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1513)의 3-1, 3-2 부분에 대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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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대유학당 대표, 철학박사
지난 기사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①’ (지면신문 제1149호(2025.10.15.) 1-2면, 인터넷판 /coding/news.aspx/14/1/101750),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②’ (지면신문 제1151호(2025.11.15.) 3면, 인터넷판 /coding/news.aspx/14/1/102515),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③(지면신문 제1152호(2025.12.1.) 1-2면, 인터넷판 /coding/news.aspx/2/1/102976), <특집>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에 대하여④(지면신문 제1153호(2025.12.15.) 3면, 인터넷판 /coding/news.aspx/14/1/103473)에 이어 동무(東廡) 종사 36제자에 대해 설명한다.
4. 동무(東廡) 종사 36제자
공자님의 72신통제자 중에 동무에 종사된 제자는 36인으로, 제후 중에 후작으로 봉해졌다. 10철이 공작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보다 한 등급 낮춘 것이다.
혹자는 동무의 제자들은 ‘덕행’이 뛰어난 제자이고, 서무의 제자들은 ‘문학’과 ‘언론’에 뛰어난 제자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4과와는 전혀 무관하게 당나라 현종 때 선정한 72인의 순서를 소목(昭穆) 제도에 맞춰서 좌우로 나누었을 뿐으로 덕행, 언어 등 4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공자님의 직계제자가 아닌 거원(蘧瑗, 거백옥)이나 임방(林放) 같은 사람도 있고, 공자님께서 끝내 비방해 마지않았던 공백료(公伯僚) 같은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신정과 같은 사람은 동무와 서무에 한 번씩 두 번 종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무와 서무에 종사된 제자들이 전국 시대에는 다양한 학파형성으로 꽃을 피우고, 한대에는 경학을 정리해서 기틀을 튼튼히 했으며, 위·진·남북조와 당나라 시대에 철학적 심화·성숙 과정을 거쳐 드디어 송대에 주돈이, 소옹, 정호·정이, 장재, 주희, 여조겸 등의 신유학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단순한 사상 전승을 넘어 동아시아 정신문화의 뿌리와 흐름을 보여주는 귀중한 계보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 동무의 바깥(3-1)
① 금향후 담대멸명(金鄉侯 澹臺滅明) : 무성(武城) 사람으로 자는 자우(子羽)이다. 공자보다 39살 어렸다. 공자님을 섬기고자 했으나 용모가 매우 추하여 재질이 없다고 생각한 공자님이 거절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은 뒤에는 물러가 혼자 닦았고, 길을 갈 때는 샛길로 다니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를 만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서 제자 300명을 거느렸고, 그의 취사 선택에 대한 명성은 제후들에게까지 퍼졌다. 공자님께서 그 행실을 보고 “나는 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취했다가 재여(宰予)에게 실수했고, 용모를 보고 사람을 취했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고 하셨다.
② 임성후 원헌(任城侯 原憲) : 자는 자사(子思)이다. ‘부끄러움(恥)’에 대해 묻자 공자님께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선한 일을 하지 못하고 녹봉만 받아먹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선하게 하지 못하면서 녹봉만 받아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니 다시 여쭈었다. “이기려는 것, 자랑하는 것, 원망하는 것, 욕심을 부리는 것을 하지 않으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하니 공자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인인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다”(『논어』 헌문)
공자님이 졸(卒)하신 뒤 들판에 은둔해 살았다. 자공이 위나라의 재상이 되어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와 기병들을 거느리고 잡초와 콩잎을 헤치며 가난한 마을에 들어가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해진 옷과 모자를 차려입고 자공을 맞으니 자공은 그를 부끄럽게 여겨 말했다. “선생께서 혹시 병이 나신 것은 아니십니까?”하니 원헌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貧)’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病)’이라 한다고 하였다. 나 원헌은 가난할 뿐이지, 병든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들은 자공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갔고, 평생 자신이 원헌에게 한 말이 지나쳤음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③ 여양후 남궁괄(汝陽侯 南宮适) : 자는 자용(子容)이다. 그가 공자님께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奡)는 육지에서 배를 밀고 다닐 만큼 장사였지만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우씨와 후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소유하셨습니다” 하고 그 까닭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더니 남궁괄이 밖으로 나가자 말씀하셨다. “군자로구나! 이 사람이여! 덕을 숭상하는구나, 이 사람이여!”(『논어』 헌문) “남용이 ‘백규의 흠은/갈면 되지만/ 입에서 나간 말의 흠은/갈아낼 수가 없네’라고 백규(白圭, 『시경』 억(抑)시)의 내용을 세 번 반복해 외우니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으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형벌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형의 딸을아내로 삼게 하셨다.
④ 래무후 증점(萊蕪侯 曾蒧) : 자는 석(晢)이고, 증자(증삼)의 아버지이다. 춘추시대 양공(襄公) 6년에 거(莒)나라가 증(鄫)나라를 멸하자증의 태자 무구(巫求, 증점의 할아버지)가 노나라에 귀속되어 대부가 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구는 성씨를 증(鄫)에서 증(曾)으로 고치고 은둔했으며, ‘무구→ 부→ 점→삼(증자)→원·신화·손서’로 이어질 때까지 모두 효자이고 현명했으나 노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로·증석·염유·공서화가 모시고 앉았을 때 공자께서 각자의 소망을 말하라고 하였다. 증점(증석)이 대답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갓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하니 공자께서 ‘아!’ 하고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증점과 뜻을 같이 하겠다”(『논어』 선진)
“증자가 증석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준비하였는데 상을 물리려고 할 때 반드시 ‘누구에게 줄까요?’라고 여쭈었으며,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시면 반드시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증석이 죽고 증원이 증자를 봉양할 때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준비하였는데 상을 물리려고 할 때 ‘누구에게 줄까요?’라고 여쭙지 않았고, ‘남은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다음에 다시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른바 ‘입과 몸을 봉양한다’는 것이며, 증자처럼 하는 것이야말로 ‘뜻을 봉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증자처럼 하는 것이 옳다”(『맹자』 이루 상)
⑤ 수창후 상구(須昌侯 商瞿) :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목(子木)이다. 공자님보다 29살 어렸다. 공자님이 『주역(易)』을 전하실 때 “너는 『역』을 배울 때 뜻을 구해야지, 점(占)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시자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님께 배운 역을 초(楚)나라 사람 한비홍(馯臂弘, 자는 자홍(子弘), 혹은 복자하의 제자 자궁(子弓)이라고도 함)에게 전하였다. 한비홍은 강동(江東) 사람 교비(矯疵, 자는 자용(子庸))에게 전하고, 교비는 연(燕)나라 사람 주수(周豎, 자는 자가(子家))에게 전하였다. 주수는 순우(淳于) 사람 광우(光羽, 자는 자승(子乘))에게 전하고, 광우는 제(齊)나라 사람 전하(田何, 자는 자장(子莊))에게 전하였다. 전하는 동무(東武) 사람 왕동(王同, 자는 자중(子中))에게 전하고, 왕동은 치천(菑川) 사람 양하(楊何)에게 전하였다. 양하는 원삭(元朔) 연간(한 무제)에 『주역』을 잘한 공으로 한중대부(漢中大夫)가 되었다. 이로써 공자님의 역은 ‘공자→ 상구(商瞿)→ 한비홍→ 교비→ 주수 → 광우 → 전하→ 왕동→ 양하’로 맥을 잇게 되었다.
⑥ 평여후 칠조개(平輿侯 漆雕開): 자는 자개(子開) 또는 자약(子若)이다. 공자님보다 11살 어렸고 채(蔡)나라 출신이다. 『서경』을 익혀 통달했으며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님이 벼슬할 것을 권하자 “저는 아직 학문이 덜 되어서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하니 공자님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셨다.(『논어』 공야장)
⑦ 휴양후 사마경(睢陽侯 司馬耕) : 자는 자우(子牛)이다. 말이 많고 성격이 급하였다.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인한 사람은 그 말하는 것을 삼가하고 조심한다” 하셨고 “그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면 인이라 이를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말을 하는데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논어』 안연)라고 하셨다.
군자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시고, 그가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군자라 이를 수 있습니까?” 여쭈니 공자께서 “자신에 대해 반성했을 때 허물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논어』 안연)라고 하셨다.
그의 형이 환퇴(桓魋)이다. 당시 그는 송나라에서 공자님에게로 와서 학문을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형(환퇴)이 송나라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므로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철학적 답변을 하시면서도 걱정을 풀어주신 것이다.
사마우가 형(환퇴)을 걱정하면서 자하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구나!” 자하가 말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군자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예절을 다해 사귀면 사해가 모두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걱정하겠는가?”(『논어』 안연)라고 하였다.
⑧ 평음후 유약(平陰侯 有若) :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3살 어렸고, 자는 자유(子有)이다. 증자(曾子)와 함께 『논어』에서 ‘스승 자(子)’로 표현되는 공자님의 제자이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논어』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이 만들었다. 그래서 두 분 선생만 ‘자(子)’라고 일컬은 것이다”고 하였다.
“예의 쓰임은 조화가 귀하니 선왕의 도는 이것이 아름다운 까닭에, 작고 큰일이 예로 말미암았다.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조화를 알아서 조화롭게만 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이 의리에 가까우면 그 말을 실행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 친할 사람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또한 종주(宗主)로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논어』 학이)라고 하여 예절을 강조하였다.
공자님께서 몰세하신 뒤에 유약의 모습이 공자님과 닮았다고 해서 그를 공자님 모시듯이 했다. 어느 날 공자님의 제자가 와서 “옛날 선생님(공자)께서 길을 떠나려 할 때 저에게 비가 올 것에 대비하라고 시키셨는데 과연 비가 왔습니다. 제가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시경』 「소아(小雅)」 점점지석(漸漸之石)에 ‘달이 필성에 걸리니/비가 어지럽게 퍼붓네’라고 하였다. 어젯밤 달이 필수(畢宿)에 있지 않았더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어느 날 달이 필수에 머물렀지만 결국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또 “상구(商瞿)가 38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며느리를 새로 들이려 했는데 공자님께서 ‘걱정 마시오. 상구는 마흔 이후에 다섯 아들을 얻게 될 것이오’하셨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감히 묻건대, 선생님(유약)은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을 아실 겁니까?” 유약이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자가 일어나 말하였다. “유 선생은 자리를 비켜 주시오. 이 좌석은 그대의 자리가 아닙니다”
『역위(易緯)』 변종비(辨終備)와 『공자가어』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후일담으로 전한다.
노(魯)나라 사람 상구(商瞿)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상구의 나이가 마흔이었는데 아직 자식이 없었고, 더구나 먼 길을 가게 되어 혹시 후사가 끊길까 걱정하였다. 공자께서 정월에 상구의 어머니에게 서점(筮占)을 쳐서 “앞으로 다섯 아들을 두게 될 것입니다”하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자공이 “어떻게 아십니까?” 공자께서 “대축(大畜:䷙)괘를 얻었는데 대축괘는 간(☶)의 2세괘이다. 세효(世爻)인 9・2효는 갑인목(甲寅木)이고, 응효(應爻)인 6・5효는 병자수(丙子水)이다. 세효가 있는 괘가 응효를 생하고(금생수), 생함을 받은 상괘 간(☶)의 병자수(丙子水)가 내려와서 건(☰)의 갑인목(甲寅木)을 생하므로 내괘와 외괘가 서로 생하는 것과 같다. 또 외괘 간(☶)은 별도로 병자수의 ‘자’와 응하니 모두 다섯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 중에 한 명은 단명하는 것이다”
안회(안자)가 주변 제자에게 설명했다. “내괘의 초효 납갑으로 ‘자’가 붙으니 1명이고, 또 5효에 ‘자’가 붙으니 또 1명인데 이는 좀 추하다. 여기에 무리로 뭉쳐있는 건(☰)의 세 양효를 합치면 모두 5명이 된다. 이로써 다섯 중 한 명은 단명하게 됨을 알 수 있다”
⑨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 자는 자기(子旗)이며, 공자님보다 30살 어렸다. 노나라 혹은 진(陳)나라 출신이라고 한다.
무마시가 자로(子路)와 온구(韞丘)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사씨(師氏)가 부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단보(單父)의 재(宰)가 되었을 때는 별빛을 이고 나가고 별빛을 이고 돌아오는 등몸소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잘 다스렸다.
진나라 사패(사구, 형벌과 치안담당 벼슬)가 물었다. “지금의 노나라 임금님(소공, BC541~510년)이 예를 아십니까?” 공자께서 “예를 아십니다” 공자께서 물러 나가시자 사패가 무마시에게 읍하며 말하였다. “나는 들으니 군자는 편을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군자도 편을 듭니까? 노나라 임금님이 오나라에 장가를 들었지만 같은 희(姬)씨 동성이므로 동성인 것을 감추려고 오나라 부인을 ‘오맹자(吳孟子)’라 한 것이니 동성끼리 결혼하는 그런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무마기가 이것을 아뢰자 공자께서 “나는 참 행운아로다. 내게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지적해 주는구나! 하지만 신하는 임금이나 부모의 허물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숨겨 말하지 않는 것이 예라서 내가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논어』 술이)
이 일화로 미루어 볼 때에 무마시는 대인군자의 신언서판을 갖춘 것 같다. 공자님에게 실망한 사패가 무마시에게는 예를 갖춰 그 표현을 했고, 공자님은 그를 통해서 사패에게 당신의 처지와 예절을 말씀하실 정도로 신뢰하신 것이다.
⑩ 양곡후(陽榖侯) 안행(顔幸) : 자는 자류(子柳)이고, 공자님보다 46세 어렸다. 노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⑪ 상채후(上蔡侯) 조술(曹䘏) : 자는 자순(子循)이고, 공자님보다 50세가 어렸다.
⑫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 자는 자석(子石)이고, 공자님보다 53세 어렸다. 초(楚)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⑬ 풍익후(馮翊侯) 진조(秦祖) 혹은 진상(秦商) : 자는 자남(子南)이고, 진(秦)나라 출신이라고 한다. 정성으로 도(道)를 지키는 데에 지극했다고 한다.
⑭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 자는 자교(子驕)이다.
⑮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 자는 자도(子徒)이고, 진(秦)나라 출신이라고 한다. 『시경』과 『서경』에 능했다고 한다.
⑯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 자는 자명(子明)이다.
⑰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 : 자는 자승(子乗)이고, 노(魯)나라 출신이라고 한다.
⑱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 자는 자리(子里)이고, 제(齊)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림 3-2번으로, 위에서부터 ①제양후 해용점(奚容蒧, 자절) ②부양후 안조(顔祖, 양) ③부양후 구정강(句井疆, 자강) ④견성후 진조(秦祖) 또는 진상(秦商, 자비) ⑤즉묵후 공조구자(公祖句兹, 자지) ⑥무성후 현성(縣成, 자기) ⑦견원후 연급(燕伋, 사) ⑧완구후 안지복(顔之僕, 숙)⑨건성후 악해(樂欬, 자성) ⑩당읍후 안하(顔何, 염) ⑪임려후 적흑(狄黑, 절) ⑫운성후 공충(孔忠, 자멸) ⑬서성후 공서점(公西蒧, 자상) ⑭임복후 시지상(施之常, 자항) ⑮화정후 진비(秦非, 자지) ⑯문등후 신정(申棖, 주) ⑰제음후 안쾌(顔噲, 자성) ⑱사수후 공리(孔鯉, 백어)이상 18인이고, () 안의 한글은 자(字)이다.
①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容蒧) : 자는 자절(子晢)이다.
② 부양후(富陽侯) 안조(顔祖) : 자는 양(襄)이다.
③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句井疆) : 자는 자강(子疆)이고, 위(衞)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④ 견성후(鄄城侯) 진조(秦祖) 또는 진상(秦商) : 자는 자비(子丕)이고, 초(楚)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⑤ 즉묵후(即墨侯) 공조구자(公祖句兹) : 자는 자지(子之)이다.
⑥ 무성후(武城侯) 현성(縣成) : 자는 자기(子褀)이다. 노(魯)나라 출신이다.
⑦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 자는 사(思)이다.
⑧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 자는 숙(叔)이다. 노(魯)나라 출신이다.
⑨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 자는 자성(子聲)이다.
⑩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 자는 염(冉)이고, 노(魯)나라 출신이다.
⑪ 임려후(林慮侯) 적흑(狄黑) : 자는 절(晢)이다.
⑫ 운성후(鄆城侯) 공충(孔忠) : 자는 자멸(子蔑)인데, 공자님의 배다른 형의 아들이다.
⑬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 자는 자상(子上) 또는 자상(子尙)이고, 노(魯)나라 출신이다.
⑭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 자는 자항(子恒)이다.
⑮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 자는 자지(子之)이고, 노(魯)나라 출신이다.
⑯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 자는 주(周)이고, 노나라 출신이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굳센 자를 보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신정입니다” 하니 공자께서 “신정은 욕심이 있으니 어찌 굳세다고 하겠는가?”(『논어』 공야장)
『사기, 제자전(弟子傳)』에서는 “신당(申黨)의 자(字)는 주(周)”로 했고, 『가어(家語)』에는 “신속(申續)의 자(字)는 주(周)이다”라고 해서 자(字)로 보면 동일인이다. 정현(鄭玄)은 “신정은 곧 신속이다”라고 하였고, 형병(邢昺)은 “신속은 곧 신당이다”라고 하였으니 정현과 형병에 의하면 ‘신정, 신속, 신당’이 동일인이다. 후한의 왕정(王政)의 비문에 “그에게는 새끼 양과 같은 깨끗함이 있고, 신당(申黨(棠))과 같은 욕심이 없다”고 했는데, 이를 보고 정현이 ‘신당’을 ‘신정’ 및 ‘신속’의 동일인으로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당나라·송나라의 종사(從祀)에서는 이 둘을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산동통지(山東通志)』에서는 “신정(申棖)의 자(字)는 자속(子續)이며, 신당(申黨)과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그를 노백(魯伯)으로 추증하였고, 송나라에서는 문등후(文登侯)로 봉하였다. 『일통지(一統志)』에는 상채후(上蔡侯)로 봉하였다고도 하였다.
『가어』에는 신속(申續)으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신당(申黨)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셋으로 다르지만 사실은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공자를 모신 공묘(孔廟)에서는 동무(東廡)에는 ‘문등후 신정’으로 종사되고, 서무(西廡)에는 ‘치천후 신당’으로 종사되어 있다, 한 사람이 두 이름으로 봉작되어 종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님께서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반드시 철저히 고증해서 고쳐야할 사항이라고 본다.
⑰ 제음후(濟隂侯) 안쾌(顔噲) : 자는 자성(子聲)이고, 노(魯)나라 출신이다.
⑱ 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 : 공자님의 맏아들이고, 자는 백어(伯魚)이다. 아들 급(伋)을 낳고 50살에 졸하였는데 그때 공자님의 연세가 70세였다. 태어날 때 노나라 임금이 축하선물로 잉어를 하사했으므로, 이름을 ‘잉어 리’로 짓고, 자를 ‘맏 백’자에 역시 ‘잉어 어(魚)’자로 지은 것이다.
진강(陳亢)이 백어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생님의 아들로서 스승님께 특별하게 더 들은 것이 있는가?” 백어가 “없었다. 일전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갔더니 ‘시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가 시를 배웠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니 ‘예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인간으로 나설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예를 배웠다. 특별한 거라면 이 두 가지이다”(『논어』 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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