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성 칼럼】 모두의 족보, 기록문화의 민주화 〈하〉

  • 등록 2026.09.10 21: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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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백성의 문화적 양반화와 특권의 보편화

 

지난 글의 마지막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져 갔는데, 왜 양반이 향유하던 족보문화는 오히려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을까?”

 

사람들은 양반이 되기 위해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족보에 참여하면서 족보는 더 이상 양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 역설은 한국 족보의 역사를 넘어 한국 사회의 문화변동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졌지만, 문화로서의 양반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권의 철폐, 그리고 특권의 보편화

 

근대로 접어들면서 신분제가 해체되고 양반이라는 신분이 가졌던 제도적 특권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양반층이 오랫동안 향유했던 문화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과거 일부 계층이 주로 향유하던 문화 가운데 상당 부분은 신분제가 사라진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교육이 가장 분명한 사례다. 글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학문을 익힐 기회가 한때 일부 계층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교육은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되었다. 과거 소수에게 집중되었던 지식과 교육의 기회가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린 것이다.

 

복식도 그렇다. 신분에 따라 옷의 재료와 색깔, 형태를 달리하고 특정한 복식을 특정 계층만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 그러한 신분적 장벽은 사라졌다. 정원 문화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자연을 감상하며 그 안에 자신의 취향과 정신세계를 담는 일은 한때 왕실과 사대부 등 일정한 경제력과 문화적 여유를 가진 계층이 주로 향유하던 문화였다. 오늘날 정원문화는 더 이상 특정 신분의 전유물이 아니다.

 

특권은 철폐되었지만, 과거 특권층이 향유하던 문화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일부는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리고 보편적인 문화가 되었다.

 

이것을 ‘특권의 보편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례가 족보다. 양반은 사라졌지만, 족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성씨와 본관을 중시하고, 자신의 선조를 기억하며, 같은 선조의 후손들이 문중을 이루고, 족보를 만들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문화는 오랫동안 양반층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런데 신분제가 사라진 뒤에도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성씨와 본관을 말하고, 선조를 찾고, 문중을 이루며 족보를 편찬하고 증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실제 양반의 후손이 되었느냐가 아니다. 양반이라는 신분의 보편화가 아니라, 양반층이 주로 향유하던 계보문화의 보편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장기적인 역사현상을 ‘전 백성의 문화적 양반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양반화’란 모든 한국인이 양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 양반층이 주로 향유했던 성씨와 본관, 선조에 대한 기억, 문중, 족보와 같은 문화적 자산이 사회의 더 넓은 구성원에게 확산되고 공유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족보는 교육이나 복식, 정원과 무엇이 다를까. 족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문화의 향유자를 넘어 기록의 생산자로-기록문화의 민주화

 

교육이나 복식, 정원 문화와 달리 족보는 누군가가 직접 기록을 만들어야 존재할 수 있다.

 

교육의 보편화가 지식에 참여할 기회를 넓힌 것이라면, 족보의 보편화는 자신의 선조와 가계를 스스로 기록하고 그 기록을 후대에 남길 기회를 넓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의 이름을 찾고, 계통을 확인하고, 흩어진 후손의 자료를 모으고, 새로 태어난 사람을 기록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비용을 마련하여 족보를 다시 편찬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다시 그 일을 반복한다. 따라서 족보문화가 사회 전체로 확산했다는 것은 단순히 문화의 향유자가 늘어났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록의 생산자와 전승자가 함께 늘어났다는 뜻이다. 과거 특정 계층이 중심이 되어 만들던 계보기록을 더 많은 문중이 스스로 만들고 증보하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달하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 백성의 문화적 양반화’는 ‘기록문화의 민주화’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화는 오늘날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과거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기록문화의 민주화란 자신의 선조를 기억하고, 자신의 가계를 기록하며, 그 기록을 후손에게 전달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회적 주체의 범위가 확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국가가 백성을 기록하는 것과도 다르다. 국가는 행정과 조세, 군역 등을 위해 호적과 각종 장부에 백성을 기록했다. 그것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족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조와 가족의 기억을 스스로 기록하고 후손에게 전한 민간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족보문화의 확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기록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기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기록을 다음 세대가 다시 고치고 보태어 전승하는 문중들이 사회 전체로 확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전 문중‧전 백성으로의 확산, ‘모두’에는 여성도 포함

 

여기에서 한국 족보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나타난다. 세계 여러 지역에도 계보기록은 존재한다. 중국에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되고 방대한 족보 전통이 있으며, 명·청대를 거치면서 족보 편찬이 평민층으로 확산된 사례도 확인된다. 일본과 유럽에도 다양한 형태의 가계와 계보 기록이 존재한다.

 

따라서 단순히 ‘한국에 족보가 있다’는 사실은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확산의 정도와 기록의 생산주체다.

 

중국에서도 족보문화가 평민층으로 확산되었지만 지역과 종족, 사회계층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근현대에 이르러 족보 편찬과 증보에 참여하는 문중의 범위가 사회 전반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자신의 성씨와 본관을 인식하며 선조와 계보를 기억하는 문화 역시 전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현재까지의 비교연구와 조사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 문중의 족보’와 ‘전 백성의 족보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광범위한 사회적 확산이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정밀한 국제비교와 실증자료의 축적과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만 놓고 보더라도 한국의 사례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은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전 문중’과 ‘전 백성’은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 문중’은 계보기록을 만들고 증보하고 전승하는 생산주체의 보편화를 뜻하고, ‘전 백성’은 자신의 선조를 기억하고 자신의 가계를 기록하며 그 기록문화를 향유하는 참여 주체의 보편화를 뜻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 한국 족보문화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모두의 족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또 하나 살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누가 족보에 들어갔는가뿐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기록했는가 하는 문제다. 한국 족보에는 딸과 사위, 외손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그 기록의 범위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딸과 사위, 외손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시대별로 비교하면 당시 사람들이 가족과 친족의 범위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양반의 족보에서 모두의 족보로’라는 변화는 단순히 더 많은 신분계층이 족보에 들어갔다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기록에 참여하는 사람의 범위가 어떻게 확대되었는가와 함께, 가족과 친족을 기록하는 범위와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까지 살펴봐야 한다.

 

이 역시 앞으로 실제 족보자료를 통해 검증해야 할 중요한 연구과제다.

 

특권의 보편화가 남긴 거대한 기록군(群)

 

이제 상편에서 시작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왜 그렇게 족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까. 개인의 동기는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개인의 선택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누적되면서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거대한 사회문화적 변화가 만들어졌다.

 

과거 일부 계층이 주로 향유하던 계보문화가 더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문화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족보를 직접 만들고, 증보하고,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기록의 주체가 되었다.

 

특권의 철폐가 문화의 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문화적 특권의 보편화로 이어진 것이다. 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졌지만 문화로서의 양반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전 백성의 문화적 양반화’이고, 족보라는 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기록문화의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적 변화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그것은 몇몇 가문이나 일부 지역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전 문중과 전 백성의 수준에 이를 만큼 광범위한 계보기록 문화로 발전했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족보 한 권은 한 가문의 기록이다. 그러나 수많은 문중이 수백 년 동안 족보를 만들고 고치고 증보하고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해 왔다면 그것은 한 가문의 기록을 넘어선다. 한 사회가 자신의 선조와 가족, 관계와 기억을 세대를 넘어 기록해 온 거대한 기록문화가 된다.

 

한국 족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적 가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된 족보 몇 권이 남아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특정 계층에서 시작된 계보기록문화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수많은 문중과 사람들이 스스로 기록의 생산자와 전승자가 되어 수백 년 동안 그 기록을 이어온 역사적 과정과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방대한 기록군(記錄群, fonds)을 함께 보아야 한다.

 

“양반의 족보에서 모두의 족보로. 특권의 철폐에서 문화적 특권의 보편화로. 그리고 기록문화의 민주화로.” 이 거대한 변화가 세계의 다른 계보기록 문화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갖는지는 앞으로 더욱 치밀한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한다.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나타난 ‘전 문중과 전 백성’의 수준의 계보기록 문화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역사적 현상이라는 사실이 객관적인 비교연구를 통해 확인된다면, 한국 족보는 한 나라의 가족기록을 넘어 인류가 자신의 선조와 관계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 기억을 어떻게 사회 전체의 기록문화로 발전시켜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세계적 기록유산으로 새롭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정호성 (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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