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묘소가 집 뒤에 자리하고 있다.
.jpg)
서계 선생의 차남인 박태보 선생을 모신 노강서원이 서울 노량진에서 옮겨와 있다.
.jpg)
훨씬 규모가 컸던 서계 종가는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영당에 불천위로 모셔진 박정 선생과 그의 아들 박세당 선생의 영정이 게시돼 있다.
43년째 집안을 지키고 있는 김인순 종부가 여러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랑채 마루에서 종손, 종부와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다.
종부의 다실(茶室)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삶을 활기차게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곳이다.
.jpg)
박정 선생에게 지내는 불천위 제사상은 '고임'이 가장 높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jpg)
가장 큰 규모인 불천위 제사는 박정 선생에게 100여 명의 참례객이 함께한 가운데 진행된다.
.jpg)
1년에 여덟 번을 지내는 기제사는 의외로 소박하다.
.jpg)
각 제례에 사용되는 놋그릇은 조상을 모시는 정성의 상징으로, 매번 정성껏 닦는다.
.jpg)
반상의 갯수가 종류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기본적인 진설도는 위와 같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변화의 시간을 보내는 대한민국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고수하되 현재의 사회 흐름 속에서 후속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바깥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사느냐?’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냐?’ ‘이제 좀 그만하는 게 어때요?’라고 하지만 직접 몸으로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이 많기에 쉽게 관두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 전통의 맥을 잇고, 현재를 반영하며, 다수가 공감하는 유교를 지향하는 유교신문은 창간 54주년 특집으로 한국의 대표 종가를 찾아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에게 직접 듣는 시간을 마련한다.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차종손(次宗孫), 차종부(次宗婦)와도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통해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인식 차이 등도 사실적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시사점을 찾아보려 한다.
세상일이 대개 그렇듯 정답은 없지만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열린 자세와 때로는 다투고 갈등하더라도 합의를 지향하는 태도가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가 가진 힘의 원천(源泉)이 될 것이다.
첫 번째 결과물인 이번 인터뷰는 지난 5월25일 오전 11시부터 약 1시간 30분에 걸쳐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 128번길 36에 위치한 ‘서계 박세당 선생 고택(古宅)’에서 진행됐다.
참고로 이 집안의 본관인 반남(潘南)은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이다.
1. 두 분 종손님, 종부님의 소개와 혼인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종부) 옆에 계신 박용우(朴龍雨) 씨는 1952년생으로 반남박씨(潘南朴氏) 서계공파(西溪公派)의 종손이고, 저 김인순(金仁順)은 1954년생으로 종부입니다.
남편은 한국전쟁 와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나 종전 후 여기 의정부 집으로 돌아와 자랐고, 저는 황해도 출신인 부모님이 한국전쟁 때 인천으로 피난 오신 후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시이모님과 친구 어머니께서 여고 동창이셨는데, 어느 날 좋은 신랑감과 신부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셔서 그분들의 소개로 지난 1980년 5월8일에 처음 얼굴을 보고, 6월21일 약혼식 하고, 그해 10월5일에 결혼했습니다.
2. 종손과 종부라는 단어와 의미가 지금은 굉장히 생소한데, 두 분에게는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종손) 글쎄요, 어릴 때 저희 집에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 계셨고 집안 어른들이나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항상 사람들이 북적했습니다. 머슴 살던 이들이 이 공간 안의 땅에 집을 짓고 살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이 독립하여 동네 이웃이 되었지만 말이나 행동이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는 눈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어른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같습니다.
(종부) 1970, 80년대 초에는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이었기에 종가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습니다. 저희 친정도 제사를 많이 지내는 편이었기에 특별히 거부감은 없었는데, 결혼 후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려 가니 ‘종부의 절은 앉아서 못 받는다’고 하면서 맞절을 하시기에 ‘뭔가 다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종가의 제사와 차례는 집안 어른들이 많이 오셔서 모두 준비해주시고, 종손 가족은 참관만 하는 분위기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만 제가 시집왔을 때만 해도 마을 개울에서 다들 모여서 빨래를 하곤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말조심하고, 절대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기에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마을의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데, 거기서 어른들을 만나 뵈니 ‘시집온 지 몇십 년이 지났지만 우리집을 한 번도 못 와봤다’고 하셔서 그 정도로 저희와 상대하기를 어려워하셨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3. 수도권에서 거의 보기 드문 가옥과 정원 등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종가가 자리하게 된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요?
(종손)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 정사 3등 공신이었던 박정(朴炡, 1596-1632) 할아버지에게 지금의 마들역부터 여기 장암동 일대에 이르기까지의 드넓은 땅이 사패지(賜牌地, 국왕이 내려준 토지)로 내려졌고, 그 분의 아드님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 할아버지가 40세부터 이곳에 정착하신 이후 35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켜오고 있습니다.
서계 할아버지는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박정 할아버지와 양주 윤씨(楊州尹氏, ?-1649,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따님) 할머니 사이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첫째 형님은 박세규(朴世圭, ?-1635), 둘째 형님은 박세견(朴世堅, 1619-1683), 셋째 형님은 박세후(朴世垕, 1627-1650, 처남 윤증(尹拯, 1629-1714), 양자(養子) 박태보)였으며, 이름난 재상이었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선생이 처남이었고,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별호(別號) 남계(南溪)) 할아버지의 8촌 형님이셨습니다만 주자의 해석만 따르지 않는 자주적인 경전 주석으로 윤휴(尹鑴, 1617-1680) 선생 등과 함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등 많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 와중에 명필가로 명성을 날렸던 장남 박태유(朴泰維, 1648-1696) 할아버지와 차남 박태보(朴泰輔, 1654-1689)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셨는데, 특히 박태보 할아버지는 1677년(숙종3)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해 승진을 거듭하셨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후궁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하는 과정에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사건)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추진되자 이를 강력반대하는 상소를 주동해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진도로 유배되다 서울 노량진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계집(西溪集)』, 『색경(穡經)』, 『중용주해(中庸註解)』, 『사변록(思辨錄)』 등의 저술을 남긴 서계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집 뒤쪽에 자리한 여러 어른들의 묘소와 유적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4. 종가라고 하면 왠지 다른 면들이 있을 것같은데, 여기만의 독특한 음식이나 문화 등이 있으신지요?
(종부) 보쌈김치와 오이통지, 호박찜 등이 조금 다르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쌈김치는 이북식 양반음식인데, 개성 출신인 시어머니와 황해도 출신인 친정어머니께서 해오신 것을 배워서 하고 있습니다.
오이통지는 보통의 집에서는 칼로 십자 형태를 내고 빨간 양념을 넣어서 만드는데 비해 저희집은 오이의 속을 빼고 시원하고 말갛게 만들어서 여름용 음식으로 먹고 있습니다.
호박찜은 애호박을 파고 그 안에 양념을 넣어서 푹 찐 후 초간장에 떠서 먹는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만들어 먹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사라져 가는 음식일 것입니다.
5. 종가의 제사는 유림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궁금해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1년에 지내는 횟수, 차이점, 준비 방법, 지내는 모습, 예전에 비해 달라진 점 등이 어떻게 되는지요?
(종손) 매년 총 12회의 제사를 지내는데,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보통 지내던 4대(代)를 넘겨서도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불천위를 모시는 것은 가문의 큰 영광으로 인식되었고, 나라와 지역에서도 권위가 인정되었다) 제사와 묘제(墓祭, 산소에게 지내는 제사) 등 두 번의 큰 제사와 여덟 번의 기제사(忌祭祀, 고인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 설과 추석 등 두 번의 차례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불천위 제사와 묘제는 일가 친척들이 모여 크게 지내고 제수(祭需)도 ‘고임’이라고 해서 높게 쌓아서 올리고, 기제사와 명절 차례는 저희 직계 위주로 작게 차리되 추석 차례 때는 스물일곱 분을 모시는데 시집왔을 때는 묘제의 의미를 담아 열한 분 조상의 산소로 직접 가서 일일이 지냈으나 지금은 그렇게는 못하고 서계 할아버지와 백석(白石, 서계 선생의 장남 박태유) 할아버지 산소에만 묘제를 지냅니다.
(종부) 불천위 제사는 영당(影堂)에 모신 박정, 박세당 할아버지 두 분께만 지내는데, 반남박씨 각 파(派) 문중에서 사람들이 오시니 손님들이 많고, 제수도 한 자(尺, 약 30.3cm) 또는 떡은 한 말을 쌓습니다. 그래서 밤이나 대추는 쌓는데 최소 3시간 정도씩은 필요하니 당일 하루만으로는 준비할 수가 없어서 1주일 전부터 상하지 않는 제수를 중심으로 ‘고임’을 시작하고 손으로 옮길 때도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묘제를 지낼 때는 손 대신 교자(轎子, 가마)에 실어서 옮기기 때문에 깨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더욱 신경써서 쌓아야 하고, 교자도 앞 사람은 키가 좀 작고 뒷 사람은 키가 좀 커야 이동하며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오랫동안 지내와서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디에 놓는지를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니 제사 지낼 때 상에 표시를 해놓습니다만 큰아들은 이미 다 외우고 있습니다.
제수를 차릴 때 저희 집안은 여성들이 모든 일을 하고 있고, 남성들은 관여하지 않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비해 차릴 때의 ‘고임’ 높이는 낮아졌는데, 교자에 실어서 옮길 때 너무 무거워 양쪽에서 드는 남성들이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올리는 종류 중에서는 어적(魚炙)만 달라졌습니다. 시집올 당시에 사용했던 숭어가 비린내가 심해서 동태로 바꿨는데 살이 약해서 부러지곤 해서 그 후에는 조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시집왔을 때와 똑같습니다.
6. 여성들의 제례 참여 여부는 어떻습니까? 다른 지역에서는 제례가 시작되면 여성은 접근도 못하게 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종손) 여성들도 제사에 참여하고 절하는 걸 금지하지는 않습니다만 큰 제사에는 최소 80~90명 이상의 손님들이 오시고, 제사 후 음식을 접대해야 하니 그걸 준비하느라 현실적으로는 나이든 어른들 외에 보통의 여성들이 진행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부) 부모님 제사 때는 부부가 같이 잔을 올리며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종손이, 어머니께는 제가 하며 생전 못다했던 효도를 잠시나마 합니다.
7. 제례를 지내는 시간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전통적인 방식처럼 한밤 중이나 새벽에 하시는지요?
(종손) 옛날에는 밤에 모셨던 불천위 제사를 제가 기억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오전 11시에 시작해서 30분 정도 소요하고 있습니다.
기제사는 자시(子時, 오후 11시-오전 1시)에 지내다가 지금은 해가 진 후인 유시(酉時, 오후 5-7시)나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해가 기니 오후 8, 9시쯤 하고 겨울에는 해가 짧으니 오후 7시 정도에 모십니다.
설, 추석 명절 차례는 다른 집들처럼 아침에 지냅니다.
8. 두 분이 살아계실 때는 지금 해오던 방법대로 하시겠지만 자녀들에게 넘어갈 때의 형태나 방법 등에 대해 논의하거나 합의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종손) 그렇게 해보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그대로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종부)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니 ‘하겠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 생전에 모시는 제사는 저희의 몫이니 지금처럼 할 것이고, 저희가 없을 때는 큰며느리의 몫이니 본인이 줄이고 싶으면 줄일 것이고 하기 싫으면 중단할 것이니 그것까지 저희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우러나서 해야지, 강요한다고 그대로 될까요?
9. 저출산과 아들·딸에 대한 인식변화 등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제례 등에 대한 갈등도 많고,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할 지 생각해온 부분들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종부) 평소 못 보던 일가 친척들이 방문하여 가족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되므로 저는 제사를 집안의 구심점으로 봅니다.
주변 사람들이 가족들과 마음과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으로 상의를 해오곤 하는데,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해봐야 득(得)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毒)이 되는 법이고 형편에 맞춰서 물 한 사발을 올려도 정성만 있으면 되지 무조건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차린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봅니다.
(종손) 형식만 지나치게 치중하거나 서로에 대한 갈등만 만들기보다는 좋은 마음, 기쁜 마음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세인 것 같습니다. 음복(飮福)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사 지낸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조상의 음덕(蔭德)을 받으라는 좋은 뜻이지 않습니까? 우러나서 해야 맞고, 그래야 복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과정들이 이어져야 가족들에게도 긍정적인 의미의 시간이 된다고 봅니다.
10. 다른 집안의 종가에 계신 종손, 종부와 교류나 모임을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들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 등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종손) 옛날에는 경북 안동 등에서 했었는데 생각이 차이가 있고 하니 지금은 해주오씨(海州吳氏) 추탄공파(楸灘公派) 집안 정도만 교류합니다.
각 집안마다 지내는 방식과 준비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니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해야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닌 것같습니다.
(종부) 지금은 문중(門中) 차원에서 준비하고, 종손은 그곳에 참석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저희처럼 종손, 종부가 직접 준비하는 곳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과정이 고생스럽고, 비용도 많이 들거든요.
11. 앞서 매년 총 12회의 제례를 지낸다고 하셨는데, 각 제례마다 어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십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종가에서 부담하시는지요?
(종부) 불천위 제사와 묘제 등 제수도 잘 갖추고, 손님들도 100명 가까이 오시는 경우에는 최소 1,000만원 정도는 지출됩니다. 여덟 번의 기제사와 설, 추석 명절은 가족 중심이니 100만원 정도 쓰는 것같습니다.
이때 비용은 기본적으로 저희가 쓰고, 불천위 제사나 묘제 때는 보태라고 어른들이 주시는 금액이 100여 만원 정도인데 저희도 다른 집안의 제사에 참석하면 일정 금액을 드리니 편한 말로 품앗이 하는 셈입니다.
(종손) 옛날 어른들은 강원도 원주에서도 참기름 한 병, 계란 한 판을 들고 3일을 걸어오기도 하셨는데,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자손으로서 조상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여기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서계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들이 많이 살아 계셔서 참석하는 분들도 상당했는데, 이제는 직계 자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다른 파의 제사에 서로 오가며 참석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12. 정부 관계자나 연구자 등이 종가의 제례를 참관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종부) 예전에는 교환학생들이나 공무원들도 많이 왔습니다만 지금은 간혹 연락주고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3. 종가에 대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있습니까? 있다면 내용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종손) 옛날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관에서 지원해 사당 등에서 지내는 경우들을 보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초헌관(初獻官)을 종손이 맡지 못하고 결국 관의 장(長)이 매번 하면서 자손이 뒷전이 되니 그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참여자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14. 이곳 종가를 문화재 관람이나 웨딩 장소로 대여하기도 했던 것같은데,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지요?
(종부) 원래는 개방을 해서 문화재를 관람하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매일 상주해 계시기도 곤란하고 쓰레기 무단투기, 정원 훼손, 물건 분실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해 지금은 의정부시청에서 미리 사전약속을 하고 문화관광해설사를 동행하여 방문했을 때만 개방해 드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옛날 같지 않고 지금은 세상이 험악해지니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 보호 차원에서도 전면 개방은 어렵습니다.
(종손) 사전에 미리 연락하여 저희가 동의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 여러 갈래이다 보니 ‘여기는 사유지이므로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시는 것을 자제해 주십시오’라고 표시해둬도 종종 등산객이나 외부인들이 갑자기 나타나곤 해서 의외로 신경이 쓰입니다.
잔디밭 정원이 넓고 예뻐서 지인 몇 분들에게 자제의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해드렸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신청만 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라고 잘못 알려진 것같습니다만 몇 백 명이 방문하는 결혼식일수록 더욱 감안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저희 가족들이 함께 의논해서 수용여부를 정하고 있습니다.
15. 한국 전통문화와 유교 종단의 구심점인 성균관에서 지난해 추석 명절부터 올해 설 명절까지 차례 간소화 등에 대한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국민들과 유림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두 분께서도 여기에 대한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종손) 호적제와 동성동본(同姓同本) 혼인금지 폐지 등을 정부와 법원이 앞장서서 진행해 온 모습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이면 사촌(四寸)끼리도 결혼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각 나라의 전통은 어느 정도 유지를 해야 하는데, 요즘은 서구 문명의 발달과 인성교육의 부재 때문인지 그런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부모-자식 사이의 이상한 사건과 이야기 등을 접하면 한탄스럽습니다.
(종부) 내 몫을 내가, 우리가 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 같습니다. 형편이 되는대로, 정성껏 봉행하고 감당하면 됩니다. 절대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균관에서 많은 전문가들, 국민들과 얘기 나누고 좋은 방법을 찾으실 텐데 예라는 것이 너무 고리타분해서도 안 되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는 것도 맞지 않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나가셨으면 합니다.
조윤아 차종부가 본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jpg)
보쌈김치의 재료는 위와 같은 것들로 사용한다.
.jpg)
오이통지는 방송이나 전시회 등에서도 소개되곤 했다.
종손, 종부, 차종부가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다.
서로 닮은 가족들은 수령 410년 된 은행나무처럼 앞으로도 집안과 전통을 지켜나가겠다고 말한다.
종부, 종손의 역할을 이어갈 차종손(次宗孫), 차종부(次宗婦)의 생각도 궁금해졌는데, 마침 큰며느리인 차종부가 집안에 계셔서 따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16.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차종손, 차종부 두 분의 소개와 결혼 후 접한 종가의 모습이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차종부) 남편 박천경(朴天敬) 씨는 1981년생으로 집안의 큰아들이고, 저 조윤아(趙允我)는 1984년생으로 큰며느리입니다. 1년 정도의 연애를 거쳐 지난 2012년에 여기 집 안의 마당에서 전통혼례로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매일 거듭되었지만 지금은 두 아이도 생겼고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 하며 시부모님과도 서로를 알아가면서 크게 불편함이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같습니다.
제사가 많은 것은 저보다 오히려 주변 분들이 ‘1년에 열두 번 제사를 어떻게 지내냐?’며 더 놀라워하고 걱정해주시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부모님께서 체계를 잘 잡아놓으셨고 해야할 게 명확하므로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친정에서도 많은 제사를 지내셔서 ‘원래 이렇게 하나보다’라고 생각했고, 결혼 후 시댁에 와보니 많긴 한데 가을에 몰려 있어서 할만했으나 놋제기 닦는 게 힘들었고 지금도 잘 안 됩니다. 기제사에 올리는 제사의 가짓수는 오히려 친정보다 적습니다.
결혼 전에 잠깐했던 회사 생활에서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너무 힘들곤 했는데 여기는 노력해서 잘 지내고 난 후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인정도 받으니 오히려 성취감 같은 것도 느낍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많아서 어머니께 계속 배우고 닦아야 할 것같습니다.
17. 아직 멀었다는 얘기를 거듭 하시는 것 같은데, 100%로 비율을 따지면 본인 생각에 집안의 각종 제사를 순서나 방법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차종부) 결혼 후 11년째 해오고 있는데, 아직 전체를 다 파악하는 단계는 오직 어머님만 가능하고 저는 부분적인 면만 하는데 꼭 빠뜨리는 것이 있어서 잘해봐야 20% 정도 아는 것 같습니다.
18.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느 위치에 올려야 한다는 진설도(陳設圖)는 머리 속에 있으신가요?
(차종부) 예, 그건 있습니다. 다만 음식만 보고, 전체적인 흐름이나 참여하신 분들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 같은 건 너무 부족합니다. 음식은 사진으로 많이 촬영해뒀고, 어떻게 고임을 하는지도 사진으로 보관하고 있어서 기억하기가 조금 낫습니다.
19. 앞으로 시부모님들이 해오셨던 역할과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지, 본인이 주도할 때는 변화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차종부) 시부모님이 해오신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목표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으로 준비하며 후에 정리하는 과정을 빨리 마무리할 것인가를 한 번씩 생각하고 있고, 특히 주방에서 제사 지내는 곳까지 옮기는 동선을 잘 맞출 것인가가 고민이긴 합니다.
묘제 같은 경우에는 산소까지 가마꾼이 가마를 지고 옮기기 전에 모든 음식을 일일이 랩으로 싸도 쏟아질까 조마조마하며 하는데, 제발 좀 다른 방식을 찾았으면 싶습니다. 매번 음식이 쏟아질 걱정, 가마꾼을 구할 걱정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데 차로 이동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하나씩 손으로 옮길 수도 없어서 예전 방식대로 가마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대한 따뜻하고 안전하게 옮기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음식의 종류나 진설을 바꾸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불편한 것들은 조금씩 개선이 필요하므로 남편과 계속 얘기 중입니다.
20. 전국적으로 종가가 더 이상 머무를 사람이 없어서 빈집이나 폐허화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차종손, 차종부 두 분은 부모님이 안 계셔도 여기를 지킬 계획이십니까?
(차종부) 예,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미 결혼 후부터 같이 살고 있고, 세월이 지나 어른들이 계시지 않아도 계속 살 것입니다. 욕심에는 아이들까지도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집안의 추억들이 있으면 어른이 되어도 떠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저희 부부는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인터뷰 종료 후 박용우 종손, 김인순 종부, 조윤아 차종부와 영당에 모셔진 박정, 박세당 선생의 영정과 제기, 교자(가마) 등 언급됐던 장소와 도구들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일반적인 집에서는 전혀 또는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는 얼굴 표정이 환하고 밝았다.
사랑채 마루에서, 그리고 집 앞의 410년 수령(樹齡)을 가진 은행나무에서 사진 촬영을 진행할 때는 ‘세 사람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실제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밖에 나가면 모녀 사이로 아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도 지금의 길을 함께 가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김인순 종부는 ‘어제 종합편성채널 MBN에서 강석우 씨 등과 함께 와서 촬영하고 갔는데, 오는 6월3일 오후 5시에 「강석우의 종점여행 시즌2」 프로그램에서 방송될 예정이다’라고 살짝 귀띔했다.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