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궐리사 홍살문과 외삼문이다.
궐리사 현판이 걸린 외삼문이다.
공부자 위패를 모신 성묘이다.
궐리사(闕里祠)는 공자가 생장한 ‘궐리촌(闕里村)’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국내에는 오산(華城)과 논산 노성(尼城) 두 곳뿐이다. 수원에 살면서 오산시 궐동에 있는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를 언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찾아보지 못해 아쉬워하던 중 궐리사 감사로 활동하는 지인의 초청으로 2월11일(정월 보름) 찾았다.
오산대역에서 하차해 걸어서 가기에는 좀 먼 편이지만 운동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서 갔다. 궐리사 진입 모퉁이를 돌아서자 나란히 서 있는 5기의 공적비가 보였다. 그 중 3기의 공적비가 공신택(孔信澤), 공상을(孔相乙), 공재헌(孔在憲) 3분의 공씨 공적비이다. 공씨 공적비를 보니 안동 도산서당 마을과 같이 또 하나의 추노지향(鄒魯之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홍살문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로 힘차게 뻗은 수령 400년 은행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이 은행나무는 공자의 64세손인 문헌공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이곳에서 궐리사란 사우(祠宇)를 짓고 후학을 지도할 때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헌공이 죽자 은행나무도 따라 죽었으나 그 후 그 은행나무는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헌공 사후 궐리사도 없어졌으나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할 때 궐리사를 지으라고 명하여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16년(1792년) 10월3일 정조가 아래와 같이 전교했다고 한다.
"공씨(孔氏)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맨 먼저 수원(水原)에 정착한 사실이 읍지에 실려 있는데 일전에 도신으로 하여금 그곳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여 그 그림에서 찾아보니 궐리사란 사우도 있고 은행나무도 심어져 있었으며 대대로 눌러 사는 후손들도 있었다. 또 궐리(闕里)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영당(影堂)이 있다고 하였다. 문헌공(文獻公)의 시호를 내린 뒤로도 조정이 공씨 집안을 우대하는 일에 있어 보통 예와는 달리해야 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궐리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세워 내각에 있는 성상(聖像)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을 궐리사라 하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수들은 대략 이성(尼城) 궐리사(闕里祠)의 예대로 시행하되 한사코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른바 새로 세웠다는 영당은 고을 유생들이 사사로이 세운 것에 불과하고 또 간직했던 영정마저도 함께 봉안하였으니 재목이며 돌들도 당연히 이곳에다 옮겨 세워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제향을 드릴 일이겠는가. 서원 지키는 재생(齋生)에 있어서도 그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공씨를 시키도록 하고 다른 유생은 감히 섞이지 못하게 하여 시비 거리가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써서 강당에 게시하라."
위에서 '문헌공'은 공서린을 가리키며, '공씨가 수원에 정착한 사실'이라고 한 것은 이곳이 지금은 오산이지만 당시에는 수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성(尼城) 궐리사'는 노성 궐리사를 가리킨다.
'궐리사' 현판이 붙은 외삼문은 품격이 있었다. 궐리사에도 외삼문을 지나 내삼문으로 오르는 길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도열해 찾는 이를 맞이하고 있었다. 성묘에서 외삼문까지는 공자의 도(道)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통하는 듯하다. 좀 아쉬운 것은 외삼문 앞이 터져 있으면 좋으련만 도로가 코앞에 나 있었다.
성묘(聖廟)란 현판이 붙은 내삼문으로 들어섰다. 성묘는 3칸 건물로 크지는 않았으나 단아했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오성위(五聖位)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18현(賢) 등 많은 분을 모시기 때문에 상당한 공간이 필요하지만 이곳 궐리사 성전에는 오직 공자 한 분만 모시기 때문에 3칸 건물로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성묘의 서쪽에는 1993년 공자의 고향 중국 산동성 곡부시로부터 헌납 받아 세웠다는 공자의 석상(石像)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자의 석상은 국내에서 노성궐리사와 화성(오산) 궐리사에만 있다. 노성궐리사는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유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세웠지만 화성궐리사는 정조가 1792년 화성을 건설할 때 이곳을 우리나라 유학의 중심지로 삼고자 세웠으며 공자의 후손이 강학을 했던 곳이라 의미가 더 크다.
화성궐리사의 또 하나 자랑은 공자문화전시관에 보존하고 있는 공자성적도판각(孔子聖蹟圖板刻)이다. 궐리사 간사인 강재금 선생과 함께 전시관 관람을 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일생과 행적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뽑아 도해한 일종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이고, 이 그림을 목판에 새긴 것이 공자성적도판각이다.
이 판각이 만들어진 경위는 1901년 공부자의 71세손 공재헌(孔在憲)이 중국 산동성 녕해부(寗海府)에 사는 공소겸(孔昭謙)이 소장하고 있는 여성부(呂聖符)가 그린 성적도 108도를 입수하여 우리나라로 돌아와 성적도감인소를 설치하고 1904년 9월 조각공을 소집해 피나무 목판에 판각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공자성적도판각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인소는 정1품 내부대신 조병식이 도약장을 맡았고 총 119명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판각은 양면에 새겼고, 세로 31cm, 가로 69cm이다.
성전의 동쪽 편에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壇)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중국 곡부에 있는 행단보다 크기만 좀 작고 모양은 같다고 한다. 행단 벽면에는 공자 어록이 4면에 쓰여 있었다. 또한 공자의 가르침을 교육하는 양현재가 있었다. 궐리사는 경기도와 오산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학당을 짓고 있으며. 학당이 완공되면 강학이 더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 궐리사 방문에서는 보름 분향례에 참가했고, 새로 짓는 궐리사 학당 상량식에도 참석했다. 궐리사 조직은 도유사와 원로위원, 부도유사, 유사, 감사, 학술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유림회의로 성균관유도회 화성궐리사지부가 있다. 현재 도유사는 유관진 전 오산시장이 맡고 있다.
성균관유도회 화성궐리사지부 회장인 곡부공씨 영의정종중 공준식 회장을 분향례 후 만났다. 공 회장은 "현재 궐리사 임원 중에 공자의 후손이 다수 활동하고 있으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공씨가 도유사는 맡지 않고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궐리사의 큰 행사는 기신석전(음2.18)과 탄신석전(음8.27)이다"라고 했다.
유교(儒敎)는 유학(儒學)이라고도 말하듯이 공부가 중요하다. 궐리사도 제례 봉행하는 사당의 역할과 함께 강학(講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다. 학당(學堂)을 크게 짓고 있고, 담장에 걸린 전통문화강좌 회원 모집 현수막에는 월요일에 민요반, 화요일에 한지공예반, 수요일에 우리춤과 사군자반, 목요일에 대금반, 금요일에 서예반과 경전반이라고 쓰여 있었다.
1993년 중국 산동성 취푸시로부터 기증받은 공부자를 비롯한 오성위 석상이다.
강재금 궐리사 간사가 성적도판각을 들어 보여주고 있다.
목판성적도판각 중 하나를 인쇄한 성적도이다.
문헌공 공서린(孔瑞麟) 선생 유허비와 수령 400년 은행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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