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중의 마룻바닥에서 발견된 옛 지도, 화재로 자취를 감췄다가 되돌아온 벼루, 여러 집안에 흩어져 있던 조각을 맞춰 복원한 한 사람의 일기까지. 민간이 지켜온 기록에는 문서에 적힌 내용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과 시대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개원 30주년을 맞아 지난 세월 수집하고 연구한 국학자료 가운데 30점을 선별해 공개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오는 11월 1일까지 유교문화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Ⅰ에서 2026년 정기기획전 ‘서른 해의 빛, 서른 점의 보물’을 연다. 전시는 지난 9월 1일 시작됐다.
전시 제목의 ‘서른 해’는 민간 기록을 찾아 보존해 온 한국국학진흥원의 지난 30년을 가리킨다. ‘서른 점의 보물’은 국가가 지정한 문화유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흥원의 수집·보존 활동을 대표하거나 자료마다 특별한 발견 과정과 사연을 간직한 유물 30점을 뜻한다.
이번 전시는 소장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간에 있던 기록이 어떻게 발견되고 보존됐는지, 연구를 통해 어떤 가치를 인정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전시 구성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첫걸음 ▲국학자료의 수집과 보존 ▲민간 기록의 가치 발굴과 세계화 ▲미래 세대에 전하는 국학자료의 가치 등 네 가지 흐름으로 이어진다. 전시장 도입부에서는 진흥원이 걸어온 30년의 주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개인과 문중이 소유권을 유지한 채 자료를 맡기는 기탁 방식으로 국학자료를 수집해 왔다. 오래된 문서와 책판이 관리 부실이나 화재, 도난 등으로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2001년 본관 ‘홍익의 집’이 문을 열 당시 능성구씨 백담문중 자료가 처음 기탁됐다. 이후 전국 각지의 문중과 개인 소장자들이 자료를 맡기면서 현재까지 수집된 국학자료는 약 69만 점으로 늘었다.
진흥원은 기탁받은 자료를 보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분류와 해제, 학술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기록의 의미를 찾아왔다. 서로 다른 문중에 흩어진 자료를 연결하거나 전승 경위를 조사해 문서 속 인물과 사건을 복원하는 작업도 이어졌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성당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여러 문중이 보관하던 관련 자료를 연결하면서 한 인물의 기록이 다시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는 종택의 마룻바닥에서 발견됐다. 자칫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훼손될 수 있었던 자료가 조사와 보존을 거쳐 전시 유물로 관람객을 만나게 됐다.
화재로 사라진 뒤 다시 찾은 벼루와 그 사연을 기록한 「가연기」도 공개된다. 물건 하나를 되찾은 개인적 경험이 글로 남겨지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기억을 전하는 역사자료가 됐다.
퇴계 이황이 남긴 유묵첩 가운데 「이자수의 조사첩[교첩]」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교첩은 조선시대 관리를 임명하거나 관직과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발급했던 문서다. 이 자료를 통해 당시의 관직 임명 방식과 공문서 형식, 퇴계 이황의 필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과 국난 극복 과정을 기록한 『징비록』도 전시장에 나온다. 『퇴계선생문집』 책판과 『수토절목』, 『전가보첩』 등 진흥원의 수집과 연구 활동을 대표하는 자료도 함께 선보인다.
민가와 문중의 장롱, 서고, 종택에 머물던 기록 가운데 일부는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거쳐 국가유산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오른 자료도 있다.
‘한국의 유교책판’과 ‘한국의 편액’, ‘만인의 청원 만인소’, ‘내방가사’가 그 사례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 역시 민간이 보관해 온 자료가 국가와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유산으로 평가받은 경우다.
이들 자료는 역사의 기록이 국가기관이나 권력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유학자들이 학문을 남기기 위해 제작한 책판, 건물과 공간의 정신을 담은 편액, 유생들이 뜻을 모아 올린 만인소, 여성들이 한글로 삶과 감정을 기록한 내방가사에는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전시에는 고문헌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도 국학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영상과 미디어아트가 활용됐다.
『퇴계선생문집』 책판이 놓인 공간에는 이황이 쓴 매화시와 매화를 소재로 한 영상이 펼쳐진다. 농암 이현보의 영정과 한국의 편액을 재구성한 미디어아트도 전시장 곳곳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이는 오래된 기록을 진열장 안에 가두기보다 오늘의 관람객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전달하려는 시도다. 기록에 담긴 글과 인물, 시대적 배경을 시각적으로 풀어내 어린이와 청소년의 이해도 돕는다.
이번 전시는 한국국학진흥원의 개원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면서 민간 기록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줄 것인지 묻는 자리다.
오랫동안 한 집안이 보관한 문서라도 관리가 중단되면 훼손되거나 흩어질 수 있다. 기록의 존재와 가치를 알아보는 조사, 원형을 지키는 보존, 내용을 밝혀내는 연구가 함께 이뤄져야 비로소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된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전시 기간 중 30점의 자료 가운데 특별한 사연을 지닌 주요 유물을 선정해 별도의 기획보도를 이어갈 계획이다. 자료가 발견된 장소와 기탁 과정, 기록 속 인물과 이를 지켜온 문중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각 유물의 의미를 소개한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진흥원의 30년 역사와 함께해 온 국학자료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며 “민간이 오랜 시간 지켜온 기록이 수집과 보존,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얻는 과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른 해의 빛, 서른 점의 보물’은 오는 11월 1일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Ⅰ에서 열린다.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