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만세종사(萬世宗師) 공부자께서 천하를 주유하며 그동안 생각해온 정치적 이상을 펼치려 하다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에서 길을 잃고 고립되었다.
양식마저 바닥나며 같이 있던 제자들이 굶주려 일어설 힘조차 없던 비참한 상황이 되니 성격이 급하고 대쪽 같았던 제자 자로가 분노와 원망이 섞인 얼굴로 “군자도 이렇게 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항변했다.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군자가 왜 이런 굶주림과 고통을 겪어야 하며, 스승을 따르던 제자들까지 같이 고생하게 만드느냐는 항의였다.
공부자는 초연하게 “군자도 본래 곤궁할 때가 있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분수에 넘친다”고 답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군자는 지조를 굳게 지켜 가지만 소인은 그런 조건에서 마구잡이로 선을 넘는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는 의미를 담은 말씀이었다.
공부자께서 사셨던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의 그 시기에도 세상은 혼란스럽고, 다양한 일들이 발생했는데 ‘군자라고 해서 고난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현실은 인정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태도’라고 가르친 것이다.
우리 유림들에게는 기독교의 성경과 거의 같은 위치의 책인 『논어』 「위령공」편의 첫 부분에 나오는 이 내용은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사회 운영의 보편적인 원리로 작용한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조정의 중신들과 경연을 진행하고,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반복해서 언급되었을 정도로 중시되었고 『목은집』, 『퇴계전서』, 『송자대전』, 『간재집』 등 조선시대 유학을 대표하는 대학자들의 문집에도 그분들이 직접 지은 시와 문장 등에 거듭 등장한다.
일반 유학자들의 글에서도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동료 유림을 기억하며 ‘곤궁함을 굳세게 견디며 구차하지 않았다(固窮不苟)’의 표현이 최고의 찬사로 인식되곤 했는데 이렇게 강조된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만큼 고된 환경에서는 자신이 본래 품었던 생각과 태도를 지속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산 김창숙 초대 성균관장은 서른두 살이던 1910년에 나라가 망하고 일제에 강제로 합병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연일 술을 마시며 세상을 한탄하다가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난 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학문에 매진하며 항일독립운동의 한길로 나아갔다.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라 잃은 백성이 본적이 어디 있느냐?”며 재판관의 심문은 물론 변호사 선임까지 거부했고, 집안에 쌀이 떨어진 것을 걱정하는 며느리에게 “그러면 굶자”며 돌아누웠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후에 입학 청탁과 학교 인수를 위해 접근하는 이들이 가져온 조기와 현금다발은 손도 대지 않고 벽에 그대로 달아두거나 집어 던졌다. 그 까짓 물건들에 유혹되어 평생 지켜온 지조를 내팽개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심산 선생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균관장과 성균관대학교 총장 등 모든 직위에서 쫓겨난 후 친일파 출신 및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이들이 성균관을 장악하며 꼿꼿했던 유림의 분위기를 흐리더니 이후에도 그런 부정적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일정 정도의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자신들은 군자이고, 상대방은 소인이다라는 이분법이 횡횡하며 군자인 자신들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젓이 지속한다.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군자’의 정의를 ①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 ②예전에,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을 이르던 말 ③예전에, 아내가 자기 남편을 이르던 말 등 세 가지로 설명한다.
유학과 유교,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세 가지 정의 중에서 당연히 첫 번째인 ‘행실이 젊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 본래의 뜻이자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이상형임을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젊잖은 척, 어진 척, 덕이 높은 척, 학식이 높은 척할 수 있겠으나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 아무리 위장하려 해도 그렇지 않은 이는 세상이 금방 안다. 재산이 많고, 집안이 대단하며, 학벌이 높은 이들 중에 이런 포장을 하려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뭐도 없으면서 사기와 거짓말을 일상적으로 하며 본인 자랑에 자아도취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지금의 성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위법·편법·불법·무법·멸법 행위들과 거기에 동조·아부·외면·동참했던 이들의 모습은 공부자를 비롯한 성현들이 끊임없이 강조하셨던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군자는 어렵더라도 양심을 팔고, 지조를 무너뜨리며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낙관론을 가슴에 품고, 언젠가는 돌아올 그 날을 꿈꾸며 희망을 가지고 버텨 나간다.
그러나 성균관은 불과 3년 만에 20억 원이 훨씬 넘는 빚더미에 올라섰고, 선배유림들이 고민하고 논의하며 만들어왔던 체계가 대부분 무너졌으며, 친일·극우·반민주의 상징으로 세상에 인식되어 버렸다.
백범 김구, 위당 정인보, 운석(雲石) 장면, 중수(中樹) 박정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김창숙 초대 성균관장의 모습은 흔적조차 거의 남지 않은 채 일왕, 헌법 파괴자, 법과 원칙 파괴자 등과 친한 모습을 자랑해왔다.
“그래도 예전에는 선배유림들이 성균관장을 비롯한 집행부의 잘못을 꾸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그래도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전국 유림의 총의를 모아 퇴진시키기도 했는데 왜 지금은 그런 패기와 꽂꽂함이 사라진 것이냐?” “당시 서울 강남아파트 몇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유교 종단과 성균관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것은 물론 ‘유림으로서 당연한 도리인데 부끄럽게 뭘 이름을 밝히냐’며 무명(無名)으로 몇 천만 원을 내놓던 분들을 기억한다” “아무리 『논어』와 『맹자』의 문구를 언급하고, 공부자를 외치면 뭘 하느냐? 실제로 하는 모습은 거기서 가장 비판하는 나쁜 짓을 골라서 하는데...”라는 전국 유림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있는 돈은 다 쓰고, 없는 돈을 빌려와 빚을 만들면서까지 다 쓰며, 그 과정에서 나라의 법이든, 종단의 법이든 지키지도 않는 현실은 우리 유교 종단과 성균관에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