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다가 한마디에서 오래 눈길이 멈췄다.
“저는 문과입니다.”
제넨셀의 코로나19 치료제 동물실험 자료 조작 의혹과 관련한 질의 과정에서 나온 답변이었다. 김 후보자는 자신이 문과 출신이어서 치료제의 성능이나 실험자료의 진위를 알 수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후보자 측은 이후 해당 발언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의약품의 효능과 실험자료의 진위는 전문기관이 판단할 영역이며, 자신은 관련 분야의 전문성이 부족해 자료 조작 여부를 알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법률가에게 의사나 약학자 수준의 지식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해명은 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질문이 남았다. 도대체 ‘문과’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문과와 이과로 나눈다. 수학과 과학에 익숙하면 이과, 역사와 철학·법을 공부하면 문과라고 부른다. 이런 구분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과학이나 의학, 기술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문과라서 모른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전문 영역을 잘 알지 못한다는 솔직한 고백일 수 있지만, 때로는 더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처럼 쓰이기도 한다.
우리 선비들이 평생 좇았던 ‘문(文)’도 그렇게 좁은 의미였을까?
선비에게 문은 단순히 시를 짓고 글을 읽는 기술이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사람과 사회의 관계를 살피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한 공부였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고 그것을 묻고 배우는 과정이 곧 학문이었다. 책을 읽는 목적도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백성의 삶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논어』 「위정」에는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구절이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뜻이다.
이 가르침에 비춰 보면 “저는 문과라서 모릅니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가 훨씬 정직하다.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의약품의 효능이나 실험자료의 진위를 단정하는 일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선비의 공부는 그 인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묻고, 물었으면 배우며, 배운 뒤에는 다시 사실관계를 살펴야 한다. 특히 공적인 위치에서 판단하거나 행동했다면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움직였는지 설명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모름의 인정은 학문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문과 출신에게 신약의 화학식이나 약리작용, 동물실험 자료 하나하나를 전문적으로 판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법률가에게 의사나 약학자 수준의 전문지식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다. 이 사안에서 따져야 할 핵심도 후보자가 의약학 지식을 얼마나 갖췄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적인 판단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어떻게 다뤘느냐다. 전문가에게 물었는지, 관련 기관의 판단과 그 근거를 확인했는지, 자신이 전달한 민원이나 의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살폈는지, 문제가 제기된 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되돌아봤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문과와 이과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자의 자세와 책임에 관한 문제다.
오늘날 행정과 정치는 문과와 이과라는 낡은 칸막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원전 정책을 결정하려면 원자로 기술만 알아서는 부족하다. 지역 주민의 삶과 지역경제, 환경과 안전, 법률과 행정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인공지능 정책 역시 알고리즘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개인정보와 노동, 저작권은 물론 기술이 인간의 존엄에 미칠 영향까지 헤아려야 한다.
법과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도 과학과 기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중요한 정책과 민원을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고 서로 다른 지식을 연결해 공공의 판단으로 만들어낼 역량은 갖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문과는 ‘과학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질문하고, 자신이 모르는 분야라면 전문가의 설명을 구하며, 그 지식을 공적인 책임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문을 공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저는 문과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묘한 화가 났다. 특정 정치인 한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문과’라는 말을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처럼 사용하게 됐는지 답답했기 때문이다.
문은 무지의 면허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고, 그것을 묻고 배우며,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는 힘에 가깝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른다고 말한 뒤 “그래서 무엇을 확인했고, 누구에게 물었으며, 어떤 근거로 행동했는가”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고 했다. 그 가르침의 진정한 무게는 바로 그다음에 있을 것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면 배우려 해야 하고, 배웠다면 올바르게 판단해야 하며, 공적인 판단을 내렸다면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문과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문을 공부했기에 모르는 것을 묻고, 배운 것을 세상에 적용하며, 자신의 판단에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선비의 공부’라고 불러온 문(文)의 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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