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교신문) 김정기 기자 =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자락에는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을 기리는 명주군왕릉이 자리한다.
김주원이 세상을 떠난 시기와 처음 묻힌 장소를 명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묘역은 조선 중기 이후 후손들이 찾고 정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릉김씨는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4월 20일 능향대제를 봉행한다. 왕위를 다투지 않고 명주로 물러난 시조의 사양지덕을 기리는 자리다.
◇ 조선 중기에 다시 세운 시조의 묘역
명주군왕릉은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묘역에는 두 기의 봉분과 비석, 제향 공간 등이 조성돼 있다.
현재와 같은 제향 전통이 마련된 시점은 1561년으로 전한다. 당시 강릉부사로 부임한 김첨경이 묘역을 확인하고 수축한 뒤 제향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1747년에는 강릉김씨 출신 문신 김상성이 ‘명주군왕지묘’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김상성은 뒤에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의 형이다.
묘역 주변에는 김주원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과 제향을 준비하는 숭의재 등이 들어서 있다. 명주군왕릉은 강릉김씨의 시조 묘역인 동시에 지역의 오랜 제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 원래 능묘인지는 남은 과제
현재의 명주군왕릉이 김주원이 처음 묻힌 무덤인지는 학술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김주원의 생몰 연대와 매장 기록이 뚜렷하지 않고, 묘역에 대한 체계적인 고고학 조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의 능호와 묘역 형태는 조선시대 이후의 문헌과 족보, 후손들의 전승을 바탕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김씨 문중이 오랜 기간 묘역을 보존하고 제례를 이어왔다는 역사적 사실과 실제 피장자가 김주원인지를 밝히는 학술적 검증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전승을 부정하기 위한 문제가 아니다. 문헌 조사와 비파괴 방식의 학술조사 등을 통해 묘역의 조성 시기와 변천 과정을 밝힌다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 지방관이 참여한 능향대제
능향대제는 1561년 강릉부사 김첨경의 묘역 수축을 계기로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강릉부가 제물을 마련하고 지방관이 제향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중 내부의 사적인 제사를 넘어 지역 수령과 유림이 함께한 향사의 성격을 지녔다.
관에서 제물을 지원하던 관행은 1905년을 전후해 중단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에는 강릉김씨 후손들을 중심으로 제례를 이어왔다.
광복 이후에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역 인사들이 제향에 참여하는 관례가 형성됐다. 최근 능향대제에서도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고 문중 인사들이 아헌관과 종헌관을 맡는 방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현재의 국가제례나 법정 관제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참여했던 지역 향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행사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능향대제의 연차도 공식 자료를 기준으로 표기해야 한다. 1561년을 기점으로 단순 계산한 햇수와 실제 봉행 횟수는 전란과 사회적 변동에 따른 중단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절의로 이름을 남긴 김시습
강릉김씨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김시습은 14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세종에게 총애받았지만,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길을 버렸다.
그는 평생 세조의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 생육신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꼽히는 『금오신화』를 남긴 문인이자 유학과 불교, 도교를 폭넓게 탐구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김주원과 김시습 사이에는 600년이 넘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을 직접적인 가훈의 계승으로 단정할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권력보다 자신의 원칙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삶은 함께 조명할 만하다.
김주원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뒤 명주로 물러났고, 김시습은 왕위 찬탈에 항거하며 벼슬을 버렸다.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권력의 중심을 떠나는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 사양지덕이 오늘에 묻는 것
능향대제는 강릉김씨 후손뿐 아니라 지역 기관장과 유림, 정치권 인사들이 참석하는 행사로 성장했다. 오랜 제례가 지역 공동체의 문화유산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행사의 규모와 공공성이 커질수록 지켜야 할 원칙도 분명해진다. 특히 선거를 앞둔 시기에는 문중 행사가 정치인의 세 과시나 표밭 경쟁의 공간으로 비치지 않도록 세심한 운영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참석 자체를 문제로 볼 일은 아니다. 제향의 본래 목적보다 참석자의 직함과 발언, 정치적 행보가 앞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주원을 기리는 핵심 정신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 절제와 양보다. 시조의 사양지덕을 말하면서 후손들이 의전 순서와 행사 주도권을 두고 다툰다면 제례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10여 년에 걸친 내부 갈등을 수습하고 새 출발에 나선 강릉김씨대종회에도 화합과 투명한 운영이 요구된다. 종회의 정상화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갈라진 후손들이 다시 제향 앞에 함께 서는 과정이어야 한다.
◇ 문중을 넘어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명주군왕릉과 능향대제는 한 문중만의 역사로 머물지 않는다.
신라 왕실과 명주의 관계, 조선시대 지방관의 제례 참여, 현대 문중 조직의 변화가 한 공간에 겹쳐 있다. 강릉의 지역사와 유교 의례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문화유산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승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주군왕릉의 조성 시기와 묘역 변천, 능향대제의 제례 절차와 제물 구성, 지방관 참여 기록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조사가 축적되면 능향대제를 지역 무형유산으로 보존하고 교육·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문중의 전승과 학술 연구, 행정기관의 기록을 함께 살펴야 한다.
◇ 본관은 과거가 아닌 오늘의 약속
본관의 역사는 유명한 조상을 내세우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선조가 남긴 정신을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강릉김씨의 역사는 왕위를 둘러싼 신라의 권력투쟁에서 시작됐다. 김주원은 명주에 새로운 기반을 세웠고, 후손들은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가문의 뿌리를 이어왔다.
김시습은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절의를 보여줬다. 명주군왕릉과 능향대제는 그 오랜 시간을 현재와 연결한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견리사의의 가르침은 옛 문중에만 머무는 말이 아니다.
시조의 능 앞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서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는가가 중요하다. 강릉김씨가 이어온 사양지덕과 절의의 가치는 그 질문에 답할 때 비로소 오늘의 전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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