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유교사회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복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원(起源)은 알 수 없으나 복날(伏日)은 지금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여름 더위에 고생하는 몸을 위해 닭, 소, 돼지, 염소, 전복, 장어 등의 각종 보양식을 먹으며 다시 한번 힘을 내자고 다짐하는 날’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굳이 명칭을 ‘엎드리다’ ‘낮아지다’라는 다소 부정적 의미의 복(伏) 대신 ‘이기다’의 승(勝), ‘위로하다’의 위(慰), ‘힘쓰다’의 력(力)을 사용하여 승일(勝日), 위일(慰日), 역일(力日) 등의 긍정적 단어를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기에 동양 유교사회 어른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예로부터 잘난 척, 이기는 척, 멋 부리는 척하는 외면의 허세에 매몰되기보다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올바르기 위해 애쓰고, 욕심내어 뭔가를 억지로 하기보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결국은 몸과 마음을 지키는 근본적인 지름길임을 알았기에 이름 하나에도 그런 의미를 담으려 했다.
따라서 맹렬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뜨거운 화기(火)의 기운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서늘한 금(金)의 기운인 가을이 찾아오기를 ‘엎드려(伏) 기다리며’ 따뜻한 음식으로 속을 채워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절제와 휴식의 지혜를 강조했던 것이다.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라는 뜻의 이열치열(以熱治熱)이 이때만큼 언급되는 시기는 드물기에 가장 무더운 때에 아주 차가운 냉면이나 아이스크림 등이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뜨거운 김이 펄펄 솟구치는 삼계탕, 갈비탕, 전복탕, 돼지국밥, 해물전골, 장어탕 등이 복날의 대표적인 음식임은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다.
지금부터 20~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이전의 어려운 시절에 쉽게 먹기 힘들었던 소, 닭과 같은 종류 대신 개, 토끼 등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가축을 먹었던 기억을 바꾸기 힘들어 복날이 되면 으레 개고기를 먹는 일이 흔했으나 이미 알려졌듯이 내년(2027) 2월 7일부터는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일명 ‘개식용종식법’)에 따라 식용 목적의 개 사육·도살·유통·판매가 단계적으로 금지된다고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올해 2026년의 초복(初伏)은 양력 7월 15일(수)·음력 6월 2일 경인(庚寅)일, 중복(中伏)은 양력 7월 25일(토)·음력 6월 12일 경자(庚子)일이었고, 말복(末伏)은 양력 8월 14일(금)·음력 7월 2일 경신(庚申)일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복날의 간지(干支)는 모두 ‘경(庚)’의 글자가 들어가는 경일(庚日)에 든다.
천간(天干)이라고도 불리는 10간(十干,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 중 일곱 번째인 경(庚)은 음양(陰陽)으로는 양(陽),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을 의미하는데 오행의 상극(相克)에서 화극금(火克金)이라 했으니 여름이 가장 기운을 떨칠 때에 쇠(金)의 기운이 나오더라도 불(火)에 녹아 엎드려 숨지만 ‘달이 차면 기울어지는 이치’와 같이 여름이 절정을 지나 가을로 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삼복(三伏)이라고 불리는 복날들 중에서 첫 번째인 초복(初伏)은 지구 북반구 지역에서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인 하지(夏至) 뒤의 세 번째 경일, 중복(中伏)은 하지 뒤의 네 번째 경일, 말복(末伏)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추(立秋) 뒤의 첫 번째 경일로서 예전 어른들처럼 머리에 그런 내용들이 완전히 암기되어 있지 않은 우리들은 달력이나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서 확인하거나 뉴스, 언론 보도만 봐도 언제인지 알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앞으로도 이어가야 하는 복달임의 미덕(美德)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①복이 들어 기후가 지나치게 달아서 더운 철 ②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음 등 두 가지로 설명되는 복달임의 의미에서 일반적으로는 ②에 해당하는 내용이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으나 요즘은 다양한 보양식 재료가 널리 보급되고, 개인마다 선호도의 차이가 크니 반드시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형태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얼마 전 언론 보도를 보니 초복 하루에 소비되는 닭의 숫자가 무려 340만 마리라고 할 정도로 삼계탕이 복달임 음식으로는 압도적 1위이고, 그 외에 닭볶음탕, 오리 백숙, 흑염소탕, 육개장 등도 인기이고 장어구이, 민어탕, 어죽, 다슬기 해장국, 병어 무침 등도 지역에 따라 인기 메뉴라고 한다.
지금의 중·장년 이상의 어른들이 어리고 젊었을 때에는 개를 주로 잡아서 먹었다고 하니 요즘의 청소년·청년 세대에서는 ‘우리 부모님, 친·인척 어른들, 이웃 아저씨·아주머니, 선생님 등이 야만인이었구나!’라고 오해를 한다는 데 그 시절에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문화가 익숙하여 복날에도 함께 음식을 준비하여 먹었고, 다만 많은 사람을 적당한 조건으로 영양 보충시킬 만한 재료가 흔치 않다 보니 그나마 비교적 쉽게 사거나 키울 수 있는 개가 주로 선택된 것이었다.
이제는 온 동네, 온 동료가 어울려 같이 준비하고, 같이 만들고, 같이 먹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고 개인끼리 혹은 일부 동료나 지인들과 식당을 방문해 미리 준비된 메뉴에서 골라 복달임을 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그러나 엄정한 삶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 꽂꽂한 유림 어른들이 많이 계시던 예전만 하더라도 삼복의 절기가 되면 유교문화권에서는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일환이자 유림 화합의 상징으로 복달임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기원하며 웃음과 격려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유림의 고령화(高齡化)와 지도자들의 소홀함 등으로 인해 많이 퇴색했지만 여전히 몇 곳의 유림단체는 그러한 전통을 잇고 있는 가운데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부산광역시 기장향교는 해마다 복날이 되면 평소 함께하기 힘들었던 원로 및 유림지도자들께 일일이 연락드리고, 거동이 불편한 분은 향교 장의들이 몸소 모시러 다녀오며 보양식을 같이 나누는 흐뭇한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건강 악화로 이마저도 하지 못하는 원로들은 향교 집행부 및 장의들이 쉽게 요리해 드실 수 있는 식품이나 과일을 준비해 찾아뵙고, 그동안 있었던 향교의 각종 소식까지 전해드리며 어른들의 지혜와 조언을 경청한다.
나중에 입교한 장의들은 선배 유림을 통해 전해 들었던 분들을 직접 뵙고 인사드리는 시간이자 유림은 말로만 떠드는 탁상공론(卓上空論,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 이론이나 논의)의 집단이 아니라 책과 의례에서 보고 배웠던 정신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가는 도덕 집단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 『무명자집(無名子集)』 「반중잡영(泮中雜詠)」의 복날 모습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자신의 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 속의 「반중잡영(泮中雜詠)」에 당시 최고의 학부이자 최우등의 우수 학생들이 모여있던 성균관의 각종 모습을 시로 기록한 윤기(尹愭, 1741-1826) 선생의 눈에도 복날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220수(首)에 달하는 시 중에서 복날을 표현한 다음의 명문(名文)은 유교 성현의 학문과 말씀을 따랐던 선배 유림들도 인간미 넘치는 존재였고, 감수성도 풍부하였으며, 그 시대를 이끌 자질을 갖춘 이들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초복가장종왈사(初伏家獐縱曰些, 초복의 개장국이 비록 적다고 말하지만)
승여중복량감과(勝如中伏兩甘瓜, 중복의 단 참외 두 개보다 낫네)
최시서과말복일(最是西瓜末伏日, 으뜸은 말복날의 수박이니)
잠시능사상후아(暫時能使爽喉牙, 잠시나마 목구멍과 치아를 시원하게 할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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