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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 윤상철(대유학당 대표)
상구는 부귀를 누리지 않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상전에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지 않는다’는 것은 뜻을 본받을 만한 것이다(고괘 상효).
이석문(李碩文, 1713~1773)은 조선 영조시대의 군인이다. 27살(영조 1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장교가 되었으나 성품이 강직해서 압록강이나 평안도 등 변방을 전전하였다. 상관의 비리를 보고 벼슬을 사직하거나 노론과 한편이 되면 병마절도사로 승진시키겠다는 제의에 “나는 영남의 촌 동네 출신이라서 붕당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좌천과 강등과 사직을 번갈아 하던 중 1750년에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가 그 강직함을 보고 발탁하여 선전관이 되고, 곧 이어서 금부도사가 되었다. 1762년 5월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자 세손(정조)을 등에 업고, 못 들어가게 막는 수문장을 밀친 뒤 궁으로 들어가니 세손이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할 수 있었다.
권정침 등도 땅에 머리를 찧고 울며 세자의 억울함을 간하였는데, 화가 난 영조가 권정침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나 권정침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윽고 세손이 궁궐 밖으로 끌려나갔고, 영조가 뒤주에 큰 돌을 올려놓으라고 다시 명령하였지만 죽더라도 못하겠다고 하며 거부하였다.
결국 곤장 50대를 맞고 삭탈관직 당한 뒤에 도성에서 쫓겨났다. 사도세자가 7일 만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관복을 버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 고향 땅 성주로 내려가서 평생을 사도세자를 그리며 은거하였다.
북비공이라는 별명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대문 위에 북비(北扉:북향으로 낸 대문)라고 쓴 것에서 유래한다. 노론의 김상로, 홍계희 등이 건너편에 사는 그의 사촌 이석구의 집을 방문할 때에 얼굴을 가리고 그의 집 앞을 지나가자 문을 뜯어 북쪽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혹은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문을 북쪽으로 옮기고는 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도 한다.
그의 의기와 충성심을 높이 산 채제공이 병조판서가 되자 영조에게 훈련원 주부를 제수하자고 건의해서 불렀으나 “사람은 뜻을 올바르고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굽어졌다면 이미 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나라를 지키는 소임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사헌부에 있을 때는 간신을 죽이라는 말도 제대로 못 했으니 앞으로도 제대로 뜻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거절하였다. 이후에도 영조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 승진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낙향한 지 11년 만에 사망하자 채제공은 직접 경상도 감영을 찾아 그의 장례식을 지원하였고, 그의 의기를 높이 산 수백 명의 선비가 문상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의 손자 이규진이 성균관에 선발되자 정조가 특별히 불러서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 물어보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뒤주사건에서 그가 보인 충절과 의기는 영조와 정조를 감탄하게 하고, 채제공 등 당시 뜻있는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 벼슬을 해서 그의 바르고 밝은 뜻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용기 없고 무능함을 탓하며 숨어 살면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신하로서의 바른 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역에서는 ‘높은 지위와 재물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에 힘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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