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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서진(徐晉) 선생 묘향(墓享)에 많은 후손들이 참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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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龜溪) 서침(徐沉) 선생의 선행은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등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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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대종손이었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의 묘소이다.
서창덕(徐彰德) 제27대 대종손과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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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님(제25대 대종손), 할머님, 아버님(제26대 대종손)이 1953년에 촬영한 가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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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어느 행사장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할머니와 사진 촬영 당시 현 대종손은 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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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동산동 옛 구암서원에서 아버님(제26대 대종손), 누나, 현 대종손이 즐거운 표정으로 촬영했다.

1996년 추석때 TBC대구방송에서 '종가의 명절모습'을 취재하러 와서 온가족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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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의 낙재공 불천위 제사 모습으로,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증된 『낙재집』 책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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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재 서사원 선생 불천위 개정 진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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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서의 제수는 옛날에 비해 점점 간소화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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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의 젊은이' 서창덕 대종손은 "전통을 보존하되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가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 전통의 맥을 잇고, 현재를 반영하며, 다수가 공감하는 유교를 지향하는 유교신문이 창간 54주년 특집으로 한국의 대표 종가를 찾아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에게 직접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두 번째 결과물인 이번 인터뷰는 지난 6월27일 오후 2시 30분부터 약 2시간에 걸쳐 대구지역의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진행됐다. 원래의 종가는 재개발 예정구역에 위치해 촬영이 어려울 정도의 상태라고 대종손(大宗孫)은 양해를 구했다.
참고로 이 집안의 본관인 달성(達城)은 지금 대구광역시의 옛 지명이다.
1. 본인과 집안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달성서씨 제27대 대종손 서창덕(徐彰德)으로 1986년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서른 여덟, 6월28일부터 시행되는 만 나이로는 서른 일곱입니다.
달성서씨는 13세기경 서진(徐晉) 할아버님이 고려 왕실로부터 대구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정착한 후 관향(貫鄕)으로 해온 대구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입니다.
제5대 대종손이셨던 구계(龜溪) 서침(徐沉, 1360?-?) 할아버님께서 현재의 달성공원 일대의 소유지를 국가에서 내놓을 것을 요청하자 두터운 상과 세록(世祿)을 사양하고 대신 대구 지역의 환곡 이자를 1석(石, 섬)마다 5되를 감면해 주기를 상소하고 이를 당시 세종대왕이 받아들여(『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10년(1734) 9월 21일 계사(癸巳),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3」 조적(糶糴) 환모견감(還耗蠲減),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참조) 조선 말까지 그 혜택이 이어졌는데, 이에 감복한 대구부민들이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창건해 할아버님의 뜻을 기렸습니다.
제12대 대종손이셨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 할아버님은 조선 후기 대구지역을 대표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지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셨고, 특히 1592년 4월12일부터 1595년 9월20일까지 3년 4개월 26일 동안의 의병 결성과정부터 활동상까지를 생생하게 담은 『낙재선생일기』를 남겨 대구 지역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2. 조금 전에 대종손(大宗孫)이라고 하셨는데, 일반인들에게 굉장히 생소한 표현입니다. 저 역시 말로만 듣던 대종손을 직접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가장 간략하게 표현하면 ‘한 집안의 공인(公人)’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만한 그릇이나 자질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여러 과정과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현명하고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종손(宗孫)은 대종손(大宗孫)만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고, 나머지 지파(支派)에서는 장손(長孫), 주손(胄孫)이라고 불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파에서도 종손이라고 통칭(通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종손은 집안의 본류이므로 무슨 파(派)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달성서씨 제 몇 대 대종손 아무개’라고 표현합니다.
저희집도 그랬는데 이상하게 대종손 집안에서는 자손이 귀하고, 절손(絶孫)되어 집안 어른들과 지역사회의 유림들이 협의하여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많았으며, 대종손은 집안을 지키기 위해 벼슬을 못하게 하여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들 중에 대종손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정도로 대종손은 한 집안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지역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이 되었으므로 할아버지가 계실 때까지는 대구, 경북지역의 대종손들과 교류도 잦으셨고 대단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길사(吉祀)’라고 하여 지역민들과 친인척 및 유림 어른들을 초빙해 대례복(大禮服)을 입은 대종손과 대종부(大宗婦)가 종가에 있는 사당에 고유하고, 이제부터 공식적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행사인 ‘종손인계식’을 해야 하는데 저는 아직 미혼이라 정식으로 그 행사를 열지 못했고, 집안 어른들이 ‘빨리 결혼하라’는 성화가 대단하시지만 인연이라는 게 쉽게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분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3. 젊은 나이에 대종손이 되셨다는 것은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계시지 않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어떤 분들이셨고, 그러면 종부는 누가 맡고 계신지요?
제25대 대종손이셨던 할아버님 성함은 서세교(徐世敎)이셨고 1925년에 태어나 지난 2003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님 성함은 이명호(李明鎬)이신데, 1930년에 경북 성주 한개마을의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안에서 태어나 시집오신 후 73년 동안 종부로서의 삶을 살아오셨고 지금은 몸이 불편하셔서 예전처럼 제사 준비 등은 하지 못하시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말 없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제26대 대종손이셨던 아버님은 성함이 서보현(徐輔賢)이신데, 1951년에 태어나 지난 2005년에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님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님, 할머님이 계시던 종가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마냥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들이 영원히 계속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질 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님이 오랫동안 대종손으로 사셨고, 아버님도 그러실 것이고, 저는 아주 뒤늦게 그 역할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003년과 2005년에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시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도 않고 그 당시는 너무 젊어서 상황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해씩 지내고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어른들의 부재를 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4. 대종손 혹은 종손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모임 같은 곳에 참여하고 계신지요?
대구를 대표하는 주요 스물 네 집안 문중의 모임인 구향회(邱鄕會, 회장 이규옥)가 1983년 1월29일 창립되어 정기적인 모임을 하고 있는데, 대구향교 유림회관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등 대구향교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과도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5. 종가가 지금 위치에 자리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지금 위치한 종가는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대구 남산동에 위치하던 종가가 1950년에 옛 구암서원 자리인 동산동 부지로 옮겨와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6. 종가에만 있던 독특한 문화나 음식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특별한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음식을 나르는 등의 제수 준비를 같이 했고, 지금은 숙부님(서보환(徐輔焕, 1958년생))의 전적인 관심과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참여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할머니가 습관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 같습니다. 종가라고, 종손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말고, 너희 때는 남자도 직접 음식도 할 줄 알고 장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종가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이 ‘너희는 그런 집안이니까!’ 또는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게 아니고, 하지도 않을 거야’라며 가부장적 권위가 굉장히 강하다고 알기 쉬운데, 저희 집안은 그 누구보다 그런 편견과 모습을 없애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너희 대에는 그렇게 사는 것을 깨뜨리라는 방식을 원하셨던 것같습니다.
할머니가 성주 한개마을 출신이신데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반촌(班村) 중의 반촌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개방적인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7. 일반적으로 종가라고 하면 지내지 않는 달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제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대종손께서는 1년에 몇 번의 제사를 지내시는지요?
불천위 제사 1회, 기제사 4회, 시제 4회, 명절 2회 등 총 11회입니다.
원래는 4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각각 지내서 기제사도 8회였으니 총 15회였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합해 지금 정도로 줄었다고 합니다.
불천위 제사도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을 따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낙재공 할아버님 불천위는 할아버님 기일에 두 분을 합사(合祀)해서 지내므로 1회에 그칩니다. 옛날에는 2회였을 텐데, 자손들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어른들이 언젠가부터 합하신 것 같습니다.
8. 집안에 내려오는 진설도가 있으신지요? 그리고 진설도에 따라 실제로 제례를 봉행하는지요?
예, 있습니다.
다만 불천위 제사에서는 예부터 내려온 진설도에 따라 가짓수도 많고 좀 화려하게 보이지만 개정 진설도에 나타난 것처럼 많이 간소화했습니다.
9. 예전과 비교해서 지금의 제례에서 달라진 부분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반드시 지키거나 올려야 할 제수가 있습니까?
먼저 제수의 종류나 가짓수는 앞서 얘기 드린 것처럼 현대에 들어와 많이 간소화됐습니다.
꼭 올려야 할 제수는 저희 집안만의 특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지역적인 분위기인 것 같은데, 대표적으로 영남지방에서는 제사상에 ‘돔배기’라고 부르는 상어고기와 말린 홍합을 올리는 문화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모습입니다.
10. 제사를 지낼 때 대종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주로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을 맡는데, 특히 불천위 제사는 반드시 대종손이 합니다.
11. 여성들도 제사에 참례를 하십니까?
보편적으로 기제사에는 여성들도 참여하고 있으므로 제 기억에도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가 기제사에서 잔을 올리곤 하셨습니다. 가풍(家風)이나 성 역할 분배라기보다는 같은 가문의 일원이자 며느리가 모시던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천위 제사는 옛 방식대로 남성들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12. 제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제일 중점을 두는 부분은 당연히 제사를 모시는 어른에 대해서이지만 참여하기 위해 오시는 손님들의 규모나 상황을 고려하여 제수를 준비하고, 배려하는 추세입니다.
13. 시제와 묘제를 지내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 지요?
일반적으로 지내는 제사들과 크게 상이하지는 않습니다만 상황에 따라 초빙되는 내빈, 손님들에 따라 분정할 때 헌관의 역할을 나눕니다.
다른 집안에서는 합동으로 진행한다고도 합니다만 아직까지 저희 집안에서는 각기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14.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소요되는 비용은 어느 정도로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준비과정과 비용은 종가에서 모두 부담하십니까?
종류에 따라 다르고 어디까지를 예산의 범위에 포함시킬 지에 따라 달라지긴 합니다만 불천위 제사는 대략 500만원 가량, 기제사는 그보다 많이 축소해서 60~70만원 정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묘제나 불천위 등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은 경우에는 비용도 따라서 증가됩니다.
기제사는 집안 개인 비용으로 하고, 시제나 불천위 등은 조금씩 찬조를 받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부분은 역시 저희 대종가에서 대부분 부담하고 있습니다.
15. 제사를 지내는 시간과 음식의 양, 종류는 어떻게 차이가 있습니까?
기제사는 20분 내외로 짧게 진행되고, 묘제나 불천위는 30분 이상 1시간 이내로 소요가 되는 것같습니다.
예전에는 초청한 손님들이 계시면 절차를 밟아가기도 했습니다만 지금 기제사는 사전에 상의나 분정하는 절차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천위는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옛날에는 300명 이상이 참석할 정도로 대단해서 온 집안과 지역에서 합심하여 진행됐다고 하는데, 현재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약소해졌습니다.
제수의 높이와 종류도 불천위는 압도적으로 높고 많았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낮아져 이제는 기제사 등과 비교해서 조금 더 높고 품질이 좋은 품목으로 준비하려 신경쓰고 있습니다.
16.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는데, 문중의 제례도 변화할 부분들이 있다면 어느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시대가 원하는 삶도 있지만 고유의 제례는 지켜져야할 부분들이 있다고 봅니다. 고유한 형태대로 이어져야 가치가 남아있지 않을까요?
불천위든, 묘제든, 기제사든 변화해야할 부분들이 있지만 적어도 저는 지켜야 할 부분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17. 제사는 꼭 아들만 지내야 합니까? 외동딸이 제주(祭主)가 되어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이십니까?
글쎄요, 집안의 어느 여성이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고 싶다면 누가 말리겠습니까만 그런 책임과 역할을 하려는 인물이 계실지 모르겠고 만약 있다면 말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할의 문제인지, 권한의 문제인지 살펴봐야 할 부분은 있습니다.
없던 제사를 다시 만드는 부분도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흔한 경우는 아닐 것 같습니다.
18. 제사 장소를 집이 아닌 여행지 등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살아가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질문에서 제시한 내용은 특수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사실 장소나 격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고, 일반적인 생활 거처를 벗어나야 한다면 위패나 신위는 모셔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19. 제사를 지내면서 요즘 음식인 케이크, 피자 등을 올리는 움직임도 많은데, 그런 종류의 제수를 올려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향후 배우자와 자녀들이 변화를 요구할 때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직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음식을 제대로 준비할만한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집안 남자들이 제수를 준비하다보니 제사닭을 주문해서 사용해 본 적은 있습니다.
미래의 가족들이 요구하면 대체음식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기존 상차림에서 더 간소화를 추진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제가 했던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싶지 않고, 여의치 않으면 제가 다 할 생각입니다.
20. 성균관에서는 문중에서 지켜내고 있는 전통제례를 무형문화재급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지켜나가고자 함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대중에게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인지에 따라 구분이 될텐데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일반인들이 다가오기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도적으로, 행정적으로 공론화시키는 노력과 시도는 의미 있는 좋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만 극소수에 해당하는 특권 계층만의 문화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고정관념 없이 다가올 수 있는 문화로 각인되어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대중들에게 반감을 불러올 요소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런 점들을 잘 고려해서 ‘왜 이런 전통문화를 지켜가야 하는지’에 대해 대중들이 설득될 수 있게 진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21. 달성서씨 대종손으로서의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대단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로서 시각과 계획을 밝혀보자면, 이런 좋은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쇄신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조금은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방방송사에서 저희 집에 취재를 나오기도 했고, 성씨를 대상으로 한 언론사의 방문은 많았습니다만 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는 처음이라 원래 생각했던 것만큼 잘 표현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알아서 잘 정리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요즘 시대에도 이런 생각과 사고(思考)를 가진 젊은이가 있구나!’라는 놀라움과 함께 집안의 분위기와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대종손을 만들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그 과정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 모이며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가수 임재범님이 부른 노래 '사랑'의 노랫말 '사랑...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지금껏 살아서'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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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이명호(李明鎬) 할머니의 '73년 종부 인생'은 서창덕 대종손에게 가장 큰 가르침이자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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