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님의 72 신통제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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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1513년 제작)의 아랫 부분에 72제자가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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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대유학당 대표(철학박사)
지난 기사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①’ (지면신문 제1149호(2025.10.15.) 1-2면, 인터넷판 http://www.cfnews.kr/coding/news.aspx/14/1/101750),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②’ (지면신문 제1151호(2025.11.15.) 3면, 인터넷판 http://www.cfnews.kr/coding/news.aspx/14/1/102515),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③(지면신문 제1152호(2025.12.1.) 1-2면, 인터넷판 http://www.cfnews.kr/coding/news.aspx/2/1/102976)에 이어 72 신통제자에 대해 설명한다.
3. 72 신통제자
『사기』 「제자열전」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 육예(六藝)에 두루 통달한 자가 77명이었는데, 안회(顔回)부터 공손룡(公孫龍)까지 35명은 대략 연령이 기록되어 있지만 수업과 관련하여 『논어』 등 서적에만 보이는 자 42명은 이름만 전한다”라고 하였다.
또 「공자세가」에는 “공자는 제자가 3,000여 명에 이르렀고, 육예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나 되었다. 안탁추와 같이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고도 72명에 들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하였다. 같은 책(『사기』)에서도 77명과 72명으로 나뉜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72명의 제자는 모두가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또 『당회요(唐會要)』에서는 77인이라 하고, 『개원례(開元禮)』에서는 72인이라 하였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에서는 “10철을 제외하고도 73명이니 모두 합하면 83명이 된다”고 하는 등 시대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72인’이라는 숫자만 변동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선정된 사람도 고정된 6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0여 명은 선정과 탈락을 반복해왔다. 예를 들어서 송나라 건융(建隆) 3년(962)에는 “공자 신통제자 72명이라는 설을 따르되 금장(琴張) 등 다섯 명을 더하고, 공하수(公夏首) 등 열 명을 뺐다”고 한 것이다.
또 제자들의 제후봉호(諸侯封號)는 각자의 출신 고을이나 입신하고 벼슬한 지역 이름으로 지었는데 지위가 오르고 내림에 따라, 그리고 제후로 봉해진 고을 이름이 공자님의 함자 ‘구(丘)’와 같을 경우는 피휘(避諱)하여 봉호 이름을 고쳤다.
1) 당나라 현종의 72제자 선정
①공자의 제자 중 10철을 선정하다
동한(東漢)에서는 공자님께 제향할 때 제자 72인을 함께 모셨다고 하나 이것은 공자님의 고향인 궐리(闕里)에서만 행해진 제향이었다. 그러므로 수(隋)나라(581-619) 이전의 시기에서는 전국에 산재한 공묘에 오직 안자만 배향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당나라 고종 때 유학을 장려하며 10철을 선정하여 모셨고, 현종은 이를 본받아 10철을 재선정하여 ➊안자를 연국공, ➋민손을 비후(費侯), ➌염경을 운후(鄆侯), ➍염옹을 설후(薛侯), ➎재아를 제후(齊侯), ➏단목사를 여후(黎侯), ➐염구를 서후(徐侯), ➑중유(자로)를 위후(衞侯), ➒언언을 오후(吳侯), ➓복상을 위후(魏侯)로 추증했다.
이어 72제자를 선정하고 작위(백작)를 추증하며 나라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는데 이때의 제자들 배열순서가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②72제자를 선정하다
당나라 현종은 개원 27년(739) 8월에 조서를 내려 다음의 72명을 72제자로 선정하며 추증했다.
“증삼을 성백(郕伯), 전손사를 진백(陳伯), 담대멸명을 강백(江伯,1), 복자천을 단백(單伯,2), 원헌을 헌백(憲伯,3), 공야장을 거백(莒伯,4), 남궁자용을 담백(郯伯,5), 공석애를 예백(郳伯,6), 증점을 숙백(宿伯,7), 안로를 기백(杞伯,8), 상구를 몽백(蒙伯,9), 고시를 공백(共伯, 10), 칠조개를 등백(滕伯,11), 공백료를 임백(任伯,12), 사마우를 상백(向伯,13), 번지를 번백(樊伯,14), 유약을 변백(卞伯,15), 공서적을 고백(郜伯,16), 무마기를 정백(鄭伯,17), 양전을 양백(梁伯,18), 안류를 소백(蕭伯,19), 염유를 기백(紀伯,20), 조술을 조백(曹伯,21), 백건을 추백(鄹伯,22), 공손룡을 황백(黄伯,23), 염계산을 동평백(東平伯,24), 진자남을 소량백(少梁伯,25), 칠조렴을 무성백(武城伯,26), 안자교를 낭야백(瑯琊伯,27), 칠조도보를 수구백(須句伯,28), 양사적을 북징백(北徵伯,29), 상택을 휴양백(睢陽伯,30), 석작을 촉군읍백(蜀郡邑伯,31), 임부제를 임성백(任城伯,32), 공하수를 항보백(亢父伯,33), 공량유를 동모백(東牟伯,34), 후처를 영구백(營丘伯,35), 진개를 팽아백(彭衙伯,36), 해용점을 하비백(下邳伯,37), 공견정을 신전백(新田伯,38), 안양을 임기백(臨沂伯,39), 교단을 동제백(銅鞮伯,40), 구정강을 기양백(淇陽伯,41), 한보흑을 승구백(乗丘伯,42), 진상을 상락백(上洛伯,43), 신당을 소릉백(召陵伯,44), 공조자지를 기사백(期思伯,45), 영자기를 우루백(雩婁伯,46), 현성을 거야백(鉅野伯,47), 좌인영을 임치백(臨淄伯,48), 연급을 어양백(漁陽伯,49), 정자도를 형양백(滎陽伯,50), 안지복을 동무백(東武伯,51), 원항적을 래무백(萊蕪伯,52), 낙해를 창평백(昌平伯,53), 염결을 거보백(莒父伯,54), 안하를 개양백(開陽伯,55), 숙중회를 하구백(瑕丘伯,56), 추흑을 임제백(臨濟伯,57), 규손을 평륙백(平陸伯,58), 공충을 여양백(汝陽伯,59), 공서여여를 중구백(重丘伯,60), 공서점을 축아백(祝阿伯,61), 거원을 위백(衛伯,62), 시상을 승씨백(乗氏伯,63), 임방을 청하백(清河伯,64), 진비를 견양백(汧陽伯,65), 진항을 영백(頴伯,66), 신정을 노백(魯伯,67), 금장을 남릉백(南陵伯,68), 안쾌를 주허백(朱虛伯,69), 보숙승을 순우백(淳于伯,70)으로 하라”
72명 중 담대멸명(1)~순우백(70)까지 70명에게 번호를 붙였다. 제일 앞에 놓인 ‘증삼 성백(郕伯), 전손사 진백(陳伯)’은 원나라 때 각기 4성과 10철로 승작(陞爵)되므로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72제자마다 봉호, 이름이 표시되고 얼굴 표정도 모두 다르게 그려지는 등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효도는 백행의 근원
72제자를 선정하면서 유의할 사람은 ‘증삼(증자)’과 ‘전손사(자장)’이다. 나중에 원나라 때 ‘증삼’은 단번에 사성(四聖) 배향(配享)으로 모셔지고, ‘전손사’는 10철 종사(從祀)로 모셔지는데 당나라에서는 두 분 모두 72제자로 모셔졌기 때문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증자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 현종은 “공자님의 말씀 중에 ‘증삼은 노둔하다(『논어』 「선진」)’고 했고, 비록 72제자의 수에 들었으나 『논어』에 4과의 과목에 뛰어난 제자로 이름이 실리지도 않았다. 근래에(당나라 고종) 10철에 참여시켰지만 끝내 등급과 차서(次序)에서 다른 사람들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선대의 본래 뜻을 살피어 옛 지위를 다시 바로잡게 하니 예법이 마침내 그 순서를 얻어 오래도록 바르게 서질 것이다. 마땅히 오래도록 우러러 따르라”라고 하면서 10철의 반열에서도 강등했다. 당나라 고종의 총장원년(總章元年, 668)에 안자에 이어 증자를 10철로 배향시켰던 것을 이때 72제자 반열로 강등한 것이다.
북송 철종 때(1087년) ‘종성공(宗聖公)이라는 칭호로 특별히 승차해서 배향될 때까지 비록 72인 중에서는 1등으로 제일 앞자리에 배치 되었다고 하지만 10철에도 들지 못하고 72제자 반열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종 때도 그림으로 그려져 종사를 받은 여타 72제자와는 달리, 진흙으로 인형을 조성하여 10철 바로 밑에 앉히는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종사하게는 했다. 효도로 유명하고, 공자님에게서 『효경』을 전수 받았다는 이유였다. 나중에 종성공이 되는 이유도 효행이었으므로 효가 백행의 근원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10철과 72제자의 평가절하 이유
사실 당나라 현종 이전에는 스승을 평가하는 관점이 덕행보다 실적이 우선이었다.
정강성(鄭康成, 정현 鄭玄)이 ‘선사(先師, 인류의 스승)’를 정의하면서 “음악에는 제씨(制氏)가 있고, 시에는 모공(毛公)이 있고, 예에는 고당생(高堂生)이 있고, 서에는 복생(伏生)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제자백가의 학자 중에서 ‘경(經)’을 잘 해석하고 잘 가르친 사람을 제향할 때 우대해서 모셨던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정관(貞觀) 때에는 ‘좌구명(左丘明), 공양고(公羊高), 복상(卜商), 곡량적(糓梁赤), 고당생(高堂生), 모공(毛公), 정현(鄭玄), 왕필(王弼), 가경백(賈景伯), 대성(戴聖), 마융(馬融) 가규(賈逵) 등 22명’을 선사로 삼아 공자님 곁에 종사하게 하였다. 안자와 복상을 제외하면 공자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제외된 것이다.
유학자들이 여러 번 그 부당함을 간했으나 당나라 고종 때 겨우 10철을 선정했고, 증자는 22현인과 같은 반열로 들어갔을 뿐이며, 72제자는 선정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유학의 정통이 문학과에서 덕행과로 옮겨갔다. 당나라 고종이 10철을 올렸고, 뒤를 이어 현종이 72제자를 선정하며 추증함으로써 무게 중심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공자님의 가르침의 근본이 덕행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우친 것은 그로부터 500여 년이나 지난 남송의 말기(1267년)였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도종(度宗)이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기 의해 공자님의 가르침을 앞세웠지만 이미 군신의 질서가 무너지고 국가가 위급해져서 그로부터 12년 후에 결국 송나라는 망했다. 덕행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2)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에서의 72제자 설명
아래의 그림은 공자님의 72 신통제자와 후대의 선유 중에 뛰어난 사람을 선정해서 공자님의 조정 뜰에 배치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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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설명하기 쉽게 1~6의 번호를 붙였다. 이중에서 1의 다섯 분, 2-1의 다섯 분, 2-2의 다섯 분, 이렇게 15인은 ‘대성지성문선왕전’ 안에 앉아 계신다. 『공자가어』에 “72명의 제자는 모두가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분들은 모두 ‘방(房)’에 들어가신 분이다. 그래서 ‘왕(공자님)’ 또는 제후의 5등급 벼슬 중에 최고 등급인 ‘공작’의 벼슬을 추존 받았다. 3-1, 3-2, 5-1, 5-2는 2등급 제후 벼슬인 ‘후작’이고, 4와 6은 3등급 제후벼슬인 ‘백작’이다. 이분들은 ‘당’에 올라간 분들이다.
여기서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의 그림에 준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림에서 72 신통제자는 ‘3-1과 3-2’가 동무(東廡)에 배열된 36인의 제자이고, ‘5-1과 5-2’가 서무(西廡)에 배열된 36인의 제자이다.
이들은 공자님을 중심으로 소목(昭穆) 관계로 배열되었는데 앞서 현종이 선정한 72제자에서 4대 성인으로 배향된 증삼과 10철로 종사된 전손사를 빼고, ‘담대멸명을 동무 1번, 복자천을 서무 1번, 원헌을 동무 2번, 공야장을 서무 2번’과 같은 식으로 좌우를 번갈아 배치되었다.
그리고 ‘증삼(증자)’과 ‘전손사(자장)’ 대신으로, 동무의 제일 끝으로 사수후 공리(孔鯉)가 추가되어 종사되고, 서무의 제일 끝에는 중도백 좌구명(左丘明)이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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