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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월보>는 제120호(1979.3.25 일요일) 2면 사설을 통해 파리장서운동을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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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들에게서도 잊어졌던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설명은 이후 희미하게라도 인식이 존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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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림월보>에 게재된 파리장서 원문은 한문으로 구성되어 지금 사람들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서울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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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은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의승에 대한 국가기념일 지정과 기념관 건립을 요구한다.
우리 국민 누구나 지난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과 당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학교 교육과 방송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여기에 당시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이 가장 컸던 유교 대표가 아무도 들어가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오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역시 유교는 문제가 많아서 그렇겠지!’ ‘나라를 망하게 한 주범들이 대체로 유교를 숭상하는 왕과 지배층들이었으므로 그랬을 거야’라는 반응들이 일반적인데, 항일독립운동사를 전공하거나 유림관련 자료들을 살펴본 이들은 유교 대표가 들어가지 못했던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제대로된 사실이 알려지지 못한 가운데 당시 유교인들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역할이 너무 과하게 축소, 왜곡되어 전해지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지금부터 105년 전인 1919년 3월에 작성·발표된 파리장서(巴里長書)는 국내·외뿐만 아니라 해외 주요국에도 전달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과시했고, 여기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을 일으켜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선생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 및 서명자들을 체포, 투옥했는데 74세의 고령(高齡)임에도 불구하고 대구감옥에 갇힌 곽종석 선생은 신병 악화로 그해 7월19일 보석(保釋)으로 풀려났다가 10월17일 서거(逝去)했고, 또 다른 지도자인 김복한(金福漢, 1860-1924) 선생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중병으로 그해 12월12일 석방되었다.
역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중국 상해로 피신했다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몰래 들어와 활동 후 다시 중국으로 옮겨갔으나 일제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며 체포되어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1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와중에 모진 고문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함으로 인해 앉은뱅이로 이후 여생을 보냈다.
이웃종교인 불교는 「국민 행복과 전통문화 전승을 위한 정책 제안」 자료집을 제작해 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주요 정당에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는데, 그 중에는 ‘호국의승의 날 제정 및 호국불교기념관 건립’이라고 하여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에 참여한 의승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친 스님들을 기리는 날로 매년 6월1일에 시행 중인 ‘의병의 날’에 맞춰 국가기념일인 ‘호국의승의 날’로 할 것과 그들을 기리는 ‘호국불교기념관’을 건립해 국가의 보훈사업으로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유교는 곽재우, 유성룡, 이순신 등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운 분들뿐만 아니라 이후 각종 국난 극복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등에 재산과 인력 등 가장 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잊혀지거나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인데, ‘(가칭)한국유교민족운동기념관’ ‘(가칭)파리장서운동기념관’ 같은 기념시설 건립이 시도되거나 기념사업회 구성이 추진된 적조차 없었다.
서울 장충단공원과 전국 곳곳에 파리장서기념비가 세워졌으나 지난 2019년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잠시 이뤄진 경우를 제외하면 국가나 지자체 차원은 물론 서울 성균관과 유림단체, 지역 유림이 주도한 행사도 거의 없었다.
지난 55년간 '유교권 유일의 전국지'로 유림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유교신문>의 전신인 <유림월보>는 제120호(1979년 3월25일 발행) 2면에 실린 ‘사설-파리장서의 한국유림단 독립운동정신을 되새기자’를 통해 유림과 국민들에게 잊혀져 가던 파리장서운동을 처음으로 부각시켰는데, 지금이라도 선배들의 기개와 정신을 이어받고 기리는 자세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파리장서(巴里長書)의 한국유림단(韓國儒林團) 독립운동정신을 되새기자
인생은 자유를 누려야 하며, 국가는 독립의 주권을 가져야함은 하늘이 부여한 권리이며 대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희구(希求)함은 생명보다도 강하고, 민족의 굴욕은 죽음보다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한·일합방 후 10년인 1919년, 즉 기미년(己未年) 1월부터 세계평화회의가 불란서의 서울 파리에서 열림을 듣고, 한국유림 대표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두 선생 등 137인이 왜적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민의 절실한 염원인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을 작성하여 그해 3월23일에 심산 김창숙(金昌淑) 씨로 하여금 파리에 파견하기로 의결하고, 심산은 곧 상해임시정부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 임정의 사정이 있어서 이미 우리 한국대표로서 파리에 가서 활약하고 있는 김규식(金奎植) 씨에게 우송하여 제출케 하고, 상해에서는 다시 각국어로 번역하여 수만 부를 본국 내와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게 통보하여 137인은 거의 다 구금의 화를 입고 혹은 망명하여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르기도 한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 나섰으므로 전세계를 격동케하였고, 우리 국내에서는 3·1운동으로 인하여 일정(日政)의 독아(毒牙)와 철제(鐵蹄)는 도처에서 살상을 자행하고, 독립운동의 색채가 있는 자에 대하여는 감시의 눈이 삼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서를 전세계를 향하여 큰소리로 호소한 엄정한 사실이야말로 수천년 이래의 유교국민으로서 그 사명을 통감하고 국난을 좌시하지 않고 의연하게 궐기하여 한국의 독립실정과 일정의 강도적인 행동을 여지없이 폭로한 것이기로 이것은 실로 의혈(義血)이 끓는 장거(壯擧)인 것이다.
이것은 경술년의 국치민욕(國恥民辱)을 당한 후에 있어서 총검의 갖은 위협 아래에서도 민족전통의 혈관 속에 맥맥히 뛰는 불굴불요(不屈不撓)의 의혈과 강인하고 맹렬한 용기가 이에 이르러서 필경 그 본연확고한 항쟁력을 발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사생취의(捨生取義)와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본시 유교의 본령이기로 일신의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생각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하는 것은 유교인의 신조이고 각오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거에 국난을 당하였을 때에 일어난 의병운동에는 언제나 유자들이 선봉에 섰고, 궐연(蹶然)히 구국대열에 나서서 의혈을 뿌렸으니 이것이 유교인의 진정신(眞情神)과 신조의 발로인 것이다.
그리하여 혹은 옥사, 혹은 망명, 또 혹은 순국함으로써 광활한 천지와 더불어 민족정기를 한껏 발양하고 이것이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서 조국을 광복케하고 유구찬연(悠久燦然)한 국맥을 되살렸으니 이것이 바로 파리장서독립운동의 참정신이며 137인의 큰 업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독립운동의 드높은 소리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기미년에 안으로는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으로 발표된 3·1 독립선언이 불꽃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밖으로는 유림대표 137인의 서명으로 일편(一篇)의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어서 일정의 만행과 죄악상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대한의 독립을 제소하여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켰던 것이니 이야말로 우리 한민족의 저항과 의거운동사에 대서특필한 큰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교인인 그 선조들만의 큰 업적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영원히 망각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지난날에 있던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와 유구한 장래를 통한 민족의 행적을 명시한 엄격한 교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 후에 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탑동공원에는 3·1독립선언기념비가 세워졌고, 또 1973년 개천절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한 전국유림의 선열추모 사상과 애국적인 성력(誠力)으로 유림대표 137인의 숭고한 업적을 영구무궁하게 기리기 위하여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드높게 세워진 것이다.
이 흘연(屹然)한 비석은 자손만대에 전하여 민족행진을 지로(指路)하는 나침반이 될 것이므로 큰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유림은 물론이고, 국민 전체가 이 장서의 진정신을 가슴깊이 되새겨서 선열들에게 감사하여야 하고, 또 유교의 본령ㅇ인 사생취의와 살신성인의 교훈을 받들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교훈을 기조로 하여 애국정신과 독립사상을 국민 개개인의 혈관세포 속에 간직하여 민족정기의 근저가 되어 지금 우리가 현실로서 해야할 국토통일을 성취하고, 나아가서 세대번영의 소임과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생동력을 얻도록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된다.
금년은 이 파리장서가 발표되어 국·내외로 큰 격동의 파문을 일으키게 한 지가 1주갑(周甲, 60년)을 맞는 실로 의의있는 해인지라 감격도 한층 새롭기로 유림으로서 과거 독립쟁취의 과정을 회고하며 오늘의 이 남북분단이란 불운의 현실을 직시할 때에 실로 회고상금(懷古傷金)의 격동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유림은 이 장서에 나타난 의거정신을 체득하여 굳은 각오와 신조로 현실에 대처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며, 파리장서의 본문은 따로 다른 장에 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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