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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창간 54주년 특집] 한국의 대표 종가를 찾아 종손·종부에게 ‘직접’ 듣는다 ③원주변씨(原州邊氏) 동호공파(東湖公派) 간재종가(簡齋宗家)

"종가는 사명감을 가지고 종가답게, 일반 가정은 형편껏 합리적으로 하면 될 것같습니다"

 

 

조상을 받들고 기리는 일에 문중이 함께 하고 있다.

 


 

 

원주변씨 간재종택은 경북 안동의 대표적인 종가이다.

 


 

 

변성렬 종손(오른쪽)과 주영숙 종부(왼쪽)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2018년 변성렬 종손이 한국감정원 부원장을 퇴직할 당시 많은 임직원들이 함께했다.

 


 

 

매년 8월15일 전후의 주말에 열리는 '열친회'는 집안의 화목을 상징한다.

 


 

 

11남매, 사촌, 외가의 가족들까지 모이는 열친회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다.

 


 

 

명절 차례 때는 사당에 직접 상을 차리고 예를 표한다.

 


 

 

기제사는 간소하되 정성을 가득 담아 지낸다.

 


 

 

지금도 진설도에 따라 지내려고 노력한다.

 


 

 

초헌관인 종손에 이어 종부가 아헌관을 맡아 잔을 올리는 모습은 집안의 오랜 전통이다.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주영숙 종부(맨오른쪽)는 다른 여덟 종부들과 '종가 전통주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 MBC PD수첩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생각을 밝혔다.(출처 : PD수첩 유튜브 영상)

 


 

 

제사가 없는 달이면 부부가 같이 여행을 하곤 하는데, 남미 마추픽추 유적에도 다녀왔다.

 


 

 

변성렬 종손과 주영숙 종부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집안과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전통의 맥을 잇고, 현재를 반영하며, 다수가 공감하는 유교를 지향하는 유교신문이 창간 54주년 특집으로 한국의 대표 종가를 찾아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에게 직접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반남박씨 서계종가, 달성서씨 대종가에 이어 세 번째 결과물인 이번 인터뷰는 지난 6월28일 오후 1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에 위치한 원주변씨 간재종택(簡齋宗宅)’에서 진행됐다.

 


1. 종손, 종부 두 분과 집안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종손) 원주변씨 동호공파 간재종가의 종손인 저는 이름이 변성렬(邊聖烈)이고, 1960년생입니다. 입향조로부터는 15, 간재 할아버님으로부터는 11대 종손이며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 속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으며, 대구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한국감정원 부원장에서 퇴직한 후 고향으로 들어온 지 15년 되었습니다. 완전히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객지에 왔다 갔다하며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 이름은 주영숙(朱英淑)으로 1962년생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이며, 주호영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대구 수성갑, 5선 국회의원)의 동생입니다.

 

1989년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집안 어른들 소개로 대구에 내려와 지금의 아내와 선을 보고 결혼 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생활했는데, 아무래도 장손이다 보니 종가에 자주 내려오는 와중에 아내가 처음에는 엄청난 규모의 집과 어른들 때문에 깜짝 놀랐었는데 다행히 고맙게도 적응을 잘 해서 어른들께 잘 배우더군요.

 

저희 집안은 지금으로부터 약 550년 전인 조선 중기에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터를 닦은 조상) 변광(邊廣) 할아버님이 이곳 안동 금제(金提)에 살고 계시던 안동권씨 권철경(權哲經) 할아버님의 사위가 되어 들어오면서 기틀을 마련하셨고, 그분의 장남 동호공 변영청(邊永淸) 할아버님의 호를 따서 파의 이름을 정했으며, 동호공 할아버님의 둘째 손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1660) 할아버님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충()에 대한 명성을 얻었고, 효자로서도 소문나 돌아가신 후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왕으로부터 정문(旌門,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붉은 문)과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받으며 효()에 대한 부분도 입증되어 불천위(不遷位)가 되면서 가문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터에 450년 정도 살아왔으며, 각종 전쟁의 와중에서도 크게 불타거나 하지 않고 다행히 보존되어 왔습니다.

 

2. 어리고 젊을 때 봤던 종가에 대한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종손) 기본적으로 종가 행사가 있으면 주변의 지손들도 모두 참여해 같이 일을 하고 그랬습니다. 명절이 되면 몇백 명씩 오셨고, 지금도 명절이 되면 서울 등 멀리 떨어진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오십니다.

 

집에 오는 분들이 많아서 우리 식구끼리 식사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사랑방에 항상 손님들이 계셨으며, 오랫동안 묵어가는 과객(過客)들이 한 달씩 묵어가기도 하셨는데 아마 전혀 모르는 이들은 아니고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으로 서로 알고 지냈던 분들이었던 것같습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그분들이 전국적으로 다니곤 하며 아는 집안들이 많다 보니 중매도 하셨다고 합니다.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받듦)’접빈객(接賓客, 손님을 접대함)’이 종가 최고의 일이었는데, 거기서 파생하여 노잣돈 문화가 생긴 것같고, 옛날에도 문중이나 서원에서 큰 행사를 하면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행자(行資)’라고 하여 노잣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동에서는 누군가 세상을 떠나셔서 상가에 문상을 오면 1만원이나 2만원을 미리 봉투에 넣어뒀다가 드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결혼식에 오는 분들에게 1만원씩 차비를 드리는 모습과 유사한 것이지요.

 

(한국고전종합DB 등의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면, ‘행자(行資)’라는 표현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만기요람등의 국가기록물과 각종 문집에 수없이 나올 정도로 많이 언급되지만 요즘 자주 사용하는 거마비(車馬費)’라는 표현은 그런 기록들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3. 안동 지역은 특히 종가가 많이 보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황이 어떻게 되는지요?

 

(종손) 마흔 다섯 집 정도가 남아 있는데 진성이씨는 두루종가(두루마을에 위치한 진성이씨 대종가), 노송정(老松亭, 퇴계 이황 선생의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선생이 처음 입향함, 퇴계 선생의 탄생지, 온혜파 종택(溫惠派 宗宅)으로 불림), 퇴계종가 등 많이 있고, 의성김씨도 내앞종가(내앞마을에 있는 의성김씨 대종가), 학봉종가가 있으며, 풍산류씨는 하회마을에 겸암종가(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선생의 종가,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름)와 서애종가(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종가, 충효당(忠孝堂)이라고 부름)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저희 마을에도 네 집이 있는데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1412-1456, 본관 진주) 선생 종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본관 의성) 선생 종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 본관 안동) 선생 종가, 저희 종가 이렇게 있습니다.

 

(참고로 기호지방(畿湖地方, 지금의 수도권 및 충청도 지역)에 종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1894년 시작된 갑오동학농민란(甲午東學農民亂) 때 충남 홍성 이남의 양반집들이 많이 불태워졌고, 나머지 양반집이나 종가들도 한국전쟁 때 연합군 및 인민군의 주둔지로 사용되며 폭격, 포격 등으로 소실됐다는 의견이 유력하게 보인다)

 

4. 그러면 말씀하신 마흔 다섯 집은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거주하고 계십니까?

 

(종손) , 누가 있든 다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외지에 나간 경우도 있지만 제사를 모시기 위해 나이 들면 모두 들어옵니다. 제사를 모시지 않으면 종가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얼마 전에도 종손이 돌아가신 곳들이 몇 집안 있었는데, 차종손들이 모두 종손을 이어받아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는 종손은 조카나 6촌을 양자로 들이기도 하는 등 대를 잇기 위한 준비를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양자를 들이는 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뿐만 아니라 지역의 관련되고 영향력 있는 어른들의 의견을 모으고 결정한 후 재가를 받아 확정 짓습니다. 초대장을 보내 큰 잔치를 열고, 대례복을 입고 사당에 고유하며 공식적으로 그 집안의 차종손임을 공표합니다.

 

또한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므로 차종손이 정해짐으로 인해 5대조 위패를 산소에 매안(埋安, 신주를 묻음)하면서 길사(吉祀)라는 의례를 크게 지내며 불천위를 포함한 조상들께 고합니다. 직접 보시면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갖춰서 진행합니다.

 

5. 종손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계신지요?

 

(종손) 영종회(嶺宗會, 회장 강신중 진주강씨 봉화 도은(陶隱)종택 종손)라고 하여 의성김씨(義城金氏), 진성이씨(眞城李氏), 풍산류씨(豊山柳氏), 광산김씨(光山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안동장씨(安東張氏), 서흥김씨(瑞興金氏) 등 대구, 경북지역의 불천위 종손 92인이 지난 2012331일 경북 안동시 안동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모임을 결성했고, 지금은 117개 종가가 참여해 종가문화 보존, 유교문화 진작, 도덕사회 구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다른 곳과 달리 대수(代數)가 오래됐다고 종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당과 불천위 제사가 있어야 종손으로 인정하고, 불천위 제사가 없는 곳 등의 장손은 주손(胄孫) 등으로 호칭합니다. 따라서 영종회에 가입하려면 사당과 불천위 제사 등이 다른 집안에서도 공인(公認)되어야 가능합니다.

 

전에는 집안과 종손 간의 교류가 자연스러웠으므로 굳이 모임을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기적인 만남의 필요성이 부각되어 영남지역 종손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명칭이 정해진 것으로 압니다. 저도 기획·홍보 부회장을 맡아 미력이나마 봉사하고 있습니다.

 

(종부) 이쪽 지역에서는 경부회(慶婦會, 회장 조동임 안동권씨 예천 춘우재(春雨齋)고택 종부)’라고 하여 경상북도 종부들의 모임이 따로 있고, 제가 총무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근의 아홉 집안 종부들이 모여 각 집안에서 내려온 전통주를 대중화해서 전국민에게 선보이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차종손들의 모임인 영맥회(嶺脈會, 회장 최건 경주최씨 충의당(忠義堂)종택 차종손)’도 꾸려져 있습니다.

 

 

6. 종가에 대한 국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종손) 전혀 없습니다. 문화재인 건물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에서 다른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예산을 들여 보수 및 관리를 진행하고, 종가라고 해서 해왔거나 하고있는 건 없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문중끼리 종가나 산소에 딸린 위토(位土, 제사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논과 밭)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제사를 모시고, 문중을 유지합니다.

 

임진왜란, 한국전쟁 때 불타서 사라진 종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국가 예산이 투입된 곳은 몇집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도 종가 자체에 대한 지원이라기보다는 문화재 보존 또는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된 것입니다.

 

종가문화보존회를 만들어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종가문화를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사단법인을 만들어보려는 활동도 있었으나 반대하는 종가가 많아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7. 이곳 종가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나 음식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종손) 인터넷에 간재종가라고 검색해보시면 언론 인터뷰나 동영상 촬영되었던 자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여름에는 향리에 계신 어른들을 모시고 복맞이 음식 대접을 하고 있고, 특히 열친회(熱親會)’라고 해서 저희 11남매(2남 9)는 물론 사촌과 외가의 가족들이 한창 무더운 815일 전후의 주말에 모여 맛난 음식을 나누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계기는 지난 1994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변용대(邊用大) )께서 마음을 다해 친목을 도모하라는 의미로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말씀하신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통 70명 정도의 대식구가 모이다 보니 여름철 기력을 보충하고, 예절과 가문의 역사 등에 대한 교육을 함께하며 가족 간의 정을 나누는데, 이때 먹는 특식이 흑염소찜과 보신탕 등입니다.

 

그리고 건진국수라고 해서 비교적 넓은 면 위에 계란, 호박, 김 등 각종 고명(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하여 얹거나 뿌리는 것)을 뿌린 국수도 빠지지 않고 종종 먹습니다.

 

(종부) 집안 대대로 내려온 술도 있는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아홉 집안의 전통주 대중화와 관련하여 집집마다 가진 노하우를 묵히지 말고 국민과 대중들에게 전하고자 몇 년 전부터 '전통주연구회' 모임을 결성해 논의하던 중 경북 의성 출신으로 농림축산식품부장관까지 지내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신 이동필 장관님, 찹쌀 안동소주 올소를 개발한 신형서 버버리찰떡 대표 등과 의기투합하여 각 집안마다 다른 재료로 만든 전통주를 조만간 내놓을 예정입니다.

 

저희 집안의 술은 숙영주(淑英酒)’라고 이름 붙였는데, 기대해도 좋으실 것입니다.

 

8. 종가에서는 1년에 몇 번의 제사를 지내시는지요?

 

(종손) 예전에는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제사가 규범대로 진행이 됐는데, 지금은 많이 간소화됐습니다.

 

하지만 종가로서 다른 지손과 문중의 모범이 되기 위해 아직까지는 전통을 지키므로 불천위 제사(간재 변중일 할아버님과 두 할머님) 3, 기제사(할머니가 두분인 경우 포함)  9, (3주에 걸쳐 진행하는) 시제 3, 명절 2회 등 총 17회입니다.

 

재작년부터는 서서히 각 종가 문중들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합해서 1번으로 하는 등 횟수를 줄이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으며, 저희도 며느리가 들어오거나 하면 줄여서 합설할 수 있는 만큼 합설해 총 횟수를 줄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9. 집안에 내려오는 진설도가 있으신지요? 그리고 진설도에 따라 실제로 제례를 봉행하는지요?

 

(종손) 진설도는 기본적으로 다 있고 예전부터 지낸 방식대로 지금도 그대로 지냅니다.

 

대신 전()은 어머니가 나이 드셨을 때부터 문중에서 전을 없애자고 합의가 되어 불천위 제사에는 전을 없앴고, 기제사에는 아주 간소하게 배추전 정도만 합니다.

 

떡도 예전에는 15~18단이 기본이었는데 높이를 줄였고, 과일도 4~5단 했던 것을 2~3단으로 낮췄으며, 대추와 호두 등도 예전에는 일일이 종이와 꿀 등으로 바르며 높이 쌓아 올렸는데 이제는 간소하고 규모가 작게 합니다.

 

10. 예전과 비교해서 지금의 제례에서 달라진 부분들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반드시 올려야할 제수가 있습니까?

 

(종손)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만 예전보다는 제물, 과일, 어물 등을 많이 줄인 편입니다.

 

반드시 올리는 물품은 안동에서는 다 비슷할 텐데 문어는 필수적으로 쓰고, 소고기·돼지고기·조기·포 등도 빠뜨리지 않고 올립니다.

 

11. 제사를 지낼 때 종손과 종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종손) 종손은 사랑채에서 찾아오시는 손님들을 접대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특히 불천위 제사 때는 서너 명의 유사들이 며칠 전부터 와서 준비를 돕고 차리는 것도 하므로 종손이 직접 제물을 만지지는 않습니다. 종부는 제물과 그릇 등을 준비하는데 유사 부인들도 와서 돕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종손이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을 맡고, 다음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종부가 합니다. 참고로 종헌관은 집안의 제일 연장자가 하십니다. 다같이 모여서 분정하고 분정표를 작성할 때 아헌관 자리에 주부(主婦)’라고 적는데, 이렇게만 적어도 여기서의 주부는 당연히 종부라는 것을 모두가 압니다.

 

이것은 제가 어릴 때 할머니도 그렇게 하셨고, 이후에는 어머니도 하셨으니 역사가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것같습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몇 군데 집안에서도 종부가 아헌관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종부) 기제사는 종부가 거의 혼자서 준비하고, 불천위 제사 때는 유사들이 오셔서 많이 도와주십니다.

 

12. 제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종부) 세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예()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후손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즐겁게 모시느냐, 청결하게 준비하느냐 하는 부분인 것같습니다.

 

이때 후손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소식을 전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며, 돌아가신 조상들을 추모하는 뜻깊은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13. 시제와 묘제를 지내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 지요?

 

(종손) 입향조부터 5대까지는 주변에 조상들의 산소와 재실(齋室)이 있으므로 음력 9월 마지막 주 토요일부터 들어가 문서 청소, 회계 정리 등을 한 후 하루 자고, 일요일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 3시 정도까지 진행하며, 나머지 6대 이후 산소는 제가 추석 때 지내거나 따로 날짜를 정해서 3주 정도에 걸쳐서 시제를 모시고 있습니다. 주말에 주로 다니게 됩니다.

 

14.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소요되는 비용은 어느 정도로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종가에서 모두 부담하십니까?

 

(종부) 불천위 제사는 150만원 정도, 기제사는 50만원 정도 사용하는 것같습니다.

 

문중에 기금도 모여 있고, 문중과 종가에서 각각 관리하는 토지가 있어 거기서 매년 나오는 수입 1천만원 정도로 제초작업과 산소의 벌초, 제례시 제수 구입, 다른 문중 제례 참석시 부조금, 다른 파 제례 참석시 행자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불천위 제사와 설, 추석 차례까지는 사당에서 진행하니 문중 수입으로 하고, 기제사는 고조부, 고조모, 조부, 조모, , 모를 대상으로 하니 종가에서 종손 부담으로 합니다.

 

15. 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요?

 

(종손) 당연히 예전에는 전날 입재(入齋)하여 준비했다가 자시(子時,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에 밤 12시 넘어서 지냈는데, 아버님이 여기 계시고 저는 밖에서 직장생활할 때 문중 어른들이 건의하고 건의해서 지금은 저희뿐만 아니라 95% 정도의 종가들은 다음날 저녁 6시부터 8시 사이에 지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손들이 올 수가 없고, 설령 오더라도 음복 및 설거지하고 나면 새벽 4시에 끝나서 집에 갔다가 다시 직장에 출근해야 하니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님 계실 때부터 저녁 8시쯤 제사 지내면 밤 10시 반쯤 끝나서 참석한 사람들이 다음날 출근할 수 있게 되니 제가 알기로는 제사 시간을 완전 옛날방식으로 고수하는 곳은 이제 소수만 남았습니다.

 

16. 제례 관련하여 앞으로도 달라지거나 변화를 원하는 부분들이 있으십니까?

 

(종손) 공자로부터 비롯된 유교문화가 동양의 전통문화를 형성했고, 한국·일본·베트남·중국 등 유교권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게된 밑바탕에 유교의 정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지킬 수 있는 부분들은 명맥을 잘 보존해가야한다고 봅니다.

 

종가는 누가 뭐래도 종가니 전통을 지켜 나가고, 다른 지손들이나 일반인들은 이미 자연스럽게 간소화가 되고 있으니 성균관에서 표본을 만들어서 권장하는 모습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가족파티처럼 해도 괜찮아요.

 

(종부) 저도 거의 같은 생각인데, 결혼하면서 제사를 맡아 지금까지 34년을 매년 열 일곱 차례씩 제사를 모셨으니 횟수로 따지면 총 570회가 넘었습니다만 제사라는 게 한두 사람이 부담하면 힘든데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진행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요즘은 맞벌이로 직장생활을 하는 분위기이니 꼭 예전처럼 강요할 수는 없는 것같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되어 형편에 따라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할테니 시대에 맞게 간소하게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제사에 참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제사를 계기로 부모님과 못 보던 친척들도 만나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이게 직장인들과 요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네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간소하게 하면 된다고 봅니다.

 

17. 제사는 꼭 아들만 지내야 합니까? 외동딸이 제주(祭主)가 되어 조상과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이십니까?

 

(종손) 개인적으로는 찬성합니다만 4, 500년 내려온 종가에 사위가 와서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지손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외손봉사(外孫奉祀, 직계비속이 없어 외손자가 제사를 받듦)가 흔해서 저희 집안의 변광(邊廣) 할아버님이 안동권씨 권철경(權哲經, ?-1524) 할아버님의 사위로 들어와서 후손들이 이 마을을 차지했고, 서애종가와 학봉종가도 처가로 장가가서 집안 터를 잡았으니 재산을 나눈 기록인 분재기(分財記)에서도 아들과 사위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고, 기제사는 딸이나 사위가 할 수밖에 없는 형태로 가겠지만 불천위 제사는 지금의 형태가 쉽게 바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요즘은 혼인신고를 할 때 아이의 성()이 아빠를 따를지, 엄마를 따를지 미리 쓴다고 하는 것같던데, 딸 하나뿐이면 딸이 대를 이어야겠지요.

 

개인은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보고, 대를 잊지 못하는 경우에는 종가도 없어지는 경우가 많을 것같긴 합니다만 보존되는 종가는 양자를 들여서라도 이어갈 것으로 봅니다.

 

18. 제사 장소를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종손) 불천위는 당연히 종가에서 모셔야 하지만 기제사 등 일반 제사는 상황에 따라 모시는 후손이 있는 곳에서 진행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저도 매번 내려갈 수 없어서 아파트에서 고조부, 고조모부터 제사를 모셨습니다. 다른 집안의 종손들도 서울 등 외지에서 생활할 때는 그곳에서 모신 것으로 압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니 여행지에서 간단하게 준비해서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아무리 약식이라도 지내지 않는 것보다는 지내는 게 낫지 않습니까?

 

19. 아드님들은 제례와 집안의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손) 고려대를 졸업한 두 아이들 중 큰 아이는 포항의 포스코에 다니고, 작은 아이는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천위 제사 때는 거의 오고 기제사는 아무래도 직장에서 아직 경력이 짧다보니 평일에는 못 오고 주말이면 옵니다. 오라고 강요는 많이 하지 않는데, 본인들이 알아서 아직까지는 잘 옵니다.

 

저처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활하는 모습들을 자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하기는 하지만 생활 자체가 바쁘고,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과 비슷하다 보니 부모와 조금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어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특히 큰 아이는 제례 지내는 방법과 절차 등은 물론 한문도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아니라고 하지만 결혼도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집안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같습니다.

 

20. 성균관에서는 문중에서 지켜내고 있는 전통제례를 무형문화재급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손) 당연히 필요하지만 기준을 어디로 삼을지가 애매합니다. ()문중만 할 것이냐, ()문중까지 할 것이냐, 전통을 잘 지키느냐와 못 지키느냐 등 지금의 문중 모습이 정말 다양한데 안동지역은 아직까지 종가들이 전통을 잘 지키고 있는 편입니다.

 

몇 년전부터 종가문화보존원을 만들고,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운영하는 방안을 모색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교는 아직 종교의 개념으로 확실하게 인식되고 있지 않아서 헌금을 내면 기부금 처리가 되는 다른 종교와 달리 지손들이 종가에 제사 지내러 와서 제례비나 행사비를 기부하면 그것을 기부금 처리해서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면 좋을 것같습니다. 성균관에서 이런 부분들을 법제화하는 방향으로 모색해주시면 종가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만약 사단법인화 등이 필요하다면 종가를 사단법인으로 변경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형문화재 지정은 여러 방향으로 시도를 하고 있는데, 제례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가를 등재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건물을 위주로 할 것인지와 자손 숫자를 위주로 할 것인지의 기준이 애매하고, 지금 안동처럼 불천위가 있어야 제대로된 종가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불천위가 없으면서 종가라고 하는 집안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 등 고민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21. 종가는 평소에 열려 있습니까?

 

(종손) , 그렇습니다. 일반인은 물론 유림, 다른 종가에서도 많이 방문하고 TBC 등의 방송사는 물론 제가 직접 주최한 음악회도 여러 차례 열렸습니다.

 

외부인들이 오시는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민족과 조상들의 모습을 살피러 오는 모습들이 반갑고 때로는 대단하게도 느껴집니다.

 

22. 종손, 종부로서의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종손) 얼마 전에는 MBC방송국의 PD수첩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해 종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일환으로 저희집부터 제일 먼저 취재하러 왔습니다. 마침 설 명절에 차례 지내러 집에 들른 미혼 두 아들과 인터뷰도 했는데, 지난 214일에 인구절벽 1-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방송이 나간 후에 아이들이 종가라는 게 소문나서 장가를 더 못 가게 됐다고 하더군요. 섣달 그믐에 제가 갓 쓰고, 도포 입고, 사당에 가서 묵세배(‘묵은세배의 경북 방언) 드리는 모습은 물론 아이들에게 덕담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보기에 따라서 좋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좀 고리타분하고 답답하게 보이기도 했을텐데, 하여간 조회수가 100만회가 넘어서 거기에 대한 반응과 연락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저는 의무이고, 사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집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자랐으면 저 역시 이렇게 있지도 않았겠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 100일장(), 할아버지 보름장, 아버지 7일장 등을 스스로 겪었고 주변에 조상들의 산소와 위토(位土) 등이 다 있으니 제 대()에서 잘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게 제 의무이고 역할입니다.

 

아버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34세부터 종손을 해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나름대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종부) 저는 사실 종가와 종손, 종부가 뭔지 잘 모르고 결혼했는데, 당시는 젊었으니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정성스럽게 제사를 잘 모셔왔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맡아서 하고 우리집에 새 사람이 들어오면 더 간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도와주는 집안 아주머니들이 많으셨는데, 지금은 다들 돌아가시고 제가 이 마을에서도 가장 젊은 편에 속하니 도와주는 분들이 거의 없어져 제사 준비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음식준비는 계속 해왔던 것이니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는 시간이 되는대로 지인들과 골프, 캠핑카 여행도 하고, 제사가 없는 달에는 해외로 떠나서 남미의 파타고니아와 안데스트레킹, 네팔 히말라야 등도 다녀왔습니다애들 아빠가 경상도 남자지만 외지에서 생활을 많이 해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성격탓인지 많이 도와주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편이라 이왕 지내는 것도 유쾌하게 살려고 합니다

 

종손, 종부라고 해서 무게감에 짓눌려 있기보다는 현대에 맞게 새로운 형태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야 미래의 며느리될 사람도 구해지지 않을까요? 

 


인터뷰 당일에도 예정된 종가 전통주 준비모임에 가야 한다며 바쁘게 움직이고 모임 현장도 보여준 종손, 종부는 특히 밝고 웃음이 많아서 옛날 어른들의 기준으로 보면 엄숙함과 조금 맞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처럼 전통문화와 유교예절 등을 어렵고 현실과 맞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는 막중한 위치에 있으면서 어떻게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조금만 돌이켜 생각하면 조상을 섬기고, 이웃과 함께하며, 누구를 상대하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이 분들이야말로 그들만의 특권층이 아니라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국의 멋과 맛을 꿋꿋히 지켜나가는 파수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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