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을까?”
족보는 사람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누가 어느 가문에 속하는가, 누구의 후손인가, 어느 파에 속하는가를 밝히고 그 구성원의 계보적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족보는 단순히 조상의 이름을 적어놓은 책만은 아니었다. 족보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특정 가문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였으며, 그 가문이 형성한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권위 속에 자신과 후손이 위치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따라서 족보에는 자연스럽게 안과 밖이 있었다. 누가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어느 선조의 정당한 후손인가, 어디까지 같은 문중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전기와 중기의 족보는 상당 부분 사람을 가르고 경계를 확인하는 ‘구별의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족보의 문을 둘러싼 진입과 저항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족보 밖에 있던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현상은 주로 비양반층의 양반지향이나 신분상승 욕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모록(冒錄)과 위보(僞譜)의 문제로 설명되어 왔다. 충분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설명이다. 양반이 높은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시대에 자신과 자손이 더 나은 사회적 지위와 존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대와 사회를 넘어 인간에게 널리 나타나는 보편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족보 밖에 머물기보다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을까.
개인의 동기는 서로 달랐을 것이다. 양반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경제적 성장에 걸맞은 사회적 대우를 받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군역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족보를 이용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반면 자신의 선조를 찾고 가계의 기억을 자손에게 남기고자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족보의 서문과 발문을 읽어보면 족보를 만든 사람들의 또 다른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선조를 숭모하고 친족 간의 돈목과 우애를 두텁게 하며, 세대가 멀어질수록 같은 조상의 후손끼리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후세에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나타난다. 족보에는 계보를 밝히는 목적뿐 아니라 흩어지는 친족의 기억을 잇고 그 관계를 후손에게 전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족보의 문이 쉽게 열린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족보 안으로 들어오려는 과정에서 기존 문중과의 갈등이 생겼다. 입록을 거부하거나 이미 기록된 사람을 삭제하는 일도 있었고, 계통과 입록을 둘러싼 분쟁도 있었다. 모록과 위보 역시 실제로 존재했다.
1764년 영조 때 역관 김경희(金慶禧)의 사건은 그 가운데 하나다. 당시 기록에는 김경희가 사적으로 활자를 만들어 여러 집안의 보첩을 모으고,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모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생계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위조족보와 매입한 직첩을 이용해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위조 족보를 이용하여 군역을 피하려 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족보에 이름만 올리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 국가는 호적과 군안 같은 공적인 행정기록을 통해 백성과 군역 대상자를 파악했다. 족보는 국가의 군역대장이 아니라 문중이 편찬한 사적인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족보가 특정한 신분이나 면역 자격을 주장할 때 계보와 신분을 뒷받침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활용될 만큼 사회적 공신력을 지녔다는 점은 중요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기존 문중은 그 경계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부의 모록과 위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후기 족보 문화의 확대 전체를 ‘가짜 양반의 증가’나 ‘군역 회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개별적인 일탈이 존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 전체에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더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족보가 아무런 사회적·문화적 가치가 없는 기록이었다면, 사람들은 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까.
기존 문중은 경계를 지키려고 했고,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 족보의 역사는 ‘진입과 저항의 역사’이자 족보라는 기록공동체의 경계를 둘러싼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양반의 족보에서, 모두의 족보로
개인은 양반이 되고 싶어서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한 세대, 두 세대를 넘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누적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다. 양반층이 주로 향유하던 성씨와 본관, 선조에 대한 기억, 문중과 제사, 족보라는 계보문화가 점차 더 넓은 사회계층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양반이 되기 위해 족보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족보 안으로 들어간 결과, 족보는 더 이상 양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한국 족보사의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의 족보 참여가 장기간 누적된 끝에 한국 사회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신분으로서의 양반은 사라져 갔는데, 왜 양반이 향유하던 족보문화는 오히려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씨와 본관을 말하고, 선조를 기억하며, 문중과 족보를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이게 된 현상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양반의 족보’가 ‘모두의 족보’가 되어간 이 변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양반층이 주로 향유하던 족보문화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신분상승의 역사를 넘어 기록에 참여하고 자신의 선조와 가족의 기억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확대된 역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장기적인 역사 과정을 증언하는 방대한 족보 기록군은 단순한 혈통기록이나 가족기록의 차원을 넘어 세계 기록문화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이는 한국 족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적 가치를 검토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를 ‘전 백성의 문화적 양반화’와 ‘기록문화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쓴이=정호성한국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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