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참가자들이 극한의 공포 속에서 아수라장이 된 순간 “이러다 다 죽어”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허구의 대사이지만, 지금 중동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충돌이 길어질수록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전쟁은 늘 명분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대개 통제 밖에서 무너진다.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 정세가 다시 긴장 국면에 들어섰다. 이번 군사행동은 제한적 작전으로 설명됐다. 그런데 전쟁은 이름을 바꾼다고 성격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작전이라 부르든, 억제라 부르든, 무력이 오가는 순간 확전의 위험은 이미 시작된다. 파장은 결코 제한적이지 않다.
충돌이 길어질수록 먼저 무너지는 것은 전선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상이다. 병원과 학교, 시장과 가정이 흔들리고, 에너지와 물류, 금융과 외교 질서까지 함께 흔들린다. 중동의 불길은 더 이상 국경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국제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나눠 지게 된다.
문제는 단지 군사행동의 규모가 아니다. 절차와 통제의 문제다. 미국 헌법 제1조 8항은 전쟁선포권을 의회에 부여하고, 제2조 2항은 대통령을 군 통수권자로 규정한다. 또 1973년 제정된 전쟁권한법은 대통령이 군사행동을 개시할 경우 48시간 이내 의회에 보고하고, 60일 이내 승인 없이는 철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자주 그 반대로 움직였다. 이번 공습 역시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시작됐다. 베트남전 이후 이라크, 시리아, 예멘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이 먼저 무력을 사용하고, 의회가 뒤따르는 장면은 반복돼 왔다. 그때마다 제기된 비판은 같았다. 의회 없는 전쟁, 통제 없는 군사행동, 절차를 앞지른 힘의 행사라는 지적이다.
이번 사안의 쟁점도 분명하다. 이란 공격이 자위권 행사인지, 사실상 새로운 전쟁의 개시인지의 문제다. 자위라면 급박한 위협이 객관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그런데 그 판단이 권력자의 일방적 결단에 기대는 순간, 헌법 질서와 국제 규범은 함께 흔들린다. 명분이 약한 무력은 질서를 세우지 못한다.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부른다.
한국 헌법 역시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국회의 동의 절차를 요구한다. 전쟁은 권력자의 결단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할 최후의 선택이다. 그래서 무력은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절제이고, 외교이며, 수습이다.
정명(正名)은 전쟁의 언어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을 작전이라 부르고, 확전을 억제라고 포장하는 순간 책임은 흐려진다. 이름을 흐리는 것은 결국 책임을 흐리는 일이다. 정명은 말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자기 행위를 어떻게 부르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를 묻는 기준이다.
신의(信義)는 국가를 지탱하는 바탕이다. 맹자는 백성의 신뢰를 잃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의 정당성은 무기의 위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절차의 정당성과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신뢰를 잃은 무력은 잠시 앞설 수는 있어도 오래 서지 못한다. 두려움으로 누르는 질서는 오래가지 않는다.
절제(節制)는 파국을 막는 마지막 울타리다. 순자는 질서를 세우는 힘이 법도와 절제에서 나온다고 봤다. 힘이 절제를 잃는 순간 혼란은 커진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면 충돌은 끝나지 않는다. 한 번 낮아진 전쟁의 문턱은 다시 더 쉽게 무너진다. 그 끝은 안정이 아니라 공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승패 계산이 아니다. 누가 더 강한지 겨루는 일도 아니다. 세계가 함께 멈추는 일이다. 추가 타격을 자제하고, 확전의 고리를 끊고, 외교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이다. 전쟁은 시작보다 끝내는 일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끝내야 한다. 그래야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이번 이란 공습이 남긴 질문은 하나다.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다. 누가 먼저 멈출 것인가다.
멈추지 않으면 공멸이다.
이제는 세계를 위해 멈춰야 한다.
확전이 아니라 종전이어야 한다.
보복이 아니라 절제여야 한다.
대결이 아니라 수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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