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다.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설날을 맞이하는 모습은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르다. 전통적인 세시 풍속을 바탕으로 설날을 맞이하는 세대와 성별에 따른 풍속도를 재구성 해 보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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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節이 즐겁다. 아이의 설날
아이의 설날은 새 옷을 입는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새 옷은 보통 대보름까지 입는다. 아이 어른 없이 올려야 하는 차례가 아이에게는 의례와 효행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지만 새 옷을 차려입는 즐거움은 어른보다 아이에게 큰 순수한 즐거움이다.
<열양세시기> 원일(元日)조 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새 옷을 입는 것은 세장(歲粧)이라 했다.
다음은 새해 인사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세배는 모든 것이 궁핍했던 시절 아이들이 어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양껏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였고 귀했던 용돈까지 벌수 있는 즐거운 행사였다.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도 활기찼다. 설날 거리는 떠들썩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원일(元日)조에는 “설날부터 사흘 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가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다"라고 쓰여 있다.
덕담을 나누고 새해 인사를 올리기 위해 나온 이들이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조에는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한다고 전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덕담이 건네졌을 것이다.
세배를 드리러 어른의 집안에 들어가서부터 먹는 빛 이었다. 이때 세배꾼에게 차려 내리는 음식상을 '세배상'이라 했다. 설날의 대표적인 음식은 역시 떡국이다. 새해 아침 떡국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은 인사를 드리러 가는 집에서 내놓은 세배상으로 다시 한 번 두둑하게 먹는다. 음식에는 떡국 외에도 강정, 인절미 등이 나왔다. 용돈인 세뱃돈도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굳이 급하게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설날 아침에 세배를 꼭 드리지 않아도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세배는 연초에 바빠서 어른을 찾아뵙지 못했을 때는, '세배는 미나리 꽃이 필 때까지'라는 말처럼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꼭 챙겨서 하는 것이 예의였다. 오전에 인사를 마친 아이들에게는 민속놀이의 즐거움이 기다린다. 여자 아이들은 널을 뛰고 남자 아이들은 연을 날렸다. 정초에 널을 뛰면 그 해에 발에 좀(무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섣달그믐 무렵부터 즐기던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이라 하여 연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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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국립민속박물관
힘들어도 설렌 여자들의 설날
명절 음식 장만은 여자들의 몫이다. 대갓집 부인들도 직접 음식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관리감독의 몫은 있었다. 설날 음식은 제집 식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풍족하게 나누어 주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보면 이장곤의 부인 봉단이가 설날 세찬을 풍족하게 나누어 주어 그의 신분에 관해 운운하는 뒷말을 막아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가 조선 중종조였으니 전통 사회에서 설날의 인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설날은 여성들에게 설레는 날이었다. 여성의 외출이 힘들었던 시절에 직접 친정이나 가까운 인척들의 집을 찾아 가지는 못해도 서로 안부를 전하고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양반집 여자들은 정초 3일부터 15일 사이에 어린 여자 노비를 일가친척에게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렸다. 문안비는 어린 여자종에게도 설레는 행사였다. 문안을 받은 집에서는 반드시 그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상 차려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을 주기도 한 것이다. 물론 문안비를 맞은 집에서도 답례로 문안비를 보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광려(李匡呂)는 이러한 풍속을 “뉘 집 문안비가 문안하려고 뉘 집으로 들어가는고(誰家問安婢 問安入誰家)”라고 묘사했다.
설날은 또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 복을 빌며 쌓인 속내를 풀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이를 안택(安宅)이라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비손 형식의 굿을 했다. 홍수매기를 지낸 후에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액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이는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였다.
남자들도 설날에 바빴다
예로부터 설날은 여성과 아이들의 날이지만 남자들도 설날에는 바빴다. 남자들의 설날은 차례로 시작한다.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지만 이를 진설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차례 후에는 세배를 드리고 세배를 맞았다. 남성들은 친한 이들과의 만남을 위해 부지런히 손님을 맞고 찾아 다녀야 했다.
설날 지출을 계획하고 감독하는 것도 남성의 일이었으며 덕담을 준비하고 세뱃돈을 마련하는 것도 남성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설날 대문에 내걸 그림도 마련해야 했다. 설날에 대문에 그림을 붙이는 것은 궁중에서 유래한 풍속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에서는 세화(歲畵)라 하여 수성(壽星)·선녀(仙女)·직일신장(直日神將) 등 액을 쫓는 신(도교적인 신)을 그려 임금에게 올렸다. 또한 도끼를 든 장군상을 그려 대궐문 양쪽에 붙였는데 이를 ‘문배(門排)’라 한다. 민간에서는 ‘용(龍)’자와 ‘호(虎)’자를 한지에 써서 대문에 붙였다. 차례를 지내기전 한 해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일정한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 방향에 관계없이 소리를 들어본다. 이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했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은 석전으로 열정을 식혔다.
<수서>와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정초에 패수(浿水)에서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고 소리 지르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자료제공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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