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춘기석전 당시 성균관대 무용학과 일무팀의 팔일무 공연 모습
공부자의 학덕을 비롯한 역대 성현의 뜻을 본받기 위해 봉행하는 성균관 석전은 유교의 최대 축제이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팔일무는 유교의례의 꽃으로 불린다. 그 때문에 춘·추기 석전 때만 되면 봉행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사진작가나 기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했고 그 사진과 그림은 방송과 신문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하지만 파행으로 끝난 올해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지난 3월 서정기 관장은 “석전과 공부자 탄강일을 전 국민 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라며, “유림총회에서 결의된 바와 같이 지방 향교에서는 형편에 따라 석전을 봉행하되, 중앙에서는 양력으로 봉행하여 유림 3천명이 유복을 입고 참여하는 성대한 석전을 봉행할 것이다. 아울러 일반 국민과 사회단체를 대거 초청하여 축제의 장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공부자 탄강일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서 관장은 취임 후 공약을 번복하고 2.8 상정 문제를 제기하며 춘기석전을 봉행하지 않았다. 당시 유림들은 석전을 봉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균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석전을 양력으로 봉행하든 2.8 상정으로 봉행하든 성균관 정관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유림들의 총의를 모아 결정하면 되는 일이고 석전만큼은 봉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 관장은 절차를 지키라는 유림들의 지적을 ‘天戒’ 운운하며 무시했다.
이번 추기석전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지난 8월27일 (사)석전대제보존회 이사회에서는 서 관장의 주장과 달리 ‘일무와 연행단 변경’을 불허하고 종전과 같이 성균관대 무용학과에게 일무를 맡기기로 결의했다. 이날 회의는 당연직 이사장인 서 관장이 직접 주재하고 안건을 상정한 정식 이사회였으며, 참석 이사들은 결의에 이어 추기석전에서 성대 무용학과가 일무를 계속 맡기로 한다는 내용을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날인까지 했다. 이사회가 이렇게 결정한 이상 서 관장은 이를 따라야 했다.
하지만 성균관 총무처장은 석전 이틀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성대 무용학과 일무팀의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했고, 하루 전 법원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서 관장은 이사회 결의를 무시하고 용역을 동원해 성대 무용학과의 팔일무 공연을 막았고, 급기야는 서 관장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여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이날 석전은 팔일무가 아닌 이일무가 공연되는 등 성균관 창건 이래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추기석전 파행 이후 성균관 총무처는 ‘2014 추기석전 아악 및 일무에 대한 해명서’를 발표했다. 이 해명서에서도 서 관장이나 성균관 총무처는 사과나 반성의 말 한 마디 없이 ‘원형 복원’을 핑계로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일천만 유림을 모독하는 대죄’, ‘불법세력 척결’ 등 막말 비난으로 책임전가에만 급급했다. 본보는 2차에 걸쳐 ‘원형 복원’ 논란의 거짓과 진실을 살펴본다.
‘원형 복원’ 논란 어떻게 봐야 하나
조선시대 석전에는 국왕이 초헌관이 되어 지내던 국왕친행 석전, 왕세자가 초헌관이 되어 지내는 왕세자 석전, 정2품관 초헌관이 지내는 有司釋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유사석전이 가장 많이 봉행됐고, 유사석전은 관례상 초헌관은 예조판서, 아헌관은 대사성, 종헌관은 사성이 맡았다.
석전의 일시는 음력으로 봄(2월)·가을(8월)의 上旬 丁日(初丁日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상순 정일은 그 달의 日辰에 있는 10干 중 처음 丁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날을 말한다. 봉행을 위해 석전 3일 전부터 淸齋에 드는데 장의는 장의방에 들어와 거처하고 하루 전 날 이른 아침에 제관이 들어와 오후 3시 경 명륜당에서 습의를 했다. 밤 11시 경 일어난 제관들은 문묘에 불을 밝히고 새벽 1시 경에 시작해 동이 틀 무렵까지 석전을 봉행했다.
그러나 조선 망국 이후 일제강점기부터는 낮 제사로 바뀌게 된다. 광복 후 초대 성균관장인 심산 김창숙 선생은 제사가 너무 번거롭다고 하여 25위의 위패를 제외한 다른 위패는 모두 매안하기로 결정하고(지금은 공문 10철, 송조 4현을 추가하여 39위를 모시고 있다), 유림총회를 열어 석전은 공부자 탄강일인 음력 8월27일에 한 번만 지내기로 결의해 시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물론 근래 들어서도 석전에는 時勢에 따른 적지 않은 변화와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원형 복원’에서 원형을 어디까지로 봐야 할지가 문제된다. 조선시대에 새벽 1시에 석전을 봉행했다고 해서 이를 원형이라 주장하며 새벽 1시에 석전을 봉행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유교 의례와 마찬가지로 석전 역시 의례 형식에 앞서 그 속에 담긴 뜻이 중요하다. 석전에 앞서 참례하는 제관들은 봉행 전에 入齋하여 心身을 깨끗하게 유지한 다음 先聖·先師들에 대한 추모의 예를 올리게 된다. 산재는 몸을 비롯한 외적인 면을 삼가는 것이고, 치재는 내적인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제사만을 생각하고 근신하는 것이다.
아울러 산재에는 ‘첫째,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外舍에서 잔다. 둘째, 술과 마늘 등을 먹지 않는다. 셋째, 병문안과 弔喪을 하지 않는다. 넷째, 음악을 듣지 않는다. 다섯째, 형벌과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지 않는다. 여섯째, 거칠고 사나운 일을 하지 않는다’ 등을 금기 사항으로 정하고 있다.
서 관장과 성균관 총무처는 이 같은 금기 사항을 모두 어겼다. 전례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자의 학덕을 비롯한 역대 선성·선사의 뜻을 본받고 기리는 석전의 의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추모와 삼감, 근신 등 석전의 의의를 망각한 ‘원형 복원’ 주장은 아무 의미도 없다. ‘원형 복원’ 논란에 앞서 깊이 생각해야 할 점들이다.
유교에서는 經과 權, 本과 末을 강조한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夏·殷·周 삼대의 예에 대해 ‘因(따르는 것)’과 ‘損益(덜고 더하는 것)’을 말씀하셨고, 주자는 ‘삼강오상은 시대가 변해도 바뀔 수 없는 대체이므로 따라야 하는 것이며, 문장제도는 시대에 따라 덜거나 더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석했다.
율곡 이이 선생도 이와 관련해 “시세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은 법제이고, 고금을 통해 바꿀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삼강이며 오상이다. 후세에는 도술이 밝혀지지 않아 바꿀 수 없는 것을 때때로 바꾸고, 바꾸어야 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지켰으니 그리하여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혼란한 날은 항상 많았던 것이다”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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