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량 선생은 조선전기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숙간(叔簡)이며, 호는 마재(磨齋)이다. 부
친은 형조판서를 역임한 소평공(昭平公) 광세(光世)이며, 조부는 증 의정부 좌찬성 난손(蘭孫)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은 당숙이다.
1480년(성종 11)에 출생하여 22세인 1501년(연산군 7)에 생원시와 진사시 양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1506년(중종 원년) 27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있은 후인 1507년 예문관 봉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수많은 신료들이 무참히 살해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보아온 젊은 정충량은 동료인 김흠조와 함께 무오사화 때 억울하게 삭탈관직 당한 신료들과 참화를 입은 사림(士林)들을 신원(伸寃)하여 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고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보장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1511년 사간원의 헌납으로 승진하였고 무오사화의 주모자인 유자광(柳子光)의 횡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탄핵하여 그의 관직과 훈작(勳爵)을 삭탈하여 광양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
신진사류의 대표인 정암(靜巖) 조광조(趙光祖)가 중종의 부름을 받고 입시하여 정치개혁을 주청하면서 성리학에 의한 정치구도를 주장하자 정충량은 모제 김안국과 함께 뜻을 같이 하여 당시 사림파의 일원으로서 정치개혁에 앞장섰다.
죽마고우이며 동문수학한 김안국과는 생원. 진사시에서도 김안국이 1등으로 합격하였고 정충량이 3등으로 합격하였다.
또한 문과에도 몇 년 사이에 함께 급제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였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중종반정 공신들의 횡포를 막는데도 선두에서서 활약하였다,
당숙인 정광필을 필두로 한 안당(安塘) 등 원로 개혁파들을 설득하는데도 앞장섰다.
1519년(중종 14) 봄에 정충량은 도승지에 올라 중종의 정치개혁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었으나 그해 11월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던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사류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정충량은 조광조를 구하기 위하여 중종에게 여러 신진사류들과 함께 그가 오직 나라와 임금,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개혁을 주장한 것이라고 극구 변호하였으나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등이 작당하여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냈고, 아니면 관직에서 파면하여 훈구파들이 세력을 잡았다.
정충량은 도승지에 오른 지 6개월도 안되어 밀려나 이조참의로 좌천되었고, 또다시 공조참의로 좌천되고 그의 동지들인 조광조, 김정, 김식(金湜), 김안국(金安國) 등이 처형되거나 파직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광주(廣州) 마산, 현 광주시 장지동 담안 마을로 낙향하여 울분에 젖어 참화를 당한 동지들을 생각하며 둔거(遁居)하다가 2년이 못되어 울화병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44세로 졸하였으니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모제 김안국도 파직 당하여 이천(利川)에서 은거하면서 10여년을 보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파 세력들이 귀양 가거나 처단되어 관직에 복귀한 뒤 정충량이 졸하였음을 알고 슬퍼하면서 정충량의 영식인 수후(守厚)공에게 묘갈문(墓碣文)을 지어 묘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김희수(金希壽)가 썼다.
기묘사화가 있은 후 22년 만에 김안로 등 훈구파들이 모두 밀려나 귀양 가고 신진사류들이 신원(伸寃)되었을 때 정충량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등재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 되었는데 대사헌이라는 직책은 기묘사화 때 정암 조광조의 직함이었다.
시호(諡號)를 염간(廉簡)으로 하사받았다.
선생의 묘역에는 두 개의 묘갈이 서 있는데, 1525년(중종 20) 묘갈을 건립한 것이 있고 249년 후인 1776년(영조52)에 비문의 글자가 마모 되어 감을 안타까이 여겨 후손들이 광주가 낳은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추기(追記)하여 다시 비문을 작성하고 새로 묘갈을 세웠다.
그러므로 묘역에는 500년 전의 비석과 250년 된 비석이 함께 나란히 서 있다.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1525년에 세워진 묘갈의 이수 조각은 당대의 명작으로 보기 드문 예술품이며, 대석(臺石)의 복연(覆蓮) 조각도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1776년 세워진 묘갈은 김안국의 비문을 복사하여 조각하였고, 순암 안정복의 찬문(撰文)을 추기하였는데, 글자의 훼손이 없이 보전(保全)되어 왔고, 예술성도 우수하다고 평가 되었다.
2013년 10월 선생의 묘역과 석물이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만세토록 보전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13년 11월 5일 광주문화원과 성균관유도회 광주시지부에서 주관하여 추모 및 고유제를 공제(公祭)로 봉행하게 되었다. 모재 김안국은 친구 정충량을 묘명(墓銘)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마음이 침착하고 행동이 곧으며(志恬行貞)조용하여 말이 없고 검소하고 근검하였다(靜默簡儉). 남의 잘못을 들추지 않고(不揚人過)담박하여 영리에 급급하지 않았다(淡泊無營).
南載昊 (廣州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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