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교 졸업식
2월 말과 3월 초는 졸업과 입학의 시기이다. 수년간의 노력을 마무리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의식을 통하여 학생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러한 의식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는 다시 한 번 결속했다. 그리고 의례를 통하여 유교사상을 사회 저반까지 깊이 심었다. 우리 전통의 입학과 졸업 나아가 학교를 떠나 새롭게 맞이하는 사회생활에서의 의례와 풍속을 알아보자 - 편집자 주 -
작은 졸업식 풍속 - 서당 책걸이 -
조선시대 아이들은 대부분 서당에서 교육의 첫 걸음을 뗐다. 서당은 향촌 사회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초등교육 기관으로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사농공상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대중교육기관이었다. 사대부들이 자신의 집안에서 자제들과 제자들을 소위 문도제(門徒制)와는 분명히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서당의 훈장은 식사, 잠자는 시간까지 하루 24시간을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훈장은 부모를 대신하여 하루 종일 학문뿐만 아니라 사람됨을 가르쳤으므로 군, 사, 부 일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서당을 거쳐 서기(徐起) 송익필(宋翼弼), 홍세태(洪世泰) 같은 낮은 신분에도 커다란 학문적 성과를 거둔 대학자들이 배출됐다. 서당은 학생들의 나이도 각각이었고 입학하고 졸업하는 의례도 없었다. 교육 수준도 훈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특별한 입학의례와 졸업의례도 없었다. 하지만 서당에도 책 한권을 다 배울 때마다 작은 졸업식과 같은 풍속이 있었다. ‘세책례’ 흔히들 책걸이라는 풍속이 그것이다. 책걸이를 통해 학동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배웠고 서당의 존재 목적인 인륜을 가르치고, 향촌사회에서 상하의 분별과 예법 및 유학의 전파를 체감할 수 있었다. 부모들은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아이들의 스승에게 드렸고 풍성하게 마련한 음식을 학동들과 나누어 먹었다. 책걸이에 필수 음식은 송편이었다. 학동을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한 행사로서 반드시 송편을 준비했다. 송편은 학동의 지혜 구멍이 송편처럼 뚫린다는 뜻에서 책걸이에 꼭 따라다니는 음식이다. 일부 서당에서는 학업을 마치면 졸업장 비슷한 것을 주기도 하였다. 성격이 게으르면 닭을 주고, 야심이 많으면 염소를 주고, 약삭빠르면 돼지를, 주의력이 산만하면 거위를 주고, 느리면 말을 주었다고 한다. 남명 조식과 그의 제자로 후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정탁과 관련한 이러한 풍속과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전한다. 정탁(鄭擢)이 남명의 문하에서 공부를 끝마쳐 필업을 하고 문하를 떠나갈 때 스승 남명은 "뒷간에 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으니 몰고 가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실제의 소가 아니라 마음의 소로서 기가 세고 조급한 정 탁에게 세상을 살아갈 때 소처럼 둔중하게 살아가라고 그의 결함을 일러주며 교훈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왕세자입학도
시작, 엄격한 儀禮- 왕세자 입학식-
유일한 국립대학으로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에는 입학을 알리는 엄격한 의례가 존재했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은 국가적 규모의 의례였다. 성균관 대성전에 있는 공부자와 네 명의 성인의 신위에 잔을 올리고, 명륜당에서 스승에게 예를 행하고 가르침을 받는 의식이다. 왕세자의 신분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처음 거행한 사람은 문종으로 8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다. <태학지>는 왕세자 입학의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왕세자의 찬홀(贊笏)이 왕세자 ‘소전례(小前禮)’라고 청하면 왕세자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아무는 학업을 선생에게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왕세자의 찬홀이 장명자(將命者)는 들어와서 아뢰라 말하면 장명자는 들어가 박사 앞에 나가 고해 말하기를 ‘세자 모는 학업을 선생에게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박사 찬홀이 ‘박사는 읍하고 대답하시오’ 라고 말하면 ‘모야는 부덕하오나 왕세자께서 욕이 없을까 묻습니다’라고 한다. (중략) 왕세자는 의식을 같이 하고 집사자도 의식을 같이 한다” 이때 박사는 대제학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영조실록에는 정조의 입식 때 박사의 임명을 놓고 논란이 일자 영조가 친히 대제학에게 박사를 맡기라고 명한 기록이 나온다.
다음은 왕세자 입학의례가 처음 실시된 문종의 입학의례에 관한 세종실록의 기사이다.
“이날에 이르러 세자가 의위(儀衛)를 갖추고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성균관에 이르러 유복(儒服)을 갖추고 대성전에 들어가 작헌(酌獻)을 마치고 속수례(束脩禮)를 박사에게 수행(遂行)하고 당에 올라 <소학(小學)>을 받고 돌아왔다”
왕세자 입학식이라는 국가적 의례를 거행한 뒤에는 공로자에 대한 시상도 있었다. <태학지>는 대제학에게는 숙마(熟馬) 한 필을, 대사성에게는 호피(虎皮) 일령(一令)을 묘사(묘사)와 전사관(典祀官)에게는 상현궁(上弦弓) 일장(一張)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상은 하인에게 까지 미쳐 성균관의 하인에게는 호조에서 쌀과 배를 제급(題給)했다고 한다.
栗谷도 못피한 新參禮 -사회생활의 입학식-
서당을 거쳐 성균관에서 학업을 마친 뒤 과거에 붙어 관료생활을 시작하면 또 하나의 혹독한 입학식인 신참례를 통과해야 한다. 학교만 입학문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용재총화(?齋叢話)>에는 사헌부에 등청하는 광경부터 시작하여 방주(房主) 감찰의 임무와 신관을 맞는 까다로운 여러 절차에 따른 신참례(新參禮)가 묘사되어 있다. 사헌부는 유교덕목을 실현하는 핵심기관이었다. 따라서 다른 기관에 비해 사헌부 신입관료의 신참례는 더욱 혹독했다. <용재총화>도 정도가 심하다고 비판 정도의 신참례에 대한 기사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눈살이 찌푸려 질 정도의 신참례는 조선조 관료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의례였던 것이다. 관료생활의 시작인 신참례는 율곡도 피해가지 못했다. 호되게 당한 율곡은 평생 신참례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신참례에 대한 중종실록의 기사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신참례에 대해 비판하는 사헌부의 상소이다.
“일체의 신래(新來)라 하여 멋대로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래인 사람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지공에 대응하기 바쁘며 비천하고 오욕스러워 모두 사람으로서는 할 수없는 일들도 달갑게 여기며 해야 합니다.(중략) 침학할 때에는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이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도 있기도 한니 폐해가 참혹합니다”
신참례가 엄한 곳이었던 사헌부에서 이러한 상소를 올릴 정도이니 그 폐해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새로운 시작은 기쁨보다는 고통으로 열리기 마련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의식을 통해 아이를 거쳐 학생에서 조선조의 중추세력인 관료로 새 출발을 하는 선비는 자기를 둘러쌓고 있던 알을 깨고 한 마리 새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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