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관·제집사·악단·일무단 외에 약 200여 명의 참례객 참석
- 원주향교·부여향교 등의 지역 유림, 전세버스 대여 관람 및 참례
- 갈수록 참례객이 줄고, 성균관대 이사장·총장·학생들도 함께하지 않는 모습 지속
- 서울 문묘 성균관 석전의 주목도가 갈수록 낮아지는 현상에 대한 타개책 필요
관내 임직원과 성균관대학교 유생문화기획단 청랑(靑浪) 학생들이 참례객들의 입장을 돕고 200여 명의 참례객,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예술감독 김성진, 악장 박성아)의 문묘제례악단, 성균관대 유가예술문화콘텐츠연구소 팔일무단(총괄 임학선 성균관대 명예교수)이 비천당 앞마당에 자리한 가운데 명륜당에 있던 제관들이 찬자 이욱 수복의 안내로 비천당으로 들어서며 시작되어 당상집례 서정택 전례위원장이 월대 위에서 홀기(笏記)를 읽으며 절차를 집행하고, 당하집례 정영진 석전대제이수자가 참례자들에게 각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행례(行禮)를 시작으로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겸 분헌례(分獻禮),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철변두(徹籩豆), 망예례(望瘞禮), 예필(禮畢)의 순서로 진행된 이번 춘기석전의 제관은 다음과 같다.
▶초헌관 최종수 성균관장 ▶아헌관 남후식 성균관 부관장 ▶종헌관 윤옥희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장
▶분헌관 ▷동종향위 안도섭 성균관 자문위원 ▷서종향위 최광경 성균관 자문위원 ▶전사관 위창복 석전대제이수자 ▶집례(당상) 서정택 전례위원장 ▶집례(당하) 정영진 석전대제이수자 ▶대축 권선출 석전대제이수자 ▶묘사 김경선·원재식·양재환·정연대 석전대제이수자 ▶알자 김옥란 석전대제이수자 ▶찬인(분헌관) 하영호 석전대제이수자 ▶찬인(대축) 김형열 석전대제이수자 ▶사세 이석우·이상훈 석전전례사 ▶정위 및 배위 ▷봉향 강성범 전례위원 ▷봉로 이운배 석전전례사 ▷봉작 이의석 석전전례사 ▷전작 김영기 석전전례사 ▷사준(정위) 이상명 석전대제이수자 ▷사준(배위) 황미숙 석전대제이수자 ▶동종향위 ▷봉작 김연준 석전전례사·강수권 경남향교재단 사무국장 ▷전작 김종호 석전전례사 ▷사준 최진 전례위원 ▶서종향위 ▷봉작 권선웅 석전전례사·이상기 창원향교 장의 ▷전작 양해태 석전전례사 ▷사준 박혜자 석전전례사 ▶진설 박종철 석전대제이수자·강순덕 석전전례사 ▶복식 김숙자 석전대제이수자 ▶감찰 박광영 의례부장 ▶찬자 이욱 수복
유교가 국가와 사회의 기본 질서이자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던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왕세자나 영의정 등의 최고지도자들이 참석하여 매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봉행된 서울 문묘(文廟) 성균관 석전은 일제 강점기에 성균관이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된 뒤에도 조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주요 인사들이 참여할 정도로 중시되었으며, 1948년 취임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봉행되는 모습을 관람하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번의 성균관 석전마다 ‘금일봉(金一封)’으로 표현되는 헌성금을 전달했으며 뒤를 이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음이 본지의 과거 호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본지 기사 ‘[공기 2575년 추기석전 D-22] 특집-기독교인 대통령도 참석하고, 무교 대통령도 매번 헌성금을 냈던 서울 문묘 성균관 석전(釋奠) http://www.cfnews.kr/news/view.php?no=89336, 「서울 문묘 성균관의 1957년 모습이 담긴 흑백영상 발견」http://www.cfnews.kr/news/view.php?no=102888) 등 참조).
불과 10~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최소 몇 백 명 이상의 참례객이 성균관을 찾는 바람에 질서 유지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주요 유림지도자 및 내빈들을 대성전 앞에 준비된 의자로 모시고, 일반 유림들은 좌석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같이 있게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으나 몇 년 전부터는 200개 정도 준비된 좌석조차 오전 10시에는 100여 자리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다가 1시간쯤 지났을 때는 200여 자리 정도 채워지다가 다시 줄어드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내빈들의 참여 모습도 과거에는 대통령, 국무총리, 주요 부처 장관, 주요 정당 수뇌부, 성균관대 이사장 및 총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 사회 저명 인사, 이웃종단 수장을 비롯한 주요 직위 관계자들이 당연하게 참석했으나 이제는 이들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는 모습이 당연시되고, 일부 인사들은 시작할 때 잠시 함께하다가 바쁜 일정을 이유로 자리를 뜨는 등 어수선한 모습 속에서 내빈석도 실제로는 석전을 찾은 일반 참례객들이 앉는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오랫동안 유림 활동을 지속해온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참례객들이 선의의 뜻으로 내는 헌성금(獻誠金)도 예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어 지금은 2천만 원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기록되는데 광역지방자치단체를 대표하는 향교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가 헌성되어 석전 봉행 후에 ‘어느 지역의, 어떤 향교의 헌성금 액수가 이렇게 많았다더라’는 이야기가 소문이 나는 것도 유림 세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이다.
이렇게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축소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인데 유림 전체의 집단지성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이것을 개선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장과 성균관 총무처 등 석전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주도하는 곳에서 여러 가지 편법과 거짓말, 무능으로 위기를 그냥 넘겨왔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첫째, 참례객의 숫자를 최소 2~3배 이상 부풀려서 마치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내·외적으로 홍보해온 지 오래이다.
성균관을 출입한 이들은 당연하고, 성균관 석전을 취재 및 촬영하기 위해 방문하는 기자들도 질문하는 바이며, 전국 유림들도 여러 사람들의 전언(傳言)을 통해 아는 사실인데 공개된 사진 여러 장을 조금만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성균관은 아예 참례객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회피하고, 각종 회의나 자신들이 만드는 소식지 등에서는 마치 예년에 비해 대단히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으로 포장해왔다.
둘째, 성균관의 각종 조직에 소속된 인원들조차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조직화에 실패해왔다.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향교에서 춘기석전은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 추기석전은 음력 8월 상정일에 봉행하므로 지역의 향교에 소속된 이들은 그곳 석전에 참례하느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수도권인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 거주하면서 성균관 석전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며, 이번 공기 2577년 춘기석전에 참석한 이들도 그들이 알고 있던 성균관 부관장, 원로위원, 고문, 자문위원, 전례위원은 물론 성균관유도회총본부의 조직도에 속하는 유림 상당수를 보지 못했음을 비천당 앞에 마련된 좌석들에서 확인했다.
이번에는 원주향교, 부여향교 등 일부 지역유림들이 전세버스를 대여하여 단체로 성균관 석전을 참례하는 모습을 선보였는데 그들의 모습을 본 유림 참석자들은 “그나마 저렇게 열심히 하는 곳에서 와서 다행이다. 저런 인원조차 없었으면 역대 최저 기록을 갱신할 뻔했다”라는 말을 전하고 있으니 정말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셋째, 가족·친지·지인 등과의 동반 참석은 아예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 되었다.
매우 드물게 일부 유림이 가족·친지·지인 등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이번 석전에서도 그런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으며, 독실한 유림임을 자부하던 평소의 모습들과는 너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평일에 봉행되는 경우가 많아 시간적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석전 준비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활동이 아예 없고, 사실은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성균관(成均館)이 무엇을 하는 곳’이고, ‘석전(釋奠)이 무엇인지’조차 아예 모르니 설령 가족이나 지인인 유림이 참석을 권해도 마음이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등의 이웃종단들은 매년 종교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일반 국민과의 접촉 활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대표적인 종교 행사에 놀라울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는 모습을 연례화하고 있어 이런 모습은 당연히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고, 그것을 본 정부 및 정치권은 해당 종단에 대한 지원을 신경 쓰는 모습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넷째, 극소수만 주도하며 제관(祭官)이 누구인지조차 사전 공개되지 않는 폐쇄성이 당연시되고 있다.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본지의 과거 지면 호는 물론 지금 운영 중인 인터넷판(http://www.cfnews.kr)의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상당수 향교가 미리부터 석전을 준비하면서 초정회의(抄定會議)를 열어 대다수 유림이 참석한 자리에서 다가오는 석전의 의의를 공유하고, 각자가 맡을 역할을 인지하며, 미리부터 몸과 마음을 근신하며 행례에 조금의 누도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례를 지속하고 있는데 성균관의 석전은 심지어 초헌관조차 누구인지 끝까지 숨기다가 석전 봉행일이 거의 다 되어서야 공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는 성균관장과 성균관 총무처가 공개하지 않기에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들렸던 이야기는 ‘누구를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모시려 했는데 이러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 제관으로 누구, 누구가 깜짝 등장한다더라’ ‘꼭 그 제관의 역할을 원하는 이가 있어서 소임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더라’ ‘주요 지도급 인사와의 친분 및 정치적 역학 관계가 고려되어서 그런다더라’ 등이었다.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해온 유림들은 “상식적으로 볼 때 지역의 향교들처럼 미리부터 초정회의가 진행되어 각자의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야 과연 그 유림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유림들 사이의 논의 및 동의가 이뤄질 것이고, 만약 여러 가지 이유로 처음 정했던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시급히 다른 이로 바꿔서 봉행에 차질이 없게 해야한다. 왜 성균관은 그렇게 하지 않는지 지역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전해오고 있다.
다섯째, 투명성을 확보하며 공개되는 과정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관 천망(薦望)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공개되지 않지만 봉행위원회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구성되었고, 이번 석전의 예산 및 지출은 어떻게 되며, 매 석전마다 국가유산청에서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진 2,700만 원과 석전 당일 들어오는 헌성금 등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결과물도 공개되거나 알려진 바가 없다.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지역의 향교 상당수와 달리 성균관 석전은 ‘성균관장과 총무처장이 마음대로 하는 연례행사’로 인식되고, 그렇다 보니 “헌성금을 내봐야 남 좋은 일을 시키는 셈인데 뭐하러 하냐?”는 불신감이 확산되며 점점 헌성금 액수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나라 돈을 지원받는 국가유산청 지원금은 당연히 정산서류를 만들어서 제출하고 승인을 받을 것인데 그것부터라도 성균관 홈페이지 및 공문 등을 통해서 전면 공개하고, 그 속의 문제점들에 대해 유교 종단의 주인인 전국 유림들의 평가와 개선점 제안 등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유림들 사이에서도 각종 자금 지출에 대한 상세 내용이 아예 공개되지 않으니 여전히 의심의 눈이 상당수 존재하고, 석전에 대한 편법 논란도 꽤 있음을 전국 유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여섯째, 성균관대학교와의 관계 및 실질적인 협력 과정이 부실화되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이런 말을 하면 성균관 측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으나 유림들이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성균관대학교는 심산 김창숙 초대 성균관장이 전국 유림들의 총의를 모으고, 향교가 가진 재산 상당액을 처분하며 시작된 ‘유교 종단의 대학’이어서 당연히 김창숙 성균관장이 초대 총장을 맡아 학교 기반 조성에 힘썼으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악전고투(惡戰苦鬪)하며 명맥을 이어가는 등 유림과 함께해왔다.
하지만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매우 불편한 관계였던 탓에 김창숙 성균관장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공작이 계속 전개되었고, 그 결과 김창숙 관장이 성균관장, 유도회총본부 회장을 비롯한 모든 유림관련 직위는 물론 성균관대 총장 자리에서도 쫓겨났으며, 오랜 기간의 혼란을 거쳐 지금은 삼성그룹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므로 과거에는 우리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현실을 강제로 뒤집을 수는 없으나 어쨌든 뿌리는 한 곳이었던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는 지속적으로 협력의 길을 모색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제이다.
그런데 예전의 본지 기사들을 살펴보면 석전을 비롯한 성균관 주요 행사에 관례적으로 참여하던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총장 등의 주요 직위 관계자들이 점점 바쁜 일정 등을 이유로 함께하지 못하고 있고, 성균관대 학군단이 석전 행사장 입구부터 도열하는 한편 신입생들이 돌아가면서 일무(佾舞)를 배워 석전 당일에 추던 모습이 사라지며 이번 석전에서도 몇몇 학생들만 학교를 오가다가 큰 소리가 들려 잠시 살펴 보거나 자리에 앉아 관람하는 모습만이 간혹 눈에 띄었다.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균관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홍보활동도 역시 전무하다보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성균관대 학교 당국 및 학생들과의 소통이 이 정도로 부실하고 무슨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일곱째, 엄숙하고 질서 정연한 모습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성균관은 ‘공간이 좁다’는 이유를 대며 비천당 내부의 취재를 극도로 제한하며 자신들이 신뢰하는 소수 인원에게만 촬영을 허락하여 일반적인 유림에게는 덜 알려졌으나 그동안 이것 역시 유림 세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은 심지어 음복주를 만드는 쌀의 수량까지 국가가 정했음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본지 기사 「석전(釋奠) 음복주를 만드는 쌀의 수량까지 국가가 정했다」 http://www.cfnews.kr/news/view.php?no=88189)로 엄격함과 질서 정연함이 생명이었으나 조선 말기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 광복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예전의 엄숙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균관과 향교 등에서 오랜 생활을 해온 선배유림들의 증언에 의하면 후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학식과 바른 자세를 가진 이전의 선배들로부터 가르침과 교육을 받을 당시만 해도 감히 농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함이 존재했고, 만약 배운 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불호령이 떨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시절에는 석전의 연습도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할 정도로 진지하게 이뤄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 아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들이 파고 들기 시작하면서 성균관 석전에서 봉행 순서나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의복 하나, 걸음걸이 하나, 동작 하나부터 의례의 엄숙함과 질서 정연함은 묻어나는 것이고, 평소에 그렇지 못했다면 석전을 앞두고는 훨씬 근신하며 연습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바쁘다’ ‘사정이 있어 곤란하다’ ‘대충 다 안다’라는 논리로 예전에는 당연시되던 ‘봉행 3일 전부터의 연습’을 빠지는 등의 모습이 이뤄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석전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했는지도 역시 비공개 상태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나 오랜 유림생활을 해온 이들은 “첫 부분부터의 모습을 보면 그곳의 수준과 분위기가 어떤지를 파악한다”고 할 정도로 행례를 잘 아는 이들이 많은데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이 전국 향교의 모범이 될 수준인지는 스스로 물어봐야할 시점이다.
“예전에는 기침 소리도 못낼 정도로 그런 분위기가 있는데 지금은 아니네요?”라는 성균관대 졸업생의 지적이 있었을 정도로 행례를 봉행하는 모습은 물론 참례객과 성균관 직원들이 오가는 모습과 행동거지, 자화자찬(自畵自讚)하는 듯한 분위기의 만연(蔓延) 등은 지금의 성균관 석전의 수준이 지역에서 잘 하는 향교들보다 과연 더 나을 수 있겠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유교 종단의 중앙기관이자 우리나라 유교를 대표하는 곳답게 어디보다도 모범적이고, 누구보다도 배울 점이 많은 모습을 과연 지금의 성균관과 성균관 직원, 관계자들이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점이다.
‘창간 57주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인 본지는 「성균관, 공기 2574년 추기석전 봉행」(http://www.cfnews.kr/news/view.php?no=79940), 「성균관, 공기 2575년 춘기석전 봉행」(http://www.cfnews.kr/news/view.php?no=84951), 「성균관, 공기 2575년 추기석전 봉행」(http://www.cfnews.kr/news/view.php?no=90026), 「성균관, 공기 2576년 춘기석전 봉행- 본지, 창간 56년만에 처음으로 총무처 방해로 봉행 장면 대부분 촬영 못해」(http://www.cfnews.kr/news/view.php?no=95277), 「성균관, 공기 2576년 추기석전 봉행」(http://www.cfnews.kr/news/view.php?no=101428), 「서울 문묘 성균관의 1957년 모습이 담긴 흑백영상 발견」(http://www.cfnews.kr/news/view.php?no=102888), 「<사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문묘 일무 원형이 무엇인지 이제는 답해야 한다」(http://www.cfnews.kr/news/view.php?no=78312), 「<사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언제까지 유림들을 우롱할 것인가」(http://www.cfnews.kr/news/view.php?no=84538), 「<사설> 석전 일무 원형 복원은 성균관과 성균관대에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다」(http://www.cfnews.kr/news/view.php?no=88050), 「<사설> 일무를 포함한 석전대제의 전승 주체는 '석전대제보존회'다」(http://www.cfnews.kr/news/view.php?no=88390), 「한국국학진흥원, 성균관·향교·유도회·서원 등이 포함된 근대문화 아카이브 최초 공개」(http://www.cfnews.kr/news/view.php?no=88477) 등의 기사들을 통해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서울 문묘 성균관의 고유한 문화유산인 석전(釋奠)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세상에 진실을 알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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