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가 이기면 49%는 패자가 되는 정치, 선거가 끝난 뒤에도 승복보다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상대의 실패를 곧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정치. 백왕순 모자이크민주주의평화그룹 공동대표가 『모자이크 민주주의』에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승자독식의 정치 구조다.
백 대표는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을 가진 조각들이 각자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모자이크’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비유로 제시한다. 연금·교육·에너지처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51%의 단순 다수결을 넘어 ‘3분의 2 이상의 사회적 대합의’를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내놓는다. 그 밑바탕에는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유기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2,500년 전 유교가 정치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보게 된다.
유교 역시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물어왔다. 질문의 출발점은 오늘날의 정치학과 조금 달랐다. 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먼저 묻기보다 그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물었고, 권력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더 앞세웠다.
그 중심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있다.
수기치인은 자기 자신을 닦은 뒤 그 힘으로 사람과 세상을 다스린다는 유교 통치학의 기본 구조다. 『논어』 헌문편에서 공자는 군자의 길을 묻는 자로에게 ‘수기이경(修己以敬)’,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 나아가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을 말한다. 자신을 바로 세우고 경건함을 갖추는 일이 결국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더 나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모자이크 민주주의와 유교 통치학의 첫 번째 차이가 드러난다.
모자이크 민주주의가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결정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유교는 그보다 앞서 ‘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하나는 제도의 구조를 문제 삼고, 다른 하나는 그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의 품성과 절제를 문제 삼는 셈이다.
공자가 법과 형벌만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정치를 경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논어』 위정편의 ‘도지이덕 제지이례(道之以德 齊之以禮)’는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라는 뜻이다. 법과 처벌은 사람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행동하는 공동체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오늘의 정치에 이 말을 대입하면 결코 가볍지 않다.
아무리 정교하게 권력분립 제도를 설계하고 국가적 중대 사안의 합의 기준을 3분의 2로 높인다고 해도, 정치인이 상대를 공존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바라본다면 제도는 다시 싸움의 도구로 변할 수 있다. 사회적 대합의를 위해 만든 장치가 협치의 틀이 아니라 서로의 몫을 나눠 갖는 정치적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교 통치학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이 공적인 권력을 맡을 만한 품격과 절제, 자기 성찰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덕 있는 지도자만 기다리는 정치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역사는 선한 통치자가 언제나 등장한다는 보장을 하지 않는다. 통치자의 도덕성과 선의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순간 정치는 다시 인치(人治)의 위험으로 기울 수 있으며, 자신을 군자라고 확신하는 권력자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와 판단을 억누를 가능성도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헌법과 선거, 권력분립과 법치, 임기와 책임제도를 만들어낸 이유도 결국 사람의 선의만을 믿을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출발한다.
이 지점에서 『모자이크 민주주의』의 제도론은 유교 통치학의 한계를 보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어느 한쪽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도록 합의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유교가 좋은 통치자의 내면을 설계하려 했다면, 모자이크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시민과 정치세력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정치의 외형과 절차를 설계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도 다시 질문은 남는다.
좋은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정치가 자동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3분의 2 합의제 역시 그 제도를 운영하는 정치세력이 공동체보다 자기 진영의 이해를 앞세운다면 숙의의 장치가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는 담합의 장치가 될 수 있고,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거부권이 개혁을 막는 상시적 봉쇄 수단으로 변할 수도 있다.
결국 사람만 믿어도 위험하고 제도만 믿어도 위험하다. 덕이 제도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독선으로 흐를 수 있고, 제도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절제와 책임을 잃으면 권력게임의 규칙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유교와 모자이크 민주주의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보완하는 구조라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동시에 서로를 제한하는 관계에 더 가깝다.
두 사상이 가장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공자는 『논어』 자로편에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라고 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기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화(和)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각자의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자이크의 원리도 다르지 않다.
빨간 조각을 파랗게 칠하고 파란 조각을 빨갛게 만들어서는 모자이크가 성립하지 않는다. 각 조각이 자신의 색과 모양을 유지할 때 비로소 전체 그림이 살아난다. 정치 역시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그 차이를 제거하지 않고 공동의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가 자주 착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통합을 상대방의 항복으로 이해하고, 협치를 내 주장에 상대가 동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편이고 다른 의견을 말하면 적으로 분류하는 순간 정치는 화(和)가 아니라 동(同)을 요구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화이부동은 단순히 모자이크 민주주의와 닮은 고전의 표현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실제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정치인이 갖춰야 할 태도이자, 합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또 다른 통치 원리인 정명(正名)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해야 정치의 질서도 바로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의 정치에 적용하면 질문은 보다 구체적으로 바뀐다.
‘사회적 대합의’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거대 정당끼리 이해관계를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협치’라고 부르면서 사실상 상대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민통합’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지지층의 요구만 국가 전체의 요구처럼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3분의 2가 찬성했다고 해서 그 결정이 자동으로 좋은 합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됐는지, 정보가 충분히 공개됐는지, 정치세력의 이해보다 공동체의 장기 이익이 우선됐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정명은 그런 점에서 모자이크 민주주의가 말하는 ‘합의’라는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제도의 숫자를 넘어 그 제도가 실제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까지 묻는 것이다.
맹자의 민본사상에 이르면 두 사상의 접점은 또 다른 층위로 확장된다.
유교에서 백성은 단순한 통치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서경』에서 이어진 ‘민유방본(民惟邦本)’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며, 맹자는 이를 더욱 밀어붙여 백성을 가장 귀하게 보고 군주를 가장 가볍게 두는 정치관을 제시했다.
오늘의 민주주의와 전근대의 민본사상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유교의 민본은 백성을 정치권력의 최종 주권자로 규정한 현대적 국민주권론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이를 곧바로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읽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는 두 사상이 만난다.
모자이크 민주주의가 49%를 정치 과정에서 지우지 않는 방법을 묻는다면, 민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결정이 결국 누구의 삶을 위한 것인가를 묻는다. 하나는 소수의 정치적 권리와 의사결정의 구조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의 목적과 책임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권력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3분의 2가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이 국민의 삶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좋은 정치라고 말하기 어렵다. 반대로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만 내세우면서 절차와 소수의 권리를 무시한다면 그것 역시 민주정치라고 부르기 어렵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합의의 폭과 정치의 목적을 함께 보는 일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유교 통치학과 모자이크 민주주의의 관계는 한층 선명해진다.
유교의 수기치인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묻고, 모자이크 민주주의의 합의제도는 권력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묻는다. 여기에 유교의 민본은 다시 그 권력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돼야 하는지를 묻는다.
사람, 제도, 목적의 문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좋은 정치를 완성하기는 어렵다.
좋은 사람이 나쁜 제도를 운영하면 자신의 선의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고, 좋은 제도를 나쁜 사람이 운영하면 규칙의 빈틈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사람도 제도도 훌륭해 보이지만 정치의 목적이 국민의 삶에서 멀어진다면 그것 역시 좋은 정치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필요한 정치의 답은 덕치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새로운 제도 하나를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도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끊임없이 절제하며, 그 모든 정치의 최종 판단 기준에는 국민의 삶을 놓아야 한다.
다수는 선거에서 이겼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 해서는 안 되고, 소수 역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체의 결정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2,500년 전 공자는 자신을 닦아 사람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다.
오늘 『모자이크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틀을 고민하자고 말한다.
둘은 같은 사상이 아니며, 시대도 다르고 권력에 대한 전제도 다르다. 그럼에도 두 질문을 함께 놓고 바라보면 지금 한국 정치가 놓치고 있는 한 가지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좋은 정치는 좋은 사람과 좋은 제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조차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며, 그 모든 정치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과정도 필요하다.
좋은 정치란 상대를 꺾고 승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권력을 절제하고, 나누고, 책임지는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모자이크가 아름다운 이유도 가장 크고 화려한 조각 하나 때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각자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마침내 하나의 그림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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