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문묘에는 대성전 서쪽 계단에서 신삼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박석을 깔아 만든 이 길을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문헌에서는 신로(神路)라고 칭했다. 신령이 통하도록 특별히 만들어 놓은 상징적인 길이다. 일반 사당에는 솟을삼문에서 사당까지 만든 길을 당도(堂塗)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다.
그런데 이 문묘의 신로를 신도(神道)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성균관을 소개하는 일부 글들에서도 신도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심지어는 이 길을 신성시해 지나면서 절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신로에 사람들이 서 있거나 하면 내쫓고 심한 경우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불쾌한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신성한 길을 밟고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석전 봉행 후 일반 참사자들이 인터넷 등에 올리는 답사기를 보면 이 신로에서 겪는 일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일하시는 분들이 신이 지나가는 길이므로 올라가지 말고 비켜서 찍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얘기다. 예로부터 문묘의 이 길은 신성시되지 않았다. 시설물 보호 차원에서 파손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길을 지나면서 절을 한다거나 아예 서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유교의 예(禮)가 아니다.
효명세자의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을 보라

「작헌도」(소장 국립고궁박물관)

파란색 타원으로 표시한 곳을 보면 모두 신로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묘의 신로를 신성시하지 않았음은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왕세자입학도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왕세자입학도첩』은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가 입학례를 치르는 일련의 의식 장면을 담은 그림 6폭과 의식의 절차를 기록한 의주(儀註), 그리고 13명의 세자시강원 관리들이 지은 부(賦)와 남공철(南公轍)의 발문(跋文)으로 구성돼 있다.
『왕세자입학도첩』은 당시 15점 정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6점뿐이다.
6폭의 행사기록화는 「왕세자출궁도(王世子出宮圖)」, 「작헌도(酌獻圖)」, 「왕복도(往復圖)」, 「수폐도(脩幣圖)」, 「입학도(入學圖)」, 「왕세자수하도(王世子受賀圖)」이다.
그 중 「작헌도」는 입학례의 첫 절차로 공자께 술을 올리는 의식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대성전 안 북벽에 문선왕위가 있고 동서벽에는 사성위가, 그 좌우에는 종향신위가 8개씩 흰색 사각형으로 표시돼 있다. 가운데 황색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왕세자가 절하는 자리이다. 왼쪽 집사자는 향로를 들고 있고 오른쪽 집사자는 향합을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쪽 계단 아래쪽, 붉은 탁자 위에 세이[대야]와 비[대바구니]가 올려져 있는 것이 관세위이며, 그 옆쪽에 커다란 황색 사각형이 배위가 된다. 작헌례를 행할 때 왕세자는 동문으로 들어와 먼저 배위에서 멈춰서 네 번 절한 뒤 관세위에서 세수를 한다. 그런 다음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 헌작하게 되는데 그 길이 초록색(다른 소장본에는 노란색) 선으로 표시돼 있다.
이 「작헌도」를 자세히 보면 집사자와 학생들 모두 의식 중에 신로를 밟고 있다. 파란색 타원으로 표시해 놓은 부분이다.
「작헌도」뿐만 아니라 『태학지(太學志)』에도 “학생은 뜰 중앙에 자리해 북향하고 서쪽을 상위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도 “헌가는 중앙을 비워두지 않으나 등가는 중앙을 비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도’라는 말과 신도를 신성시하는 것은 일제의 잔재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대성전 사진

1936년 춘기석전 봉행 기사를 보면 아직 배전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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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뜰 중앙에 설치된 배전이 오른쪽에 보인다. 이 배전은 광복 후 50년이 넘게 지나서야 철거됐다.
신도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문묘의 신로를 신도라고 해 신성시한 것은 일본 신도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변경한 일제는 대성전 앞에 배전(拜殿)을 설치했다.
배전이 언제 설치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고적도보』나 관련 기사들을 보면 1936년까지는 배전이 설치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의해 설치됐던 배전은 1997년에 비로소 철거됐다.
일본의 신사는 신을 모신 본전과 참배를 위한 배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신사의 입구에는 일본 신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리이(鳥居)가 서 있고, 본전과 도리이를 잇는 축을 중심으로 기타 부속 건물들이 있다. 도리이에서 본전까지 가는 길을 참도(參道)라고 한다.
이런 일본 신사에 맞춰 일제는 신삼문과 대성전 서계로 이어지는 길의 중앙에 배전을 설치했다. 이로써 일본 신사의 도리이-참도-배전-본전 구조와 같이 문묘를 신삼문-신도-배전-대성전 구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본 신도에서는 참도의 중심은 신이 지나는 길이라며 신성시했고, 사람들은 측면으로 걸어가야 한다.
방동민 석전보존회 사무국장은 “향교 중에는 신로가 없는 대성전이 많다. 왕세자입학도첩이나 다른 자료들을 봐도 신로를 신성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로를 삼갈 필요는 있으나 신로를 건너면서 절을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예가 아니다. 일본 신도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 때 배전을 길 중앙에 세웠던 것으로 볼 때, 신로를 신성시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관습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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