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7 (금)

  • 맑음동두천 28.7℃
  • 맑음강릉 27.9℃
  • 맑음서울 32.5℃
  • 맑음대전 31.0℃
  • 구름많음대구 30.0℃
  • 구름많음울산 28.2℃
  • 구름많음광주 31.8℃
  • 구름많음부산 29.4℃
  • 구름많음고창 ℃
  • 흐림제주 29.7℃
  • 맑음강화 28.0℃
  • 맑음보은 26.7℃
  • 맑음금산 29.3℃
  • 흐림강진군 30.5℃
  • 구름많음경주시 28.2℃
  • 구름많음거제 28.9℃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MBK는 내슈빌 리셉션, 홈플러스는 절규…신의(信義)는 어디에 [유교경영리포트]

정부, 협력업체에 4400억원 긴급 유동성 지원…체불 노동자에는 최대 2100만원 대지급금
영풍·MBK, 미국서 ‘고려아연 최대주주 그룹’ 내세워 프로젝트 크루서블 지원 행사 개최

 

두 개의 숫자와 한 장의 초청장을 나란히 놓으면 홈플러스 사태를 둘러싼 책임의 자리가 정문일침(頂門一鍼)처럼 드러난다.

 

하나는 약 4100억원이다. 홈플러스가 협력업체에 지급하지 못한 납품대금으로 거론되는 규모다. 다른 하나는 4400억원이다. 서울회생법원이 지난 3일 홈플러스의 기업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한 뒤 정부가 소상공인과 중소 협력업체의 연쇄 피해를 막기 위해 마련한 긴급 유동성이다.

 

정부는 홈플러스를 주요 거래처로 둔 약 4600개 소상공인·중소기업에 긴급경영안정자금 900억원을 공급하고,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을 통해 3500억원 규모의 특례보증을 제공하기로 했다.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에게는 1인당 최대 2100만원의 대지급금과 최대 1000만원의 저금리 생계비 융자를 지원한다.

 

기업의 경영 실패로 발생한 납품대금 미지급과 임금체불을 정부의 정책자금과 보증제도가 뒤따라 수습하는 형국이다. 4400억원 전액이 국가가 대신 갚아주는 돈은 아니다. 일부는 대출이고 일부는 보증이다. 그럼에도 민간기업의 위기가 노동자와 협력업체의 생존을 넘어 공적 안전망의 부담으로 번졌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지난 9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리셉션 초청장을 포개면 대비는 더욱 선명해진다.

 

여러 언론에 공개된 초청장에는 영풍과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의 미국 핵심광물 제련사업 ‘프로젝트 크루서블(Project Crucible)’ 지원 리셉션의 주최자로 기재돼 있다.

 

초청장은 두 회사를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그룹(Korea Zinc’s largest shareholder group)’으로 소개했다. 행사는 지난 9일 오후 4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의 허미티지 호텔에서 열리는 것으로 안내됐으며, 복장은 비즈니스 차림으로 명시됐다. 칵테일과 오르되브르가 제공된다는 문구도 담겼다.

 

초청장에 적힌 내용만 놓고 보면 영풍과 MBK는 단순한 참석자가 아니다. 두 회사가 자신들을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그룹으로 내세우고 프로젝트 크루서블 지원 행사를 직접 마련한 구조다.

 

문제는 이 행사가 열린 시점이다.

 

국내에서는 홈플러스의 회생절차가 폐지되고 노동자와 협력업체의 불안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법원은 홈플러스가 회생계획 수행에 필요한 2000억원의 신규 운영자금을 확보하지 못했고, 제출된 회생계획안의 실현 가능성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폐지 결정이 확정되면 파산 절차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홈플러스 노동자들은 대주주인 MBK가 긴급운영자금 마련에 직접 나서야 한다며 거리와 회사 로비에서 절규했다. 마트산업노조 홈플러스지부 조합원들은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 MBK 본사에서 연좌농성을 벌였고, 농성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김광일 MBK 부회장과의 면담 약속을 받아냈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 14일 서울 강서구 홈플러스 본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김 부회장과의 면담은 MBK 측이 당일 오전 연기를 통보하면서 무산됐다. 노조는 면담에서 긴급운영자금 2000억원 조달과 회생절차 폐지 결정에 대한 즉시항고, 고용 유지 대책 등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매장에서 일해 온 노동자는 임금과 퇴직금을 걱정하고, 물품을 공급한 협력업체는 납품대금 회수와 연쇄도산 가능성을 우려한다. 입점 소상공인은 하루아침에 영업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에 놓였다. 정부가 4400억원 규모의 유동성 대책을 내놓은 이유도 피해가 홈플러스라는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경제와 서민의 삶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홈플러스의 최대주주 측인 MBK는 영풍과 함께 자신들을 고려아연의 ‘최대주주 그룹’으로 소개하며 미국 핵심광물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리셉션의 주최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쪽에서는 정부가 협력업체의 자금줄을 지키기 위해 정책금융을 투입하고, 체불 노동자에게 대지급금과 생계비 융자를 제공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주주 책임론의 중심에 선 MBK가 미국 호텔에서 다른 기업의 전략사업을 지원하는 주체임을 부각했다.

 

그 간극은 단순한 일정의 문제가 아니다. 권한과 책임, 이익과 손실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가에 관한 문제다.

 

사모펀드(私募 Fund)가 기업을 인수하고 투자수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기업을 지배할 권한을 행사했다면 그 기업에 생계를 의탁한 노동자와 협력업체의 위기에도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익을 얻을 때는 주인이고 위기가 닥치면 재무적 투자자일 뿐이라는 논리는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공교롭게도 프로젝트의 이름인 ‘크루서블(crucible)’은 도가니 또는 용광로(鎔鑛爐)를 뜻한다. 금속과 광물을 녹여 새로운 물질을 벼려 내는 공간이다.

 

지금 홈플러스라는 용광로에서 녹아내리는 것은 쇳물이 아니다. 수천 개 협력업체의 자금줄과 노동자의 임금, 입점 소상공인의 하루가 그 불길 속에 놓였다. 새로운 금속을 얻는 자와 그 불에 녹는 자가 서로 다르다는 데 이 사태의 통증(痛症)이 있다.

 

프로젝트 크루서블은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을 강화하고 특정 국가에 대한 원료와 제련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추진되는 전략사업이다. 미국 테네시주에 핵심광물 통합 제련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으로, 한미 산업·안보 협력 차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사업의 전략적 가치와 필요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영풍과 MBK가 고려아연의 현 경영진과 경영권 분쟁을 이어가면서 미국에서는 고려아연 최대주주 그룹을 자처하고 프로젝트 지원 행사의 주최자로 나섰다는 점이다.

 

영풍과 MBK는 앞서 프로젝트 추진과 연계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반발해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바 있다. 자금조달 방식에는 법적 대응까지 나섰던 이들이 해외에서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대표 주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면, 두 행보가 어떻게 양립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고려아연 회사 측과 행사 개최 및 대외 메시지를 사전에 협의했는지도 확인돼야 한다. 경영권 분쟁 중인 주주가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를 내세워 해외에서 행사를 주최했다면 어떤 권한과 자격으로 사업을 대표했는지, 미국 정부와 지역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홈플러스 사태도 마찬가지다. MBK가 그동안 홈플러스에 제공한 자금과 보증이 있다면 구체적인 내역을 밝히고, 추가 지원이 어렵다면 그 이유를 노동자와 협력업체 앞에서 설명해야 한다. 책임 있는 대화는 뒤로 미룬 채 해외에서 ‘최대주주 그룹’이라는 지위만 강조한다면 사회는 그 자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맹자(孟子)』는 “무항산자 무항심(無恒産者 無恒心)”이라 했다.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백성의 살림이 무너지면 마음과 공동체의 질서도 함께 흔들린다는 경계다.

 

홈플러스 노동자에게 일터는 투자 포트폴리오의 한 항목이 아니다. 협력업체에 납품대금은 회계장부에 기록된 채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가족의 생계이자 다음 달 임금이며, 다시 물건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게 하는 항산(恒産)이다.

 

『논어(論語)』에는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의 가르침이 있다. 기업과 자본도 다르지 않다. 시장은 계약서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고 위기의 책임을 나누겠다는 신의(信義)가 무너지면 자본의 명성과 지배력도 오래 설 수 없다.

 

정부의 4400억원 지원은 협력업체와 노동자의 연쇄 피해를 막기 위한 긴급 처방이다. 정책금융은 피해자를 살리는 안전망이지, 지배주주의 책임을 지워주는 면죄부(免罪符)가 아니다.

 

내슈빌 호텔의 잔이 부딪치는 소리보다 홈플러스 노동자의 절규가 먼저 들려야 한다. 해외에서 ‘최대주주 그룹’이라는 지위를 강조하려면 국내에서는 최대주주 측에 따르는 책임부터 감당해야 한다.

 

이익 앞에서는 주인이 되고 손실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는 선택적 주인 의식으로는 신뢰를 세울 수 없다. 위기에 처한 노동자와 협력업체를 외면하지 않고, 얻은 권한만큼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자본이 끝내 저버려서는 안 될 신의이자 의(義)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