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10일, 당시 경기 광주군 중부면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철거 정책에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주민들이 열악한 주거환경과 생계난, 과도한 토지대금 부담에 맞서 인간다운 삶과 생존권을 요구한 날이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광주대단지 항쟁은 오늘의 성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역사로 남아 있다.
당시 서울시는 도심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경기 광주군 중부면 일대, 현재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광주대단지 전체 인구는 약 15만 명에 달했지만 도로와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고, 일자리와 교통 여건도 주민들의 생활을 뒷받침하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여기에 토지대금 부담까지 겹쳤다. 당초 평당 2,000원 수준으로 알려졌던 토지 대금은 이후 평당 8,000원에서 최고 1만 6,000원 수준까지 책정됐고, 일시 상환 요구가 이어지면서 삶의 기반을 잃은 주민들의 생계 부담은 더욱 커졌다.
열악한 주거환경과 교통난, 일자리 부족 속에서 토지대금 문제까지 겹치자 주민들의 불만은 1971년 8월 10일 집단적인 생존권 요구로 이어졌다.
이날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과 주민들의 면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시장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현장 분위기는 격화됐다. 수만 명의 주민이 거리로 나왔고, 이 과정에서 성남출장소를 비롯한 일부 공공시설과 차량이 파손되는 등 충돌도 발생했다.
서울시가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사태는 점차 진정됐다. 이후 광주대단지의 기반시설 확충과 행정체계 정비가 추진됐으며, 이 사건은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승격으로 이어지는 주요 계기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대단지 항쟁은 해방 이후 도시 빈민들이 주거권과 생존권을 집단적으로 요구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도 꼽힌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추진된 철거와 이주 정책이 주민들의 실제 삶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면서 어떤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한국 도시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성남시는 이러한 역사적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담기 위해 2024년 12월 관련 조례를 개정했다. 기존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명칭은 ‘8·10 성남(광주대단지) 항쟁’으로 공식 변경됐다.
단순한 소요나 집단행동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당시 주민들이 인간다운 삶과 생존권을 요구했던 역사적 의미를 명칭에 담은 것이다.
성남시는 항쟁 55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성남시청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성남시립국악단과 시립합창단의 기념공연을 비롯해 헌시 낭송과 기록영상 상영 등이 이어졌으며,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전도 마련됐다.
행사에는 광주대단지 항쟁을 직접 겪은 유협종 선생도 참석했다고 성남시의회 정연화 부의장실은 전했다. 항쟁 당사자의 기억과 증언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하는 의미도 이번 55주년 기념행사에 더해졌다.
정연화 성남시의회 부의장은 이날 축사에서 “1971년 8월 10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시민들은 인간다운 삶과 생존권을 위해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며 “당시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 간절한 외침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남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대단지 항쟁은 오늘날의 성남을 있게 한 모태이자 뿌리”라며 “성남의 발전과 번영 뒤에는 시민들의 땀과 눈물,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55주년을 맞은 광주대단지 항쟁은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시 개발과 주거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삶과 생존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행정이 시민의 목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담아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인구 9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한 성남의 출발점에는 1971년 8월 10일 거리에서 인간다운 삶을 요구했던 주민들이 있었다. 그날의 기록과 목소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도 성남의 역사를 이어가는 과정으로 남아 있다.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