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찬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남도본부 교육부회장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창의(倡義)의 깃발을 든 이가 있었으니 성균관 학유(學諭, 종9품 관직)를 지낸 월파(月坡) 류팽로(柳彭老, 1554~1592) 선생이다.
선생은 문화류씨(文化柳氏) 휘 만수(蔓殊, 1320년대-1398) 좌상공파의 후예로, 문성군 수의 현손이며 충주판관 경안의 아들로 1554년 전남 곡성 옥과 합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과 학문적 성취가 남달랐다.
복재(復齋) 오수성(吳遂性)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1579년 사마시, 1588년 식년 문과에 차례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임명되었으나 병석에 누운 부친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기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0년 부친상을 당한 후 3년의 여묘살이를 마치고, 1592년(선조 25) 성균관 학유 겸 박사로 제수되었으며 이때 올린 세 차례의 상소에서 인재 등용, 국정 쇄신, 군비 강화, 왜구 침입 대비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로부터 ‘선견지명’이라는 찬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양대박(梁大樸, 1543-1592), 안영(安瑛, ?-1592)과 함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담양부에서 군사를 모으고,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을 추대하여 의병군의 체계를 세웠으며, 종사관으로서 스스로 지은 격문을 각 고을에 돌리며 단기간에 수천 명의 의병이 모여 호남 의병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자 선생은 전략적 요충지를 이용해 적의 방심을 기다릴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의병군은 정면 공격을 감행하다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많은 이들이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선생은 “대장이 계시는데 어찌 먼저 도망하겠는가”라며 말을 돌려 고경명 대장의 곁으로 달려갔고, 마침내 고경명·안영과 함께 한자리에 서서 장렬히 순절하였는데 이 때 나이 29세였다.
선생의 충절은 후대에 널리 알려졌고, 1594년 사간원 사간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1604년 전라도관찰사 장만의 장계에 따라 조정은 충신정려, 부인 김씨에게는 열부정려를 내렸다.
옥과 합강마을 뒤편의 정려는 ‘충렬쌍정(忠烈雙旌)’이라 일컬어지며 오늘까지 남아 있고, 더불어 금산 종용사, 광주 포충사, 옥과 영귀서원, 옥산사 등에 배향되어 현재까지 제향이 이어지고 있다.
1663년에는 나라에서 예관을 보내 고경명·조헌과 함께 류팽로 선생에게 치제하며 금산 전투터에 ‘순의단(殉義璮)’이라 사액하였다.
선생의 순절과 함께 더욱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의 충마(忠馬) ‘오려(烏驢)’와의 일화이다.
전사 직후 애마가 주인의 머리를 입에 물고 금산에서 옥과까지 달려와 힘이 다해 쓰러져 죽었다는 전설은 선비의 의(義)가 짐승의 마음까지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감동적 전승이다.
부인은 남편의 장례 직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시도했으나 소생하였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아내, 충마가 함께 남긴 숭고한 이야기는 지금도 의마총(義馬塚)과 정려를 통해 그 정신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행장은 제봉 고경명의 아들 청사(晴沙) 고용후(高用厚, 1577-1652)가 지었으며, 후손 종룡의 집에 전해지던 『월파집(月坡集)』은 1986년 전라남도의 지원으로 영인되어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사상과 학문, 충절이 후세에도 시대적 의미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균관 학유였던 선생은 관직보다 도의(道義)를 앞세웠고, 죽음 앞에서도 명분을 선택하였으며, 가장 젊은 나이에 가장 뜨거운 충성과 절개를 보여주었다. 충절은 비석과 문집을 넘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가르침을 남겼는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서는 용기,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먼저 나서는 책임, 선비가 지켜야 할 충·효·의의 정신 등이 선생의 짧지만 빛나는 생애 속에 응축되어 있다.
오늘 선생의 삶을 기리는 이유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도의와 선비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다. 선생의 이름은 한 시대의 충절을 넘어 지금 이 시대가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 가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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