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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이틀 전에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여성유림회 창립 2주년 기념식'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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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조애영 초대 회장, 호영희 부회장, 김정자 부회장, 손영희 총무국장이 자리하고 있다.

여성유림회원들의 자유중국 방문 소식은 <유림월보> 제98호(1977.5.25) 7면에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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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여성유림회 자유중국 방문단장은 귀국 후 여행기를 <유림월보>에 투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방문할 수 있고, 한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이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대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과 달리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자유화는 지난 1989년부터 시행됐다.
그 이전에는 모든 국민이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 속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고 이민, 유학, 출장, 친지 방문 등이 아닌 단순 관광 목적으로는 원칙적으로 여권 발급이 금지됐다.
1987년 해외여행 신청요건 완화, 관광허가 연령의 확대가 이뤄졌고,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는 관광허가 연령의 40세 이상으로의 확대, 부부동반 동시여행 제한 완화, 상용여권의 복수여권 발급 원칙이 적용되었으니 그야말로 지금과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의 전신인 여성유림회(女性儒林會)의 김정자(金貞姿, 1931-2017) 부회장, 최영옥(崔映玉)·김춘숙(金春淑) 회원 등 3인이 공맹학회(孔孟學會) 초청으로 1977년 5월25일부터 5월31일까지 자유중국(自由中國, 지금의 공식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을 방문했고, 방문단장을 맡은 김정자 부회장이 <유교신문>의 전신인 <유림월보(儒林月報)> 제100호(1977년 7월25일자) 7면에 여행에 대한 소감을 담은 글을 실었다.
대만여행기(臺灣旅行記)

김정자 여성유림회 부회장, 제3-4대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장
비행기는 쑥쑥 솟구쳐 어느 틈에 흰 구름 위로 올라와 버렸다. 창공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 사이로 찬란한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은빛 날개가 눈부시다.
김포공항을 떠난 지 두 시간여 남짓에 어느덧 비행기는 아름다운 섬나라, 자유중국(自由中國) 대만(臺灣)의 상공에 있다. 시차 1시간, 한국보다 1시간이 늦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고 숙소로 직행해 여정을 풀고 이미 어둑어둑해진 거리로 나왔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과일들, 바나나·파인애플 등이 거짓말처럼 싸다. 망고, 파파야, 양도(楊桃, 양타오), 멜론은 물론 그 밖에도 이름 모를 과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맛이 어떨까 물어본다.
점원 아가씨는 영어는 전혀 못하고, 일본어가 조금 통해서 달다, 맛있다 등을 손짓, 몸짓으로 서로 폭소를 터뜨리며 흥정해 한 아름을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와 시식한다. ‘역시 이게 최고야’ ‘아휴, 이건 글렀어’.
최영옥(崔映玉), 김춘숙(金春淑), 그리고 본인 등 일행 셋은 서로의 미각에 온 정신을 곤두 세우고 평가회를 가진다. 이리하여 웃으며 즐기며, 그리고 조금은 흥분한 대만의 첫날(1977년 5월 25일 수요일) 밤은 깊어갔다.
다음 날인 5월 26일 성균관대학 선생님의 명함을 들고 대만국립정치대학(臺灣國立政治大學) 동방어문계(東方語文系) 전임강사 임일호(任日鎬) 여사를 찾았다. 부부가 모두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이들 교포는 이곳 생활에 익숙하고, 특히 임 여사는 외모도 중국인 부인같다. 다른 나라에서 만난 내 나라 사람들의 따사로운 정은 비단 임 여사뿐만이 아니라 일대무역고분유한공사(一大貿易股份有限公司)의 정웅탁(鄭雄鐸) 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정 사장의 초대로 화원(花園)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사천(泗川, 쓰촨)요리를 먹으며 그 분의 ‘장사꾼들 틈에서 장사를 해낸’ 악전고투한 얘기를 듣고, 오후에는 시내 구경을 했다.
거리를 가도 같은 황색인종이라 특별히 이질감도 없었고, 말도 젊은 층과는 영어로, 노인층과는 일본어로, 그것도 안 되면 한문을 써서 의사상통이 가능했고 한문의 발음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많아 쉽게 동화할 수 있었다.
다음 날(5월 27일)은 아침 일찍부터 공자님 묘로, 충렬사(忠烈祠)로, 박물관으로 종일 가슴 뿌듯한 감격을 안고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박물관 진열품의 정교하고 우아함이여, 장엄이여, 탄성 또 탄성. 이 많은 실물들을 본토로부터 억척스럽게도 날라온 그들의 그 끈질긴 성미, 욕심, 뚝심에 재삼(再三) 감복하였다. 하기야 그 큰 땅덩어리를 빼앗겼는데, 이거라도 가져 와야지... 그 분함을 어찌 푼단 말인가.
공자묘는 대북(臺北, 타이베이)보다 태중(台中, 타이중)의 것이 더욱 잘 되었다. 대성전과 그 옆 공자(孔子)들의 위패, 그리고 명륜당. 나는 문득 우리 여성유림회 회원들이 모여 붓글씨도 쓰고, 강의도 듣던 한국의 아름다운 명륜당을 머리에 그린다.
이곳의 문·무묘(文武廟)에 가니 문(文)은 공자님, 무(武)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이었다. 안내인이 ‘싸움의 신’이라고 관우의 붉은 얼굴을 가리키더니 이쪽은 ‘공부를 많이한 훌륭한 신’이라고 공자님을 소개한다.
‘자녀들의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빈다고 하는데, 과연 기다란 중국향(中國香)을 두 손에 듬뿍 들고 불을 붙여 흔들며 무어라고 중얼중얼 축원을 드리는 중년부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진학을 앞둔 어머니들의 애타는 마음은 같은가보다.
저녁에는 몽고요리를 먹었다. 사슴, 양, 닭, 돼지, 그리고 쇠고기 등을 대패질하듯 얇게 썰어 얼군 것이었고 여러 가지 생야채가 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릇에 담아가면 요리하는 남자가 커다란 화덕에 벌겋게 달군 번철에다 그것을 쏟아 기름과 무슨 국물을 쭉쭉 끼얹어가며 재빨리 볶아 그릇에 턱 담아준다.
그걸 가지고 자리에 돌아와 호떡 비슷하게 생겼는데 네모나고 속이 뚫린 밀전병 속에 이 볶은 것을 집어넣어 먹는데, 맛은 좀 이상한 냄새가 나서 과히 입맛에 맞지는 않는다. 몽고 민족은 유목민이라 요리를 손쉽게 해먹어야 했다는 안내자의 말이었다.
식사 후 용산사(龍山寺, 룽산사)와 경극(京劇)을 봤는데, 경극은 우리나라의 창가(唱歌) 같은 것인데 독특한 고음의 여창(女唱)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단조로운 선율이 되풀이되는 데 어쩐지 우리의 창극보다 흥겹지 않은 것같다.
낮에는 더워서인지 밤에 더욱 인파가 많았는데, 용산사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쐬러 나와있었다. 용산사의 지붕은 오색(五色)이 찬란한 사기로 되어 있어 밤하늘에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고, 여기도 많은 부인네들이 향을 피워 흔들며 무언가 기원하고 있었다. 이곳 불교는 한국과 좀 다르다. 이것은 나중에 태국과 일본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 나라마다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일월담(日月潭, 르웨탄) 가는 길, 태중(台中, 타이중)의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돌부처는 일본의 에비스(惠比須) 같은 인상이었는데, 코와 입 언저리에 제비집들이 꼭 부스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 징그러웠다.
명승지 일월담 대반점(大飯店)에서 1박(泊) 했는데, 대반점은 호텔이라는 뜻인데 향항(香港, 홍콩)에서는 주점이라고 쓴 곳이 호텔이었다. 하기야 우리나라도 주막집이 호텔의 시조가 아닌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 대만의 원주민인 고산족을 보았다. 토산물을 팔아 생계를 하는 이들 젊은 아가씨들은 한결같이 화장이 짙었는데, 상당히 미인들이었다.
또 고(故)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씨의 모당(母堂, 어머니)의 영정이 있는 사당을 보고, 그 앞에 우뚝 솟아있는 9층탑에도 올라가 보았다. 장 총통 모당은 수수한 모피옷을 입고 조용하고 위엄있는 얼굴이었다.
어둠컴컴한 방은 잠겨있었는데, 문틈으로 보니 촛불이 켜졌고 몇 가지 과일이 제기에 얌전히 담겨져 있었다. 때마침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데, 깨끗하고 조용한 경내에는 남쪽나라의 관목(灌木)이 우거지고 사당지기가 기르는 듯한 닭 한 쌍이 무심히 모이를 쪼고 있다.
5월 28일, 드디어 이번 여행의 목적인 공맹학회(孔孟學會) 방문이 이뤄졌다.
회장 진입부(陳立夫) 선생은 마침 수술을 받은 후라 뵙지 못하고, 공맹학대 이사인 이곳 고시원장과 대만대학 교수 몇 분과 총무님들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임 여사의 통역으로 인사를 하고, 성균관장님의 편지를 드리니 고시원장이 받아보고 진 회장께 전하겠다고 하며 글씨가 아주 명필이라고 칭찬이다. 담소하는 짧은 시간에 나는 이분들이 모두 하나같이 기품이 늠름하고, 훤칠한 용모에, 따뜻하고 그럴 수 없이 좋은 인상을 풍기는 데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아련하게 가슴 한쪽에서 저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본토를 빼앗기고 이곳 섬까지 쫓겨와 갖은 국제적인 고립과 울분을 씹으며 여생을 보내야 하는 이 허여멀쑥하게 잘 생긴 귀골(貴骨)들...
당신네들의 고국산천은 끊없이 넓고 넓은 농토는 당신네가 시를 읊던 서당은 찬란한 인류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당신네들의 중화민국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까요?
당신네들에게서 풍기는 기품이 분명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닐진 데 대대로 내려오는 문벌과, 그리고 학식의 상아탑 속에서 종횡무진 탐구하는 당신네들의 머리와 붓 끝에 한없는 동경을 느끼는 이 사람은 당신네가 꿈에도 그리는 본토 수복의 날이 꼭 이뤄지기를 빌고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도 여성유림들이 있느냐?’는 질문에 ‘학문하는 데에 남녀의 구별은 없다’고 대답한다.
중국계의 대접을 받고 조금 후에 공맹학회를 하직하고, 곧 공자님 77대손이라는 공덕성(孔德成)씨를 자택으로 찾아갔다. 아파트의 2층에 살고 있는 그 분은 60세쯤 되었을까. ‘공자님 닮으신 것같네요? 키가 크시고, 인품이 훌륭하신데...’ 라고 하니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우리에게 자리를 권한다.
손자인지, 어린 애기가 놀다가 안으로 들어가고 비닐 장의자(長椅子)와 몇 개의 딱딱한 의자가 놓여있을 뿐 별로 장식되어 있지 않은 검소한 방이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다. 우리 한국의 여성유림회를 위해 글씨 한 폭을 써 주시면 더욱 영광이겠다’고 부탁 말씀을 드리고 우리 일행은 후덥지근하게 더운 정오의 거리로 나왔다.
5월 31일 12시 20분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대만을 내려다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또 언제 올 수 있을까. 대만이여, 안녕. 공맹학회의 여러 영감님들 안녕. 공덕성씨 모두들 안녕.
누리끼리한 얼굴의 바짝 마른 호텔 보이씨. 어려 보였는데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월급 가지고 살기가 힘들다던 보이씨. 나에게 중국어를 몇 마디 가르쳐줬지.
또 대만 도착하던 날에 엉뚱한 데로 끌고 다니다 35원(NT$) 나온 택시요금을 70원이나 받아내던 반(半)바지의 지저분한 운전수 아저씨, 이빨이 너무 누렇더군.
일월담 가던 기차 안에서 따끈한 중국차를 유리잔에 솜씨 있게 부어주던 건장한 친구... 모두들 안녕.
관광안내하던 대머리 청년, 점심 먹은 것이 체했다기에 한국산 훼스탈을 두 알 줬더니 곧 나았다고 했었지.
또 거리의 제복의 남녀 학생들, 호텔 앞 공원에 새벽 일찍 나와 체조하던 뚱뚱이 동네 할아버지들, 과일장사들 모두 안녕 안녕.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금은 살기 힘들겠지만 본토 수복의 날을 위하여 당신네들의 꿈을 키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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