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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새해맞이 특별인터뷰]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듣는다“자기의 가치를 지키는 진정한 보수주의는 뉴라이트가 아니라 성균관에서 나와야 합니다”

  • 오흥녕 기자
  • 입력 2025.12.23 10:13
  • 글자크기설정

  • 초대 이승만부터 모든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유일한 인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이회영과 6형제들' 직계 후손
    이승만 대통령이 말하지 않은 얘기를 한 것처럼 속이는 뉴라이트는 정말 잘못돼
    뉴라이트가 국가기관을 차지하고, 잘못된 생각을 국민에게 계도하려는 시도는 강도의 짓과 마찬가지
    광복회 유튜브 '광복회TV'에서 새해 1월1일에 영상 업로드 예정

이종찬 광복회장의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 선생'의 모습이다.


47세의 심산 김창숙 선생(왼쪽)과 59세의 우당 이회영 선생(오른쪽)이 함께 담긴 1925년 사진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부친 이규학 선생과 모친 조계진 여사의 1918년 결혼 당시의 사진이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때의 모습으로, 이종찬 어린이의 뒤에 

백범 김구 선생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 할아버지 성재 이시영 선생이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있다.


병사가 실수로 놓친 수류탄에 몸을 던져 산화(散華)한 고() 강재구(姜在求, 1937-1965) 소령도 

이종찬 광복회장의 육사 16기 동기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1981년부터 1996년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붉은 말의 해인 병오년(丙午年)에 창간 57주년을 맞이하는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 <유교신문>은 통상적인 신년사 대신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이종찬(李鍾贊) 23대 광복회장과 새해맞이 특별인터뷰를 진행했다.

원래는 2025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독자들의 거듭된 요청을 반영해 815일 광복절 이전에 실시하려 했으나 대내외적으로 무수히 많은 일정 등으로 인해 연기되다가 지난 1215일 오후 230분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위치한 광복회관 3층 광복회TV 스튜디오에서 이상호 유교신문 발행인과의 대담(對談) 형식으로 이어진 인터뷰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은 89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질문 내용에 대한 빠른 파악, 거침없는 답변, 주요 사안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 나열, 핵심 쟁점에 대한 분석 등에서 탁월한 고견(高見)을 펼쳤다.

국가와 사회가 부강해졌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어른이 없는 시대이다라는 탄식이 여러 곳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보수와 진보의 양측을 모두 경험한 이종찬 광복회장은 어느 한쪽만을 편들기보다는 누가 들어도 합리적인 수준 또는 중도 성향의 국민들이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으로 과거 및 현재의 대한민국을 진단하고, 미래의 대한민국에 대한 방향도 제시했다.

이에 본지는 인터넷판(http://www.cfnews.kr)은 한꺼번에 모든 내용을 기사화하고, 지면신문은 공간의 한계를 감안해 다음 호(1155, 2026115일자)까지 나눠 게재할 예정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살아온 길>

 

19364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했다.

자는 계원(桂苑), 호는 삼인(森人),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지금 시세로 최소 5조 원 이상의 자산을 처분하며 중국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이회영(李會榮, 1867-1932)6형제들(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중 이회영 선생과 첫째 부인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李圭鶴, 1896-1973) 선생과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이자 고종 황제의 매부였던 조정구(趙鼎九) 선생의 따님인 조계진(趙季珍, 1897-1996) 여사와의 사이에서 34녀 중 여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임금의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 선생의 12대손, 영조 임금의 좌의정 이태좌 선생의 8대손, 영조 임금의 영의정 이종성 선생의 5대손, 고종 임금의 우찬성·이조판서 이유승 선생의 증손자일 정도로 대대로 정승 및 판서를 배출한 소론(少論) 명문가의 자손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부모님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계실 때 태어났으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옮겨간 충칭(重慶)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金九, 1876-1949) 선생 등이 귀국할 때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으며, 이때 김구 선생은 물론 작은할아버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선생 등과 촬영한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조선 최고 수준의 부자들로 통하다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19101230일 한양을 떠나면서 이회영 6형제가 처분한 재산은 연구자마다 논쟁 중이지만 최근까지의 연구 결과로 볼 때 토지 면적으로는 2668,335(882), 시가로는 최소 5조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나 독립운동 과정에 모두 사용되면서 6형제 중 다섯째인 성재 이시영 선생만 생존해 초대 부통령을 지내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을 받았다(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위치한 서울YWCA 일대의 넓은 토지는 당시에도 최고가에 해당되었으나 한국을 떠날 때까지 처분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제에 의해 강제처분되었다).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건국훈장 애족장(1990)),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상하이 빈민가에서 아사(餓死, 굶어 죽음), 건국훈장 애국장(1991)),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건국훈장 애국장(1991)), 넷째 이회영(고문사(拷問死), 건국훈장 독립장(1962)),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건국훈장 애족장(2012)) 등 다섯 형제는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 뒤늦게 훈장이 추서(追敍)되었고 그 외 배우자, 자녀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들이 여섯 명이나 더 있으며, 이종찬 광복회장의 부친 이규학 선생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모친 조계진 여사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서울 창신초교, 경기중을 거쳐 한국 최고 고등학교로 인정받던 경기고 52회로 입학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용오 두산그룹 명예회장, 이준용 DL(옛 대림산업)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앤컴퍼니그룹 명예회장, 배우 신구 등과 동기였으며, 졸업할 때 담임 선생님은 서울대 진학을 권했으나 군인이 되어 행동으로서 나라의 진로를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해 281의 경쟁률을 뚫은 225명의 동기들과 1956년 육사 16기로 입학했는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인 이강석도 같이 입학했다가 1학년을 마치기 전에 자퇴하고, 시험도 보지 않은 채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는 등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리다가 4·19혁명이 일어나자 일가족과 함께 권총 자살했다.

19602월 임관한 동기로는 병사가 실수로 놓친 수류탄에 몸을 던져 산화(散華)한 고() 강재구(姜在求, 1937-1965) 소령,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널리 알려진 장세동(張世東, 1936-현재) 전 안기부장, 천용택(千容宅, 1937-현재) 전 국정원장이 유명하다.

1971년 소령 계급을 유지하며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에 들어가 주영국대사관 참사관, 총무국장,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나며 군인으로서도 준장 계급으로 예편했고,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전 대통령이 주도한 국가보위입법회의와 민주정의당에 참여하며 1981년 제11대부터 1992년 제14대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네 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1996년까지 활동했다.

이런 경력을 보면 보수(保守) 중의 보수로만 인식하기 쉽겠으나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생각도 남달라서 중앙정보부 재직시절에는 김지하(金芝河, 1941-2022) 시인에게 피신하라고 알려주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에는 소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1971)의 주동자로 몰려 사법연수원에서 퇴출된 조영래(趙英來, 1947-1990) 변호사의 재입학을 주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여당 민주자유당 후보로 활동했으나 김영삼 후보로의 편향된 당내 분위기에 이의를 제기하며 탈당해 새한국당을 창당했고, 19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한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며 부총재를 맡았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시기에는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전략을 총괄했고,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거쳐 안기부장에 임명된 후 19991월에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했다.

이후에는 우당기념관 운영,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 대학생들의 사회활동 후원 등을 하다가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 문재인 후보 선대위 고문을 거쳐 2020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하며 멘토 역할을 했다.

2023525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열린 제50차 광복회 정기총회에서 제23대 광복회장으로 선출되어 그해 6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윤석열(尹錫悅) 정부와의 갈등이 커지며 2024815일 광복절 행사는 정부 행사와 별도로 독립운동단체들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했다.

이후 정부의 광복회 예산 6억 원이 대폭 삭감되며 파행이 거듭되었으나 2024123일의 불법비상계엄이 무력화되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결정으로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며 지난 63일 치러진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지난 정부에서 삭감된 광복회 예산의 원상복구지시가 내려져 오히려 기존 삭감 예산보다 2억 원이 늘어난 8억 원이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되며 정부에서도 신경쓰는 힘 있는 단체의 수장이자 대표적인 국가원로로 자리하고 있다.

202361일부터 시작된 제23대 광복회장의 임기(4)2027531일까지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90대를 앞둔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있게 의견들을 피력했다.


인터뷰에 앞서 이종찬 광복회장(오른쪽)과 이상호 유교신문 발행인(오른쪽)이 환담하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1969년 4월30일자 (유교신문 전신(前身)) 유림월보 창간호 1면을 살펴보고 있다.


광복회TV와 유교신문에서는 이종찬 광복회장님을 모시고 광복 80주년을 회고하는 말씀을 듣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유교신문 발행인 이상호라고 합니다.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올 한 해 광복회가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뜻깊은 행사들을 많이 했던 것같습니다. 8.15 광복절의 광복대행진도 그렇고,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해 이전 정부가 훼손한 정체성을 바로 세운 것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요인 환국행사를 김포공항에서 직접 개최함으로써 당시 제대로 환영하지 못한 요인들을 기리며 그 후손들을 지금 정부가 따뜻하게 맞이하는 행사도 가졌습니다. 오늘 그 현장의 주인공인 광복회장님을 모셨습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이종찬 광복회장(오른쪽)이 이상호 유교신문 발행인(왼쪽)의 질문 내용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이날 촬영된 영상은 편집과정을 거쳐 새해 1월1일에 '광복회TV'에 업로드될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 그간의 소회(所懷)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광복회장이 된 지 3년이 되어 가는데요, 제일 안타까운 것은 독립운동을 했을 때의 정열과 역사가 전부 퇴조하고,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생각이 드니 그것을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판단하여 (광복) 80주년에 과거에 남겨진 숙제들을 조금씩 재현하는 것이 광복의 의미라고 생각해 주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행진을 한다든가, 임정 요인이 오실 때 환영을 한다든가 이런 모든 일들이 과거의 것을 조금 더 회생하여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알려드리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하여 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2. 앞으로 광복 90주년 및 100주년을 맞이할 텐데 많은 사람들이 ‘90주년과 100주년도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준비를 해야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회장님의 의견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90주년도 중요하고, 한 세기를 마감하는 100년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지만 금년이 어떤 면에서 마지막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다섯 분만 남았습니다. 그 중 세 분은 거의 거동을 못하며 인사불성(人事不省, 제 몸에 벌어지는 일을 모를 만큼 정신을 잃은 상태) 상황이고, 한 분은 요양원에 계시며, 한 분만이 90여 세로 활동을 하시는데 이제 건강이 아주 나빠지고 계십니다. 90주년이면 10년 후인데 한 분도 생존해 계실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되어 말하자면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려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닌가라고 생각되고 90주년, 100주년보다는 금년에 좀 더 그런 분들의 증언을 많이 받아두는 것이 옳은 것으로 판단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니다만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3. ‘진정한 광복은 항일독립지사들이 염원하셨던 완전한 형태의 자주독립국가이다라는 말도 있는데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시작된 남북의 분단이 이제는 고착화되어 통일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부정적인 생각이 커지는 것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광복회 차원에서 북한 정부나 민간단체를 상대로 하여 대화나 교류의 제안을 할 용의가 있으신지요?

물론 있습니다. 광복회로서는 북한과는 끊임없이 역할을 많이 늘려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에서 김일성의 제3, 손주 세대에 오니 한반도는 영원히 분단 상황으로 가야 된다는 일종의 적대적 대립을 이야기하면서 영구 분단을 획책하는 것같은데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왜 남쪽에서도 흉내를 내는지, 통일을 갈망하는 분들은 장관부터 시작해서 당연하다’, ‘두 나라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저는 반대합니다. 우리는 원코리아(One Korea)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코리아입니다.

과거 (1972221일부터 228일까지) 닉슨(Nixon, 1913-1994)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은래(周恩来, 저우언라이, 1898-1976) 중국 총리가 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대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대만은 작고 대륙은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통일을 갈망합니다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대만을 중국에 귀속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세기에 못하면 내세기(來世記)라도 하고, 우리 시대에 못하면 다음 세대에라도 반드시 이룩합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고 기억에 생생한데 지금 한반도에서 대등한 분단이 되어 절실히 통일이 필요한데 적대적 두 국가로 분리하면 영원히 분단이 됩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단된 것은 인종 자체가 다른데 우리는 한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북한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이야기하더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이 더 통일로 가는 첩경(捷徑, 지름길)이 아닌가라고 생각되어서 통일부 장관이 생각을 좀 바꾸길 희망합니다.

 

4. 일제강점기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남·북한 곳곳에 분산되어 있어 국민들이 손쉽게 찾거나 뜻을 기리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남한은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효창공원, 수유리 묘역, 기타 개인 묘소 등으로 나뉘어져 있고, 북한은 대성산혁명열사릉, 신미리 애국열사릉 등에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면적인 형태를 어렵겠으나 남·북한에도 모두 추서받고 인정받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예를 들어 판문점이나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에 조성하는 것을 광복회가 나서서 충분히 진행해 봐도 좋을 것같은데 회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원론적으로는 찬성입니다.

저는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운동을 했더라도 (1945) 광복 이전에 한 것은 공로로 인정해 포상을 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사상과 이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아서 어디까지나 독립 그 자체가 중요했으므로 그것을 강조해 포상한 것은 잘했다고 봅니다.

다만 광복 이후에 분단된 국가를 서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어떤 가치의 차이가 있으므로 포상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 혁명열사로 따로 모시는 것에서도 과거에 독립운동을 했을 당시의 공적을 감안해 영웅으로 모시는 것에 찬성합니다. 나중에 통일시대에 가서라도 그런 부분에 대해 서로 인정해 주는 공통된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광복 이후라도 아주 극렬하게 양쪽에서 싸웠고,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아니고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했다는 부분도 사실은 인정을 해줘야할 텐데 아직은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좀 더 가치를 접근할 수 있는 여백을 그쪽으로 가자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작업이라고 생각하며, 공통적인 묘지를 만들거나 기억의 광장을 조성하는 것은 찬성합니다. 만약 남북 간에 대화가 되면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노력을 할까 생각이 되는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의 제3세대가 그 선조들의 세대가 생각했던 항일투쟁의 역사에 대해 그렇게 철저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나오는 말만 듣고는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5.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같은데 내년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유네스코에서는 내년을 김구의 해로 하기로 지난 1031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총회에서 승인했습니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를 이 시점에서 기리고, 부각시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광복회 차원에서 준비하는 내용들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저희도 유네스코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평가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알아봤는데 독립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예를 들어 (1994년의) 서울 정도(定都) 600, (1996년의) 한글 창제 550, (2012년의) 다산 정약용 선생 탄생 250, (2013년의) 동의보감발간 400, (2021년의) 김대건 신부 탄생 200년 등 말하자면 세계의 문화적 가치를 살찌우게 하며 기념하는 해를 높이 평가하는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백범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고 임시정부 주석을 했다는 것으로 가치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마지막으로 쓰신 글인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부강하고 남의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나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아주 융성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문화적으로 존경받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세계인 누가 읽더라도 공통된 생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 이것을 문화의 유산처럼 높이 평가하는 유네스코에서 백범 김구의 해로 지정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백범 선생께서 나는 문화적으로 남에게 존경받는 나라로 가고 싶다는 말씀은 하셨으나 구체적으로 문화가 무엇이라거나 어떤 문화인가라는 부분은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라건대 이재명 대통령 정부가 K-컬쳐, K-, K-뷰티 등이 많이 언급되는데 이 기회에 단편적인 것 말고, 우리의 체계적인 문화 비전을 정리해 백범이 생각한 문화국가와 우리나라의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을 서로 결합시키며 하나의 문화국가 비전을 만들어 세계인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 내년 1년은 그것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하려고 합니다.

 

6. 우리 사회에서 일부 사회지도층들의 친일, 일본 편향, 심지어 일본 우선주의의 모습이 종종 나타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일왕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 때문에 논란이 되고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저는 정리를 이런 방향으로 해야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싫다보다도 1945815일 광복을 기해서 그 이전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남의 나라 침범하고 식민화하려는 일본을 배척하고, 전후에 민주주의로 가면서 평화헌법을 존중하겠다는 일본을 구분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 자신이 지금 이것을 구분하고 있는데 일부가 우경화되고 있어서 전쟁 이전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망상을 가진 이들이 있는 것같으므로 세계인이 이것을 경고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항일투쟁한 것을 단순히 나라를 찾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기미년(1919) 독립선언, 2·8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 등을 다 읽어봐도 거기에는 엄청난 나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쫓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민주공화국으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자유와 민주의 기운이 확산된 시기로, 보통선거와 정당 정치의 확립을 향한 움직임이 두드러짐) 이후에는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완전히 군국주의, 식민주의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일항쟁을 한 것은 나라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적 가치를 찾아내어 일본을 제압하는 것이 또 하나의 독립운동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국군주의를 상대해 싸워서 이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 투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독립투쟁을 너무 좁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것은 (이전부터) 그런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시정부의 싸움, 독립운동의 싸움은 나라를 찾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가치가 일본의 가치를 이기는데 투쟁했다고 봅니다.

다행히 얼마 전(20251010) 이시바 전 일본 총리가 일본이 왜 이렇게 패전하게 됐느냐에 대해 반성하는 글을 쓰며 첫 번째로 군인이 일본의 모든 정치를 지배했던 잘못된 구조 때문에 패배했다고 반성했는데 저런 생각을 지금 모든 일본인이 다같이 생각해주길 희망합니다.


7. 정치권과 학계 등을 중심으로 일부 사람들이 여전히 광복의 의미를 부정하고, 이른바 건국절을 주장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국부(國父)’의 개념을 도입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추앙하려고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에 대해 회장님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뉴라이트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앞세우는 것을 참으로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도 뉴라이트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처럼 자꾸 꾸며내는데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욕 먹이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에 대한민국을 내가 건국했다고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에) 제헌헌법을 만들었을 때에 전문(前文)에 뭐라고 얘기를 넣었냐면 오늘 수립하는 대한민국은 오늘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29년 전에, 말하자면 기미년(1919)에 독립선언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오늘이 부활일이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연호(年號)도 기미년에서부터 기산(起算, 일정한 때나 장소를 기점으로 잡아서 계산을 시작함)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관보 제1호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에 발행됐는데 ‘1948이라고 쓰지 않고, ‘대한민국 30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얘기를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한 것처럼 만들어서 뉴라이트들이 자기들을 정당화하는 이것은 이 박사를 이용하려는 것이지, 이 박사를 정당하게 평가받으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9월1일자로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제1호'의 연호가 '대한민국 30년'으로 표시되어 있다.


8. 광복회에서는 뉴라이트에 대한 정의를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세력이라는 전제하에 아홉 가지 뉴라이트 판별법(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1948년을 건국절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고 임의단체로 깎아내리는 자나 단체,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연 중 주장하는 자나 단체, 일제강점기 곡물 수탈을 수출이라고 미화하는 자나 단체, 위안부나 징용을 자발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할 근거가 약하다고 주장하는 자나 단체, 뉴라이트에 협조, 동조 협력하는 자나 단체)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광복회의 이런 관점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1962)) 선생을 계승하는 우리 유림사회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뉴라이트가 득세를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친일 청산이나 식민사관 극복이 완전히 혹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데에 큰 이유가 있는 것같습니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친일 청산과 식민사관 극복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뉴라이트와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기들은 뉴라이트도 아니고, 사상 및 사고(思考)의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런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제발 국민이 세금을 내는 기관을 차지하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을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계도(啓導)하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그건 강도의 짓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별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의 돈을 받아서 해도 좋고, 자기들 돈으로 만들어서 하는 건 학문의 자유이니 말하지 않겠으나 다만 국민의 세금을 거기에 이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난 정부에서) 지금 역사학계(의 주요 기관 수장들)는 뉴라이트로 전부 도배를 했습니다. 또 일본이 우리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자기네들의 생각을 국민에게 강요하다시피 하는 그런 것은 지나친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리에서 물러나서 개별적으로 하세요. 개별적으로 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이니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국가에서 하는 기관에 들어가서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문제를 다루지 말아달라. 그리고 거기서 물러나 주길 바랍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경향성도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들어가서 원하는 역사를 정리해야지, 편향된 역사를 국민의 세금으로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9.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재의 이재명 대통령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을 겪어온 흔치 않은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대통령이라고 하면 어느 분을 꼽을 수 있으십니까?

제가 나이가 좀 많이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작은 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선생이 초대 부통령을 하셨으므로)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이재명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통령들의 인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몸소 느꼈는데 그 중에서 교훈을 쭉 얘기하자면 전부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습니다. 전부 잘 하는 면도 있고, 잘못된 면도 있는데 제가 모셨던 김대중 대통령이 그래도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비교했을 때 잘한 점이 좀 많지 않을까라고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개발에 아주 힘을 써서 참으로 공적이 많습니다. 반면에 인권이 많이 억압을 받았고, 독재에 관한 면도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공()이 과()로 인해 많이 훼손됐다고 생각이 되고요, 또 이승만 대통령도 장점이 많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국전쟁에서 안보를 튼튼히 한 것은 공이지만 독재와 장기집권을 한 부분, 친일 청산도 철저히 하지 않은 부분 등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이 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공과 과를 다 합했을 때 그래도 남은 유산이 많은 분은 김대중 대통령이지 않나 생각하고, 지금도 제가 (김대중재단의) 김대중정치학교에 가서 강의하는 이유는 그분의 남겨진 유산을 조금 알고 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10. 김대중 대통령을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분인데 함께하는 그런 선택을 하셨던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맞죠,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민정당을 하면서도 김대중 대통령이 일종의 라이벌, 즉 상대 당이라고 생각은 했어도 그 분의 생각이 옳은 면도 있었지만 틀린 면도 있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그 분이 대중경제론을 썼는데 읽어보면 굉장히 사회주의적입니다. 원래 박현채(朴玄埰, 1934-1995,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역임)라는 분이 써주신 원고를 그대로 쓴 것으로 아는데 대통령 선거에 저도 참여하면서 제일 먼저 대두된 것이 대중경제론으로는 저희들이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주의 경제는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시장경제를 해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양반이 그 자리에서 수정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수정하는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대중경제론이 대중참여경제론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IMF 사태를 극복할 수가 있었고, 말하자면 대중경제론으로는 정부가 있더라도 IMF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중참여경제론으로 대중들이 다 참여하여 같이 노력한 결과 금 모으기 운동도 나오고, 시장경제론이 나와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생각했던 길이라도 역사와 현실 등을 고려해 딱 수정할 수 있던 융통성, 실용주의, 이것이 대통령으로서는 본받을 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대통령이나 자기 것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을 잘 읽고, 노선을 수정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어떤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 그 이념을 성취하려고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김일성주의도 될 수 있고, 모택동주의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11. 202361일에 제23대 광복회장으로 선출된 당시부터 이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많은 사람들이 했는데 그런 예측에도 불구하고 광복회장으로 선출되었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는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 많이 기대했습니다. 윤석열이라는 사람을 제가 많이 아끼고, 사랑했고, 또 제 아들처럼 생각을 했는데 집권한 후에 보니까 딴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 많이 변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한 이야기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충고하고, 충고하다가 안 되니까 나중에 제가 딴 길로 갈 것을 선언하고, (2024년 정부의) 광복절 행사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길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고, 옳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에 저렇게 고난의 시간을 가는구나 싶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저는 이재명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이재명 대통령 당신은 비록 어려운 가운데 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됐는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신을 더욱 명(, 뛰어난)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 소지가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16대 미국 대통령(재위 1861-1865)이 가장 어려울 때 대통령이 됐다. 흙수저 출신이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지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을 성공적으로 승리로 이끌고, 당신의 생명을 걸고 남북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것을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12. 광복회장으로서 26개월 되셨는데 재임하시면서 가장 놀랐던 사건 또는 경험으로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은 역사학을 전부 뉴라이트식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뭐라고 이야기하냐 하면 독립운동을 해서 우리가 광복을 찾은 것이 아니요. 2차 대전에 연합국이 승리해서 우리는 덤으로 받은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겁니다라는 얘기를 들을 때 , 이제는 결별이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저한테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고, 가장 분노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13. 19876월 민주화 항쟁 이후에 개헌 상황에서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독소 조항을 없앴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난 2024년의 12·3불법비상계엄을 국회에서 해제시킬 수 있는 바탕이 거기서부터 나오게 됐는데 그때 회장님께서 많은 역할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당시에 그렇게 개편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지금의 헌법이 만들어진 시기가 1987년인데 당시는 소위 민주화헌법을 만드는 시기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군부 정권에서는 전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시정부라는 말이 없어서 제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넣는 데 일조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군부 정권에서는 전부 쿠데타를 정당화시켜 가능하도록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3년부터 재임한) 김영삼 대통령도 성공한 쿠데타는 벌 줄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당시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계엄을 선포해도 계엄의 요건이 있어서 거기에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조항들을 삽입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헌법이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선진적인 헌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4.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기 이전부터 조선의 정체성 보존과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가족과 재산까지 잃으면서 조국에 헌신했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저희 유림들 같은 경우에는 당시 재판자료를 보면 유교인이나 유림이라고 쓴 분들이 없습니다. 자기 직업을 농업인’ ‘농유생등으로 표현했는데 다른 종교는 정확하게 썼으나 유림들은 무교서당인이라고 쓴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이 국가유공자 선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부분들을 해소할 수 있는 복안(腹案)이 있으면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우리 가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질문을 하시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선 왕조가 기울여졌을 때 상당히 많은 분들이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함)을 해서 그렇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특히 저의 할아버지(=우당 이회영 선생)는 처음부터 성리학에 대한 굉장한 거부감을 가지셔서 당시에 이단시되었던 양명학(陽明學)을 하시며 강화도의 양명학 쪽에 많이 가셨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6형제가) 이동할 때에 (양명학을 하는 분들이) 많이 동행을 했습니다.

학문적으로 잘 모르는 제가 들은 바로는 성리학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등의 모든 것이 하나의 이치인데 그 이치는 따로 있었고, 인간의 심성은 그것을 배움으로써 그런 것에 대해 완벽한 인간이 되자는 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지향한 것은 그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있다, 성과 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격물과 치지가 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개발함으로써 되어야지, 개발하지 않고 따라만 간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전통은 인간을 믿자, 인간이 이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믿자는 것이고, 같은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이회영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인) 성재 이시영 선생 가문은 조금 달라서 ()는 따로 있다, ()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형제간에도 언쟁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할아버지 쪽에 가깝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여 그 분은 노비 해방도 했고, 시집간 누이 동생이 곧바로 과부가 되자 장사를 치르고 재혼을 시켜 버리셨습니다.

(할아버지) 당신도 (19세인 1885년에 혼인한 첫째 부인 달성 서씨가 1907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 여사와) 재혼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행동으로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용기있는 분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굉장히 용기 있는 처신인데 감행을 하셨구나라며 조금 동경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1919년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할 때 심산 김창숙 선생께서 참여할 수 있으셨지만 집안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3년상을 치르느라 참여를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앞장서서 하신 게 아닙니까?

저는 당시 유교에 대한 생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조금 저항을 하는 부분이 있고, 유교도 내부에 어떤 변혁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15. 과거의 사상은 그 시대 속에서 들여다보고, 그 시대 속에서 가치를 찾고, 지금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예를 들어 성리학 같은 경우는 그 당시에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성현(聖賢)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될 수 있다는 등의 혁명적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기득권화되며 원래의 취지를 상실하는 것이 반복되는데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인 것같습니다. 유교도 시대정신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개발하고 해야하는데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 않죠.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지키면서 개혁을 하는 것이 한국의 보수주의입니다. 뉴라이트를 보수주의라고 하는 데 그건 아닙니다. 보수주의는 자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인데 어떻게 일본의 것을 자기네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보수주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진정한 보수주의는 성균관에서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 이상호 유교신문 발행인의 보충 발언 : 저희들이 이야기할 때 오해라는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 중에 우리가 법치주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 유교의 인치(仁治)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비난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교의 인치론은 유교의 정치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로 인치론과 법치론(法治論)을 대비시켜 폄훼하고 비난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법은 갖춰져 있으나 법을 다루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 유교 정치론의 핵심인데 그런 오해들을 아직도 많이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 노력들을 유교권에서도 많이 해야겠지요. 성균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6. 각종 역사기관장들의 발언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 등 항일독립운동의 기관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개편되어야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일단은 (문제가 있는) 지금 있는 분은 물러나야 합니다. 독립기념관장만 해도 저렇게 독립기념관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가 되면 자기가 양심이 있으면 스스로 물러나야지, 강요나 대통령이 해임해주길 바라서 해임되면 그 보이스 마케팅을 통해서 자기가 더 성과를 올려서 이렇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같은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저렇게 전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는 ,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오히려 독립기념관이 고난을 당하고 있구나! 물러나 주는 것이 기관을 위해서 플러스가 되겠구나!’라고 할 때는 용감하게 결심하는 것이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속 뭉개고, 마치 이것을 정치무대화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17. 1936년 중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회장님의 인생 자체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이자 국난 극복의 역사인 것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장님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바라고 있었는데 마침 (2015년 출간했다가 절판된) 책의 개정판(숲은 고요하지 않다(한울엠플러스))을 내셨습니다. 책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저는 책을 하나 쓰고 싶습니다.

지난 1970년대에 어떤 분이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년에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정치적 문화운동)에 대해 세계적인 혁명의 실마리라고 하면서 굉장히 찬양을 하셨습니다. 저도 거기에 공감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문화대혁명은 이 세기의 참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속은 것같습니다.

속았으니까 죽기 전에 꼭 반성문으로 딴판인 세상을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일치시켜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냐라고 후회막급인 내용을 담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그걸 포함해서 내가 본 한국현대사, 길게 잡으면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부터 시작하고 짧게는 광복 이후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이렇게 굴러간 역사를 정직하게 한번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허락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쓰다가 죽더라도 쓰고 싶습니다.

 

18.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 특히 미래를 열어가는 젊은 후속세대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특히 정치인들에게는 김대중 대통령이 저에게 했던 이상은 높게 가지되 접근하는 방법은 상인 정신을 배워라라는 말을 옮기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이상은 높게 추구하되 접근하는 방법은 장사하는 분들의 자세에서 배워 너무 무리하게 한꺼번에, 한순간에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현실에 맞게 변용(變容)을 해도 좋습니다.

세 번째로 국민이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보(二步)를 가면 국민이 못 따라오고, 그 다음부터는 국민들과 유리(流離)가 되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니 반보(半步, 반걸음)만 앞으로 가야합니다. 반보라도 국민이 따라 온다는 게 힘 드는데 이걸 두 보, 세 보를 앞장서서 가면 그것은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분이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정치인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김대중 대통령)이 백범 김구 선생도 굉장히 비판합니다. 저도 그 비판에 찬찬히 변했습니다. 뭐냐하면 백범은 너무 앞서 나가셨고, 나중에 몰락하게 된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같습니다.

(1948510일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를 가리키는) 5·10 선거에 참여했어야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선거를 보이콧(boycott, 거부하다)한 것은 백범이 잘못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융통성, 이상은 높게 가지되 아주 현실적으로 접근하라는 얘기는 제 뇌리에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19.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항일독립지사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국가지도자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혼이 서려 있는 유교 종단의 주요 소식을 전하며 창간 57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교신문도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회고록을 출간한 바 있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본인이 본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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