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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승규 원주향교 원임 전교
고려 후기의 문인이자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분인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1330년(충숙왕 17) 중정대부 종부시령(中正大夫 宗簿寺令)을 역임한 원윤적(元允迪) 선생의 2남으로 태어나 자(字)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본관은 원주(原州)로 하여 90여 세를 강령하셨습니다.
선생은 재명(才名)이 있어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했으나 당시의 정치가 문란함을 개탄하며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매진하셨습니다.
1392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한탄하며 은거생활을 하며 치악산(雉岳山) 정상에 제단을 만들고, 흩어진 두문동 72현 중 20∼30현을 모아 봄, 가을에 고려 왕조와 덕 있는 선비, 살신(殺身) 사의(死義)한 성인들을 배향해 제사를 지내며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 우창진왕설(禑昌眞王設), 토지겸병설 등을 주창하고, 직필(直筆)과 농사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글을 배운 바 있던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이 선생의 인품과 실력을 잘 알기에 왕위에 등극한 후 정사를 논의고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출사(出仕)를 권유했으나 거절을 거듭하자 직접 치악산에 행차했으나 선생은 ‘전조(前朝)의 한낱 진사일 뿐이다. 일찍이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조선) 태조의 등극 전의 친구이자 국왕(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으나 시운에 영합해 좌명훈신(佐命勳臣)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밝히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치악산 상봉(上峰) 변암(弁岩)으로 피해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조선왕조가 역성혁명을 할 때 절개와 의리를 지킨 분들 가운데 정포은(鄭圃隱), 길야은(吉冶隱), 원운곡(元耘谷) 세 분을 은(殷)나라 삼인(三仁)에 비유하였고, 특히 운곡(耘谷)의 고절(高節)은 삼은(三隱: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보다 높게 평가해 ‘백이숙제(伯夷叔齊) 후 일인(一人)’이라 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우국지사로서 탐관오리를 철저히 증오한 의인으로 이양소(李陽昭), 남을진(南乙珍), 서견(徐甄)과 더블어 ‘고려 사처사(高麗 四處士)’라 하였습니다.
선생은 생전에 야사(野史) 6권을 직필(直筆)해 궤 속에 깊이 감추고, 후손에게 유언하기를 ‘자신과 대등한 인물이 아니거든 절대로 열지 말라’고 간절히 일렀으나 후손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 보았다고 합니다.
궤 안에는 고려 때 직필기록(直筆記錄)이 들어 있어 새로이 들어선 이씨(李氏) 왕조에 들키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까 두려워 불태워 버리고, 시사(詩史) 5권에 시(詩) 1,144수를 남겨『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남긴 시 중 ‘회고가(懷古歌)’는 2016년 국제시조대회에서 시조 100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쳐시니
夕陽(석양)에 지나 客(객)이 눈물 계워라
이퇴계(李退溪) 선생은 선생의 시를 읽고, ‘원주에 신사(信史)가 있다. 국가만세(國家萬世)에 마땅히 운곡 원천석 선생의 말을 좇아야 한다’고 하였고, 춘추제문(春秋祭文)에는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이며, 영세(永世)의 무강(無疆)이라’라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후학과 백성들은 1612년(광해군 4)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서당 건립을 시작으로 하여 12년 후인 1624년(인조 2)에는 사우를 창건하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해 제향하고, 운곡서원(耘谷書院)이라 하였습니다.
1673년(현종 14) 12월16일에 국왕이 특명으로 ‘칠봉서원(七峰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렸고, 직접 내린 축문(祝文)과 하사품은 예조정랑 송정렴(宋挺濂)이 가져와 고유제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의 춘추제향(春秋祭享) 축문에서는 ‘시사(詩史)가 만고의 강상이니 사문(斯文)의 제향이 영세토록 끝이 없다’고 하셨고, 사액 제문에는 ‘헌묘(獻廟, 태종)께선 감반(甘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을 간절히 생각하시어 이미 역마를 보내셨고, 화란(和鑾, 임금의 수레)을 굽히셨다. 그러나 운곡께서는 그 뜻이 굳어 몸을 피하였으니 필부라도 그 뜻을 빼앗기 어려웠다. 그래서 태종께서 예를 갖춰 자신을 낮추고 운곡의 절개를 이루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고절(高節)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칠봉서원(七峰書院),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사양서원(泗陽書院), 경백서원(景白書院), 경현사(景賢祠), 창의사(彰義祠), 매봉서원(梅峰書院) 등에 배향된 선생에 대해 지금도 후학과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1603년(선조 36)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선생이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해 고유 후 선생이 집필한 원고를 직접 본 후 한 권으로 모아 『운곡시사(耘谷詩史)』를 간행하며, 서문(序文)에 『시사서(時史書)』라 하며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니 빨리 세상에 퍼뜨려 만백성의 표식을 삼아야할 것이다’라고 시사하였습니다.
원주에는 선생에 대한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태종께서 선생을 각림사(覺林寺)를 거쳐 거처로 올라오자 만나지 않기 위해 물가에서 빨래하는 노구(老嫗)에게 ‘어떤 손님이 와서 내가 간 곳을 묻거든 이 강물을 따라갔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고, 변암(弁岩) 쪽으로 가셨는데 잠시 후 태종 일행이 당도해 선생이 가신 곳을 묻자 노구는 선생의 말씀대로 한 곳의 바위를 가리키며 그쪽 물길을 따라갔다고 거짓으로 대답했습니다.
일행이 그쪽으로 길을 떠난 후 비로소 그 손님이 임금인 줄 알고 스스로 임금을 속인 죄책감에 사로잡혀 물가 바위에 올라가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사죄하였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연(嫗淵) 또는 노구소(老嫗沼)라 하여 의리를 상징하는 곳으로 전하고, 노구가 향방(向方)을 잘못 가리킨 곳의 바위를 횡지암(橫指岩)이라고 하며, 태종께서 스승의 무운을 빌며 세웠다는 입석사 삼층석답, 태종께서 스승을 태워가기 위해 수레를 가지고 넘었다는 수레너미재, 임금이 지나간 마을이라는 뜻으로 황골마을, 시종 무관이 태종의 명에 따라 하늘의 기러기를 향해 쏜 화살이 떨어져 흐른 개울을 의미하는 궁실천과 화시래 등의 옛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태종은 비로소 선생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몇 일간 선생을 경모(敬慕)하며 머물던 곳을 주필대(駐蹕臺)라고 부르다가 후대에 이르러 태종대(太宗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절벽 위의 비각 안에는 주필대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태종대에 대한 사적(史蹟)을 적은 현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절벽 아래쪽 바위 벽면에는 1723년(경종 3)에 새긴 태종대라는 글자가 있는데 현세에 이르기까지 충절의 교육장으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습니다.
태종대에서 위로 바라보면 치악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구연(嫗淵)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 태종이 선생을 만나지 못하고, 이 물길을 따라 걸어 올라 원통재를 넘으면서 고개마루에서 뒤를 돌아보고 안녕히 계시라는 뜻으로, 선생이 계시는 쪽을 향해 배례하니 그 산은 배향산(拜向山)이라고 합니다.
또 선생을 찾아뵈려 했으나 뵙지 못하여 곤용포(袞龍袍)를 벗어 나무에 걸고, 심히 침통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넘었다 하여 그 고개를 원통(怨痛)재라고 하며, 귀성길에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한 고개마루를 대왕재(大王嶺)라 하는데 그 마루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현재까지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는 고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치악산에 관한 야사는 700여 년 동안 지명으로 불려지며 선생께서 태종을 피하고, 속세를 떠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은둔생활을 하셨던 치악산 준령의 변암(弁岩, 꼬깔같이 생긴 바위)의 암반에는 지금도 ‘開穿石井常澆渴 收捨山蔬具慰貧(우물을 파서 갈증을 면하고 산채를 걷어 시장기를 달랬다)’라는 글귀와 ‘不起上高其義(임금께서 설득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의로움은 높게 여겼다)’라는 짤막한 글귀가 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승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다시 선생을 찾으니 선생은 충절의 의미로 상복을 입은 채 궁궐에 도착해 수문장에게 자신의 신분과 용건을 밝히며 ‘태종께서 직접 마중을 나온다면 자신을 스승으로 맞는 것이요, 궐내에서 나를 기다린다면 신하로 대한다’고 생각했는데 태종께서 직접 마중을 나와 선생께서는 정중히 만나셨다고 합니다.
태종은 손자들을 불러 놓고, 선생에게 ‘우리 손자들이 어떠하오?’라고 물으니 선생께서는 한 아이를 가르키며‘ 이 아이가 조부를 많이 닮았으니 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하라’고 타일렀는데 그 아이가 훗날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요, 곧 세조(世祖)였습니다.
세조의 가슴 깊이 숨겨진 야심(野心)을 알아본 선생의 혜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수양대군은 뒤로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참혹하게 처형하고, 왕위를 쟁탈하여 권좌에 올랐으니 나라의 운명을 내다보는 선생의 식견은 진실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으셨다고 하겠습니다.
『치악에 운곡이 있어 강상을 부식(扶植)하니 그 향기 골마다 서리어 600년 원주의 얼이 되었도다. 고도(高蹈)의 은둔으로 세상을 버리지 않고, 직필로 후세의 역사를 바로 세우니 그 기상과 고고함이 천봉(千峯)에 솟아 빛난다. 선생의 사상과 선비 정신은 만고(萬古)의 불역(不易)일지니 백세의 스승이었으며, 충절정신은 우리 민족의 민족정기로 이어져 영구히 만세에 전하여 지리라』
선생의 사상과 절의정신은 원주의 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변에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원특별자치도는 운곡묘역(耘谷墓域)을 도 기념물 제75호(2000.11.18.)로 지정하고, 도와 원주시가 선생의 사당인 창의사(彰義祠)를 창건했으며, 매년 4월23일을 ‘운곡의 날’로 지정해 도지사와 시장이 주관한 가운데 선생의 충절을 경모(敬慕)하고, 청빈한 삶을 추모하는 운곡제(耘谷祭)를 봉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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