인의에 대한 자사와 맹자의 대화에서 자사의 통합적으로 보는 세계관과 맹자의 분석적으로 보는 세계관을 살필 수 있다.
“맹자가 자사(자사의 문인)에게 배울 때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가 무엇이 우선입니까?’ 하니 자사께서 ‘먼저 이롭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맹자가 ‘군자는 인과 의로 백성을 가르쳐야 하는데 어째서 이익이 먼저라 하십니까?’ 하니 자사께서 ‘인과 의로 하는 것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윗사람이 인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얻지 못하고, 위에서 의롭지 않게 하면 아랫사람이 속이기를 좋아하니 이렇게 되면 이롭지 않은 것이 큰 것이다’라고 했다”
송나라 때 증자와 자사에 이어 맹자를 배향시킨 이유는 맹자 사후 없어지거나 잘못된 공자님의 도맥을 송나라에 와서 바로 세우며 이어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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