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적 95년’만에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던 총동창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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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1879-1962)은 한평생 조국 독립, 유교 중흥,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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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의 3남 2녀 중 차남이 김찬기 선생이다.
지난 1962년 심산 김창숙 선생이 수여받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패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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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은 61명에게만 수여됐고, 그 중 독립유공자는 33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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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 형 김환기 선생과 동생 김찬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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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선생의 모교인 진주고교는 서부 경남 최고의 명문학교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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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9일 개최된 「독립운동가 김찬기 선생 명예졸업장 수여식」에 선생의 영정이 입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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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창 진주고교 교장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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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선생의 장남 김위(오른쪽 첫번째) 선생과 장녀 김주(왼쪽 세번째) 여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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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선생의 유족들이 진주고 역사관 벽면에 부착된 김찬기 선생 설명자료 앞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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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선생이 큰 역할을 했던 파리장서(巴里長書)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번역되어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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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파리장서운동과 심산 김창숙 선생 등 유림들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보도를 지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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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중국으로 떠난 김창숙 선생이 47세이던 1925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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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선생이 1927년 6월14일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을 때의 모습을 접견했던 차남 김찬기 선생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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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진주고보 1학년 김찬기 군이 체포된 사실이 『중외일보』 1930년 2월11일자 3면에 보도됐다.
과 박상희 선생(가운데)_수정.jpg)
1930년대에 김찬기 선생(왼쪽)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 선생(가운데)이 부산 해운대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으로, 두 사람의 친분 관계를 짐작케 한다(출처-명예졸업장 수여식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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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선생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1930년대 후반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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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8일 서울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빨간 네모 칸으로 표시한) 위당 정인보, 백범 김구, 심산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유교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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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무리하게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자 반대 입장을 견지했던 김창숙 선생이 경찰의 곤봉 가격으로 인해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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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손응교 여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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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손응교 여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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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손응교 여사의 가계도이다('울산여성의 독립운동_울산여성가족개발원'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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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응교 여사의 친정아버지 손후익 선생은 유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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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응교 여사와 장남 김위 선생의 모습이다.(출처-네이버 블로그 '방랑가족의 유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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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3묘역 620번에 위치한 김찬기 애국지사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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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7묘역 100번에 위치한 형 김환기 순국선열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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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의 내용과 첨부자료 상당수가 오류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의 각종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1945년 해방 후에는 유교 종단 성균관의 성립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의 차남으로, 부친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해방 후 고국에 귀국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김찬기(金燦基, 1915-1945) 선생이 (일제에 의해 제적된 지) 95년만에 모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4월19일 오후 1시 경남 진주시 상봉동에 위치한 진주고등학교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고(故) 김찬기 선생의 장남 김위 선생과 장녀 김주 여사는 정의창 진주고 교장으로부터 아버님에 대한 명예졸업장을, 김영태 진주고총동창회장(45회 졸업생, 진주 한일병원 원장)으로부터는 꽃다발 및 감사금을 전달받았다.
서부 경남지역 최고의 명문학교로 오랫동안 명성을 날려온 진주고교의 개교 100주년(1925-2025)을 기념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이 날 행사는 진주고교와 진주고총동창회가 기념식 도중에 「독립운동가 김찬기 선생 명예졸업장 수여식」을 따로 마련해 오후 1시 45분부터 인트로 영상 상영, 유족 탑승차량 입장, 유가족 등단, 명예졸업장 수여, 꽃다발 및 감사금 전달, 김지현 경남서부보훈지청장 인사말, 경남서부보훈지청장 감사패 전달, 유족의 기념관 이동, 교가 제창, 폐회 선언, 영정사진 기념관 이동 및 안치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고인의 장남 김위 선생은 유가족을 대표해 “진주고보(진주고)에서 아버님을 찾아서 이런 명예졸업장을 주시니 너무 마음이 기쁘고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법환 48회 졸업생(진주문화사랑모임 이사장)이 관련 내용을 파악해 동창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올해 행사를 맡았던 주관기(主管期, 담당하는 기수)인 ‘진주고 72회(회장 김진수)’가 명예졸업장 수여를 단순하게 종이 한 장을 전달하는 형태가 아니라 많은 동창 및 지역 인사들이 모이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의 행사로 진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동창들의 의견을 두루 전달받은 김영태 총동창회장이 흔쾌히 동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MBC 경남과 KBS 창원 등 지역언론에서도 관련 내용을 적극 보도했다.
일제강점기이던 1915년 5월5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大家面) 칠봉리(七峯里) 504번지에 위치한 고향집에서 의성 김씨(義城金氏) 문중의 부친 김창숙, 모친 장세징(張世徵, ?-1951)의 3남 2녀(큰 누나 김병기(金炳基), 작은 누나 김덕기(金德基), 형 김환기(金煥基, 1909-1927), 본인, 동생 김형기(金炯基, 1918-?))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찬기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에서 유교 대표가 소외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 부친 김창숙 선생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수습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1919년 1월18일부터 6월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던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파리장서)’을 만들고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날인받아 제출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면서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로 성장했다.
‘경북지역을 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중국으로 오라’는 부친의 명을 받은 형 김환기가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인 1925년에 부친이 머무르고 있던 베이징으로 떠나고, 아버지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돌아갔으며, ‘다시 군자금을 모아 오라’는 명을 받은 형 김환기가 1926년 7월에 귀국했다가 ‘유림단 독립운동자금 모금사건(제2차 유림단 사건)’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수개 월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병이 악화된 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27년 12월20일에 불과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생활로 인해 몸이 상한 부친 김창숙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의 영국 조계 지역에 있던 공제병원(恭濟病院)에 입원했다가 (중국 현지에서 알고 지내다가) 문병을 왔던 유세백과 박겸의 밀고(密告)를 받은 일본 경찰에 의해 1927년 6월14일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모진 고문을 받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장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1926년 12월28일 발생한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義士)의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사건’ 주동자로 1년 넘게 재판을 받으면서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므로 일본 법률에 근거해 변론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변호사 선임도 거부하며 징역 14년을 언도받고 수감생활을 지속했고, 1928년 7월에서야 처음으로 두 아들(찬기, 형기)을 데리고 온 아내와 면회할 수 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진양 하씨(晋陽河氏) 집안으로 시집간 고모가 있던 경상남도 진주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김찬기 선생은 1929년 3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5년제, 학년당 50명 정원)에 입학했는데,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기도 전인 1930년 1월17일에 지난해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한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의 시위에서 학생 3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며 29명이 구속되고 24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자 1월20일 구속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문 3,000여 매를 시내 곳곳에 배포하다 1월21일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5월1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징역 1년 6개월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선생은 일제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던 학교에서 제적되어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대구로 거주지를 옮긴 김찬기 선생은 중앙동 파출소 뒤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는데, 이 중에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재임 1963-1979) 대통령의 셋째 형으로, 동생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기자, 독립운동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대구 10·1 사건의 와중에 숨진 박상희(朴相熙, 1905-1946) 선생과도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전한다.
한편, 집행유예 기간이던 1933년에 울산 지역의 유력한 유림가문의 어른이자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으로 부친 김창숙 선생을 도왔던 문암(文岩) 손후익(孫厚翼, 1888-1953) 선생의 1남 4녀 중 셋째이자 둘째 딸인 손응교(孫應喬, 1917-2016) 여사와 혼인했는데, 이때 이들을 중매했던 이는 손응교 여사의 외삼촌 정수기 선생이었다.
을미년(1895)에 경주에서 의병을 이끌었던 증조부 손최수(孫最秀, 1851-1918), 1926년 ‘2차 유림단 사건’ 때 옥고를 치른 조부 손진인(孫晋仁, 족보 이름 손진수(孫晋洙), 1869-1935), 의병 활동과 교육운동을 하다가 상해임시정부 초기부터 투신했던 종조부 손진형(孫晉衡, 1871-1919), 김창숙 선생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던 외삼촌 정수기(鄭守基, 1896-1936), 국내·외를 오가며 각종 활동에 참여했던 숙부 손학익(孫鶴翼, 1908-1983) 등 다수의 독립운동 국가유공자들이 계셨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손응교 여사는 1925년 가족 모두가 원래 고향이었던 경북 경주군 강동면 오금리를 떠나 경남 울주군 범서면(凡西面) 입암(立岩)마을로 이사하며 그곳에서 자랐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6),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에게 배웠던 아버지 손후익은 유학자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1919년 파리장서 사건 당시 자금모금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김창숙 선생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중국으로 갔던 김창숙 선생이 1925년 8월부터 1926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국내에 몰래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는 와중이었던 1926년 1월 대구에서 기차로 양산 물금역에 도착한 후 승합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향하다가 언양천을 지나던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며 허리를 크게 다쳐 움직이기 어렵게 되자 할아버지 손진인과 아버지 손후익 부자가 수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가 집으로 업어온 후 요양토록 했다.
그러나 1926년 4월에 김창숙 선생이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으로 되돌아간 후 특별조사반을 구성한 일경은 전국에서 약 50명의 관련자들을 체포했는데 1919년의 파리장서로 인해 발생한 제2차 유림단 사건의 주요 인물로 수배를 받고 있던 범죄자를 숨기고 도와준 것이므로 후일 두 분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손응교 여사는 혼인 한 달 보름 후 남편과 함께 대전형무소로 옮겨가 있던 시아버지 김창숙 선생을 찾아가 정식으로 처음 뵈었는데 심한 고문의 휴유증과 어려운 감옥살이의 영향으로 평생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앉은뱅이 신세가 된 김창숙 선생은 ‘흰옷을 입은 채' 간수에게 업혀 나와 둘째 아들 부부를 만났다.
시아버지 김창숙 선생이 1934년 10월에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고,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며느리 손응교 여사는 다리를 못 쓰는 김창숙의 손발이 되었을 뿐 아니라 퇴원 후에는 대구에 있는 부부의 집에 시아버지를 모시고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지속된 시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갓난아기였던 아들과 딸을 포대기에 업고, 비밀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국내는 30여 차례, 중국과 만주는 세 번을 오갔는데 이때 만났던 인사들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선생 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김찬기 선생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로 1934년 11월5일에 체포되었다가 한 달여 만인 12월6일에 풀려났고, 1936-1937년에는 대구와 경상북도 칠곡에서 최소복(崔小福)·정칠성(鄭七星)·이영석(李寧錫)· 이병기(李丙驥) 등과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며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는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목계처럼 위장한 독서회(讀書會)를 만들고 대구, 경상북도 성주, 경상남도 합천, 울산 등에서 모임을 가지며 조선의 역사·어학·문학·사상 등을 학습하고 민족의식과 계급 의식을 심화시켰다.
태평양전쟁 등으로 전선을 확대하며 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던 일제의 패전을 위해 후방을 교란하는 반전반제운동(反戰反帝運動)도 모색하다가 소위 ‘왜관 사건(倭館事件,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차별에 반발해 교사들을 집단 폭행함)’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세 번째로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던 1938년 5월에 아내 손응교 여사가 장남 김위 선생을 낳았는데, 형 김환기 선생이 일제 경찰의 고문 휴유증으로 지난 1927년 세상을 떠나고 자녀도 없다 보니 김찬기 선생의 장남인 김위 선생이 자연스럽게 종손(宗孫)의 위치가 되었고 할아버지 김창숙 선생은 1962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손자를 옆에 두며 애지중지했다.
한편 1941년 3월 보석(保釋)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가석방된 김찬기 선생은 거주지를 제한당하여 표면상 일체의 항일 활동을 중지한 상태로 지내다가 경북 성주군 수륜면의 금광인 다락광산에 위장 취업해 활동을 모색했는데 이때 장녀 김주 여사가 태어났으며, 1943년 12월 부친 김창숙 선생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 임무를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김주 여사가 어머니 손응교 여사에게 들었다는 증언(오마이뉴스 기사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에 의하면 왜관역에서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출발하던 김찬기 선생은 어린 딸을 안은 채 눈물로 전송하는 아내에게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응교 여사의 뱃속에는 김주 여사의 동생이 있었고,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으나 1945년 세 살 되던 해에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2남 1녀였던 김찬기 선생과 손응교 여사의 자녀는 장남 김위(1938년생), 장녀 김주(1941년생) 등 두 분만 남겨져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중간에 베이징에서 일제 경찰에 잡히는 등의 고난 끝에 1944년 11월 중화민국 국민정부(주석 장제스)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庆)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찬기 선생은 그동안의 독립운동과 체포, 투옥, 고문 등의 휴유증으로 쇠약해져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귀국을 준비하던 와중인 10월11일 가족도 없는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친 김창숙 선생과 친분이 깊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은 김찬기 선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기를 엇지간고 만리(萬里)뿐가 도산검수(刀山劒水)/ 옥(玉)도곤 귀한 선비 게서고만 흙이라니/ 안 헤저 다시 온단들 뉘라 권줄 줄 알리요'[현대어로 바꾸면 다음의 뜻임 : 가기를 어찌 갔는가? 만리나 되는 (이국 땅의) 먼길 뿐이었나? 도산검수의 험한 길이었네/ 옥보다 귀한 선비 계셨건만 죽어 흙이 되다니?/ 안 헤어져서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화장해서 흙이 되었으니) 누가 그 사람인줄 알겠는가?] 라는 추모시를 지었고, 이 시는 고인이 잠들어 있는 대전현충원의 고인 묘소에 새겨져 있다.
김찬기 선생의 유해는 화장된 후 나무로 짠 작은 유골함에 담겨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지사를 비롯한 요인들이 귀국할 때 돌아와 고향으로 봉환되었다가 서울 현충원을 거쳐 지난 2017년 10월18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3묘역 620번 묘비 아래에 이장(移葬)되었다.
정부는 김찬기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부친 김창숙 선생, 형 김환기 선생과 함께 부자(父子) 3인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모습은 이제 몇몇 이들만 아는 사실이 된 채 부모님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4의 묘소, 형 김환기 선생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7묘역 100번에 안장되어 있다.
생전에 몇몇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아내 손응교 여사는 “(독립운동과 투옥 등으로 집을 비운) 남편과 함께 보낸 시간이 열두 달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는데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것과 앉은뱅이 신세로 집에 계신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으며, 해방 후 일제에 의해 망가진 유림조직을 복원 및 재구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시아버지 김창숙 선생을 도왔으나 선생이 이승만 정권과 친일유림 등의 탄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난 후 본인 소유의 집 한 채 없이 곤궁하게 생활하게 되자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철학과로 진학을 희망했으나 “너는 기술을 배워라”고 하셨던 조부 김창숙 선생의 권유로 조선공학을 전공한 아들 김위 선생이 대학 졸업 후 취업하고 나서야 생활이 나아졌으며, 지난 1990년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경북 성주의 종택으로 돌아가 종부로 자리를 지켰던 손응교 여사는 지난 2016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취재 과정에서 상당한 자료와 내용의 혼선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의 설명과 다른 자료들이 연도·날짜 등의 시기는 물론 내용도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확인됐고, 독립기념관(관장 김형석) 등의 독립운동 관련 기관에서는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좀 더 체계적인 연구 및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내용 및 자료 도움 이영식 60회 졸업생·진주고 서울동창회 홍보차장·서울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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