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0 (월)

  • 맑음동두천 24.8℃
  • 구름많음강릉 21.3℃
  • 구름많음서울 26.8℃
  • 흐림대전 27.4℃
  • 흐림대구 26.1℃
  • 흐림울산 26.7℃
  • 흐림광주 30.0℃
  • 흐림부산 28.2℃
  • 흐림고창 27.4℃
  • 흐림제주 28.2℃
  • 구름많음강화 25.2℃
  • 흐림보은 25.7℃
  • 흐림금산 27.0℃
  • 흐림강진군 28.8℃
  • 흐림경주시 25.7℃
  • 흐림거제 2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기고]해남향교 향사 미산서원의 '민신'이 서린곳, 아침채

아침재에 서서 생각한다...여흥민씨 충절과 해남의 오래된 길
"난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br data-cke-eol="1">

아침재에 선 손은수 기자

 

해남읍과 마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금강산 서쪽, 학동 뒷산을 오르다 보면 작고 담담한 고개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름하여 ‘아침재’. 남쪽으로는 해남읍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마산면이 내려다보이는 이 고개는, 지금은 그저 한적한 임도에 불과하지만 오래도록 사람의 왕래와 기억을 품어온 길이다.

 

아침재의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해남읍으로 부임한 현감들이 매일 아침 마산면 장춘리, 옛 죽산현에 살던 여흥민씨 종가를 찾아 문안을 드리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영의정으로 추존된 충정공 민신의 종가였으니 현감이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시의 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의 발길이 오가던 재는 어느새 ‘아침재’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아침재 아래에는 미암산 자락에 자리한 미산서원이 있다. 해남향교가 매년 음력 8월5일 원사제향을 올리는 이 서원에는 충정공 민신과 그의 아들 보창·보해·보석·보흥 등 네 충신의 신위가 봉안돼 있다. 미산서원은 단지 서원이 아니라, 한 집안의 멸문지화와 조선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민신은 단종을 지킨 ‘삼중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문종 때 병조판서, 단종 원년에는 이조판서를 지녔다. 세종 재위기에는 김종서와 함께 두만강 동북 6진을 개척하며 국경을 넓혔고, 어린 단종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수양대군 세력의 눈 밖에 나는 일이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년, 민신은 김종서의 일파로 몰려 참살당했고 다섯 아들까지 함께 희생되는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한다. “민신의 아내 우비와 딸 산비는 대호군 안경손에게, 민보흥의 아내 석비는 김질에게, 민보창의 아내 두다비는 이사철에게...”

 

한 집안의 구성원이 노비로 처분되는 장면이 그대로 적혀 있다. 역사의 책 속에조차 숨길 수 없었던 비극이다.

 

그나마 그의 혈통은 극적으로 이어졌다. 손자 민중건이 일곱 살 때, 집안 하인이 어린아이를 항아리에 넣어 지게로 짊어지고 달아나 외조부 김종에게 피신시킴으로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후 민중건은 해남 호장 정문필의 사위가 되어 가문은 다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민신이 복관된 것은 사육신이나 삼정승보다 훨씬 늦었다. 중종 때 이미 복권 논의가 시작된 다른 충신들과 달리, 민신은 정조 5년(1781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과 장릉 충신각에 배향되었다.

 

그의 충절은 해남읍 서림공원 충정사와 사충문에서도 기리고 있다. 마산면 장촌리에는 지금도 여흥민씨 부조묘가 자리해 민신과 아들들의 넋을 위무하고 있다.

 

아침재는 이 모든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현감들이 충정공 종가에 인사하러 오가던 길, 마산면민이 해남읍으로 드나들던 유일한 길, 그리고 지금은 구교리 팔각정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임도로 남은 길. 오래전 역사의 그림자가 스쳐갔던 이 고개는 오늘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로만 듣던 아침재.

 

한 번쯤 걸어 올라 그 고요한 어깨 위에 서보면, 길은 말없이 오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남읍-마산면 경계 아침재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