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2 (화)

  • 흐림동두천 14.3℃
  • 구름많음강릉 19.9℃
  • 천둥번개서울 15.4℃
  • 흐림대전 16.6℃
  • 구름많음대구 17.2℃
  • 맑음울산 15.1℃
  • 구름많음광주 17.4℃
  • 구름많음부산 16.7℃
  • 흐림고창 16.8℃
  • 구름많음제주 18.5℃
  • 흐림강화 13.5℃
  • 흐림보은 14.9℃
  • 흐림금산 15.3℃
  • 구름많음강진군 15.3℃
  • 맑음경주시 15.3℃
  • 구름많음거제 16.4℃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특집

[창간 55주년 특집] 137인의 연대서명인을 통해 살펴본 '1919년 파리장서운동'“3·1 만세운동의 확대와 독립운동 확산의 중요한 계기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 5적'은 매국노의 대명사이다(출처 나무위키).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의 승하와 인산은 전국민적인 관심사였다(출처 위키백과).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이 급히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에 유교계 인사는 포함되지 못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 당시 39세의 김규식 선생은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47세인 1925년에 동료 운동가들과 촬영한 사진이다.

 


 

 

1973년 서울 장충단공원에 세워진 파리장서비에 원문이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는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파리장서 서명인들의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곽종석, 장석영, 김창숙 선생 등에 대한 일제 판결문도 국가보훈부 공헌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다.

 


 

 

곽종석 선생의 재판 기록에 '농유생(農儒生)’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만주 용정형무소에서 옥사한 정재호 선생의 서울현충원과 국가보훈부 안내자료는 일치하지 않는다.

 


 

 

 

노상직 선생을 비롯한 30인의 서명인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성균관 제작 달력에 표시되는 '유림파리장서독립청원의날'에 대한 제정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같은 105주년을 맞아 임시정부수립 기념식은 중앙과 지방 여러 곳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목숨을 걸고 파리장서에 서명했던 137인의 선배들은 후배 유림이 무엇을 할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유교신문이 창간 55주년을 맞이해 펼치는 5대 특별기획 중 하나인 지난날 유교신문 다시 보기 시리즈의 일환으로 인터넷판을 통해 먼저 공개한 「③파리장서의 한국유림단 독립운동정신을 되새기자-사설 인생은 자유를 누려야 하며, 국가는 독립의 주권을 가져야 함은 하늘이 부여한 권리이며 대법칙이다「④파리장서 원문 및 한글 번역문 차라리 머리를 나란히하고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에 이어 유림세력이 중심이 되어 펼친 구한말 의병 및 자주독립운동‘3·1 만세운동의 확대 및 독립운동 확산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했던 1919년 파리장서운동의 의의와 현재적 의미, 향후 방향성 등을 모색하고자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각종 자료를 검토하고, 일치되지 않는 부분들을 교차확인하며, 그 사이에 흐르는 맥락을 짚어내는 것이 쉽지 않아 고민하다가 장서에 서명했던 137인에 대해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그 과정들이 한꺼번에 해결되겠다는 판단으로 우선 그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추적했다.

 

지난 기사에서 언급했듯 파리장서의 원문과 한글 번역문도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으면서 자신들이 맞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파리장서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등에 대해서도 확인하는 글마다 차이 나는 부분들이 다수여서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혼란은 국가유공자 선정 및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부서인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가 운영하는 공헌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의 독립유공자 정보-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서 확인되는 내용과 공신력을 인정받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에서 검색되는 부분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신들 고장 출신의 인물을 소개하는 곳이나 각 문중에서 선조들에 관해 알리는 곳은 물론 주요 포털 사이트의 최상단에 노출되는 자료에서도 한글 이름, 한자 이름, 출생연도, 사망연도, (), (), 본관(本貫), 주요 활동내용, 포상 내역 등에서 곳곳이 달라 전부를 믿을 곳이 없다.

 

다만 사회통념상 국가기관에서 공개한 내용의 신빙성을 대체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선은 국가보훈부 공헌전자사료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중시하되 쉽게 판단이 되지 않는 부분들은 각종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정리했다.

 


1. 구한말의 의병 및 자주독립운동의 전개

 

 

조선후기 및 대한제국 말기의 격동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 지배층인 유림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선 수도인 한양에서 대대로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살아온 지배세력은 문명화된 외국 세력과 함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속에서 상당수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과 연결해 자신들의 세력 확대에 몰두했으나 1894년의 청(() 전쟁과 1904년의 러(() 전쟁,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과 을사늑약(乙巳勒約) 등을 거치며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확실시되자 이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1861-1905)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친일(親日)로 돌아서거나 침묵하는 모습으로 일관했고, 19108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전권위원 이완용(李完用, 1858-1926)과 일본의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 사이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829일에 발효되며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하게 지배하기 시작한 후에는 각종 포상금과 작위를 받으며 부역자(附逆者)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일제는 합방 전부터 통감부 등 각종 기구를 통해 협력자들을 늘리며 영향력을 확대해오다가 합방 후에는 지역에 영향력을 가진 유림들에게도 작위와 포상금 등을 하사하며 식민권력에 동참시켰는데,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고 침묵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목숨 등 모든 것을 걸고 거세게 항거하는 이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이 파리장서운동에 대거 동참하게 됐다.

 

예를 들어 장서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면우 곽종석의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1875년 운요호 사건(雲揚號 事件,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불법침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임)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계획하기도 했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에 참여한 5()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며 여러 제자 및 유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일본 대마도에서 순국(殉國)했다.

 

곽종석,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장석영 등 이진상 선생의 문인들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체결에 앞장선 5(五賊: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1916),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1919),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1854-1934)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장서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지산 김복한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斷髮令)이 잇달아 진행되자 홍주부 관내의 유림들로 의병을 일으켜 홍주읍성을 점령하기도 했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도 안병찬 등 옛 동지들에게 권유해 다시 홍주읍성을 점령하도록 했다.

 

경북 영천의 이학순(李學純, 1843-1910)1910년 한일합방시 일본의 은사금을 거절하고 자결순국하였으며, 한주 이진상의 장남인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우당(右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6형제 일가는 중국 만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을 비롯한 다수는 중국 상하이 등으로 건너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기나긴 싸움을 전개했다.

 

이 외에도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등 구한 말에서 한일합방 전후까지 의병전쟁에 참전한 인원 수는 14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이 중 17천 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의병 지도자 상당수가 전국 유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병으로 등록된 숫자는 2천 717명에 불과하다.

 

2. 3·1 만세운동과 유림의 파리장서운동

 

1차 세계대전의 여러 문제 처리를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19191월로 예정된 가운데 서울지역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파리평화회의에서의 독립청원서 제출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고, 당시 서울에 있었던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尹忠夏, 1855-1946)는 서울에서의 움직임을 보고, 1919219일 경남 거창의 다전(茶田)에 머물던 곽종석을 방문해 세계 정세와 서울 유림의 동정을 상세히 전하며 선두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으며, 1919121일 새벽에 승하(昇遐)한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33일에 참석하기 위해 대거 상경하는 전국 유림들에게 서명을 받기로 논의했다.

 

한편 천도교, 기독교, 불교 인사들은 유교 인사들의 참여를 위해 곽종석, 김창숙 등과 연락을 주고 받았으나 두 인물이 상경하기 전에 이미 자신들만의 인사 33인만으로 기미독립선언서의 인쇄가 이미 끝났고, 곽종석의 명을 받아 서울로 올라온 조카 곽윤(郭奫, 1881-1927)과 제자 김황(金滉, 1896-1978)은 이틀 전인 31일에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같은 시각에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펼치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림과 지역민들에게 사실을 전파했다.

 

곽윤, 김황과 별도로 서울에 와있던 김창숙은 같은 유림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 등이 한국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를 일본측에 제출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논의하기 위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윤충하, 곽윤, 김황을 만난 후 곽종석을 방문해 유림만의 독자적인 선언문을 작성해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로 하였고, 문안 작성의 최종 책임자였던 곽종석은 동료 문인 장석영과 제자 김황 및 기호유림 대표 김복한의 초안을 모아 과격하거나 불확실한 내용들을 수정해 파리장서를 완성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조정자 역할을 하던 김창숙은 동료들과 지역을 나눠 서명자를 모으기로 하고 강원과 충북은 이중업(李中業, 1863-1921), 충남과 충북은 김정호(金丁鎬, 1871-1919), 경기와 황해는 성태영(成泰英), 전남과 전북은 유준근(柳濬根, 1860-1920), 함남과 함북은 윤중수(尹中洙, 1891-1931), 평남과 평북은 유진태(兪鎭泰, 1872-1942), 경남과 경북은 본인이 직접 담당해 순회하며 동참자들을 모으기로 했다.

 

원래는 전국 유림을 총망라할 계획이었으나 3·1운동이 일어나며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고, 파리로 보내기 위한 시일이 촉박해 부득이하게 영남과 기호에서만 서명을 받은 채 완성된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운반책임을 맡아 서울에 있던 중국 무역회사 동순태(同順泰)를 통해 만주의 봉천 분점으로 보내졌고, 여기서 장서를 찾은 김창숙은 327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이미 임시정부 차원에서 영어에 능통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한 것을 알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과 협의해 영문본 2000부와 한문본 3000부를 인쇄한 후 프랑스의 김규식과 중국 내의 각국 공관, 국내의 각 지역 향교(鄕校) 등에 발송했다.

 

3. 137인의 파리장서 연대서명인

 

인터넷이나 각종 자료에는 성주 만세시위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송회근 등 여러 인물들을 파리장서 서명자로 표시하고 있으나 국가보훈부 등이 공개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서명을 했던 137인은 아래의 인물들뿐이다. 이외에 서명인들의 체포 이후를 대비해서 의도적으로 명단에서 빠뜨린 심산 김창숙 선생 등과 배후에서 장서운동을 도운 이들은 서명인이 아니었다.

 

(1)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면우(俛宇), 본관-현풍(玄風), 거주지-경남 거창, 영남(嶺南, 경상도) 유림 대표,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문인, 구속(징역 2:1919.4.18)병보석(1919.7.19)서거(逝去:1919.10.17),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2) 김복한(金福漢, 1860-1924) -지산(志山), 본관-안동(安東), 거주지-충남 홍주, 기호(畿湖, 경기·충청도) 유림 대표, 성균관장(1896.6.15-1896.8.14) 역임, 의병운동 전개, 구속(징역 1:1919.7.29)병 보석(1919.12),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3) 고석진(高石鎭, 1856-1924) -수남(秀南), 본관-장흥(長興), 거주지-전북 고창, 의병운동 전개, 1977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4) 류필영(柳必永, 1841-1924) -서파(西坡), 본관-전주(全州), 거주지-경북 안동,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최고령 서명자

 

(5) 이만규(李晩奎, 1845-1921) -유천(柳川), 본관-진성(眞城), 거주지-경북 안동, 1995년 건국포장

 

(6) 장석영(張錫英, 1851-1926) -회당(晦堂), 본관-인동(仁同), 거주지-경북 칠곡, 이진상 문인, 체포석방(징역 2년 구속됐다가 원판결 취소로 석방 : 1919.8.21),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7) 노상직(盧相稷, 1855-1931) -소눌(小訥), 본관-광주(光州), 거주지-경남 밀양, 구금병보석, 2003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8) 유호근(柳浩根, 1853-1925) -사가(四可), 본관-전주(全州), 거주지-충남 보령,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9) 안병찬(安炳瓚, 1854-1929) -규당(規堂), 본관-순흥(順興), 거주지-충남 청양,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77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0) 김동진(金東鎭, 1867-1952) -정산(貞山석포(石圃), 본관-선성(宣城), 거주지-경북 영주, 40여 일간 투옥,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 

 

(11) 권상문(權相文, 1850-1931) -해창(海蒼경재(耕齋), 본관-안동(安東), 거주지-대구 달성, 1995년 건국포장

 

(12) 김건영(金建永, 1848-1924) -해관(海觀),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무죄:1919.7.29), 1995년 건국포장

 

(13) 김창우(金昌禹, 1854-1937)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무죄:1919.7.29) 1995년 건국포장

 

(14) 신직선(申稷善, 1853-?) 거주지-충남 보령, 2002년 건국포장

 

(15) 김상무(金商武, 1892-1923) 본관-경주(慶州), 거주지-충남 서산, 200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16) 김순영(金順永, 1860-1934) -성연(聖然),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무죄:1919.7.29), 1996년 건국포장

 

(17) 이종경(李鍾璟, 1890-?) 본관-고성(固城), 거주지-경북 안동, 국가유공자 미지정

 

(18) 권상익(權相翊, 1863-1934) -성재(省齋),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무죄:1919.7.29), 1968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 고제만(高濟萬, 1860-1924) -죽계(竹溪), 본관-장흥(長興), 거주지-전북 고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20) 서건수(徐健洙, 1874-1953) -성암(性菴), 본관-달성(達城), 거주지-대구 달성, 1995년 건국포장

 

(21) 곽수빈(郭守斌, 1882-1951) -몽와(夢窩), 본관-현풍(玄風), 거주지-경북 고령, 1995년 건국포장

 

(22) 류연박(柳淵博, 1844-1925) -수촌(水村), 본관-전주(全州), 거주지-경북 안동, 1995년 건국포장

 

(23) 하겸진(河謙鎭, 1870-1946) -회봉(晦峯외재(畏齋), 본관-진양(晉陽), 거주지-경남 진주,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24) 최학길(崔鶴吉, 1862-?) 본관-화순(和順), 거주지-경북 김천, 국가유공자 미지정

 

(25) 이경균(李璟均, 1850-1922) -계헌(稽軒), 본관-연안(延安), 거주지-경북 김천, 2010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26) 이석균(李鉐均, 1855-1927) -소암(小庵), 본관-연안(延安), 거주지-경북 김천,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27) 조현계(趙顯桂, 1877-?)거주지-경남 산청, 국가유공자 미지정

 

(28) 하봉수(河鳳壽, 1857-1939) -백촌(栢村), 본관-진양(晉陽), 거주지-경남 진주,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29) 이수안(李壽安, 1859-1929) -매당(梅堂), 본관-재령(載寧), 거주지-경남 진주, 1995년 건국포장

 

(30) 하재화(河載華, 1860-1937) -여인헌(與人軒), 본관-진양(晉陽), 거주지-경남 진주, 국가유공자 미지정

 

(31)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약헌(約軒), 본관-진양(晉陽), 거주지-경남 산청, 체포출소 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1919.11.8.),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32) 박규호(朴圭浩, 1850-1930) -사촌(沙村),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진주, 1995년 건국포장

 

(33) 우하교(禹河敎, 1872-1941) -노암(魯菴), 본관-단양(丹陽), 거주지-대구 달성, 징역 6월 선고, 198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34) 김재명(金在明, 1852-1923) -일산(一山), 본관-선산(善山), 거주지-경남 거창, 1995년 건국포장

 

(35) 변양석(卞穰錫, 1859-1920) -구당(苟堂)?/하당(荷堂)?,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거창, 1995년 건국포장

 

(36)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송천(松川), 본관-장흥(長興), 거주지-전북 고창, 1977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37) 이승래(李承來, 1855-1927) -숙관(肅觀), 본관-전주(全州), 거주지-경남 거창, 1995년 건국포장

 

(38) 윤인하(尹寅河, 1853-1923) -심산(心山), 본관-파평(坡平), 거주지-경남 거창, 1995년 건국포장

 

(39) 김봉제(金鳳濟, 1860-1929) -?, 본관-경주(慶州), 거주지-충남 서산, 1995년 건국포장

 

(40) 박종권(朴鍾權, 1861-1927) -회우(晦宇),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거창, 2003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41) 윤철수(尹哲洙, 1868-1942) -해관(海觀), 본관-파평(坡平), 거주지-경남 거창, 1996년 건국포장

 

(42) 김택진(金譯鎭, 1874-1961) -동여(東黎), 본관-예안(禮安), 거주지-경북 영주,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43) 권상두(權相斗, 1870-1936) -군칠(君七),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의성, 1995년 건국포장

 

(44) 정태진(丁泰鎭, 1876-1960) -외재(畏齋), 본관-나주(羅州), 거주지-경북 문경, 수개월 수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45) 정재기(鄭在夔, 1851-1919) -성재(省齋), 본관-청주(淸州), 거주지-경북 성주, 자결순국(自決殉國), 1983년 대통령 표창·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46) 임한주(林翰周, 1871-1954) -성헌(惺軒), 본관-평택(平澤), 거주지-충남 청양,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83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대전현충원 안장

 

(47) 배종순(裵鍾淳, 1890-1947) -경당(敬堂), 본관-성주(星州), 거주지-경북 성주, 2014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48) 류진옥(柳震玉, 1871-1928) -거인(居仁), 본관-문화(文化), 거주지-경남 김해, 1999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49) 허평(許坪, 1882-1929) -처후(處厚), 거주지-경남 김해, 국가유공자 미등록

 

(50) 박상윤(朴尙允, 1881-1938) -경재(絅齋),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밀양, 2005년 건국포장

 

(51) 김지정(金智貞, 1889-1948) -성암(省菴), 본관-순천(順天), 거주지-충남 보령,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52) 이인광(李寅光, 1878-1934) 본관-성산(星山), 거주지-경북 고령, 구속 후 기소유예, 1995년 건국포장 수여, 대전현충원 안장

 

(53) 이학규(李學奎) 거주지-경북 성주, 노상직 문인, 국가유공자 미등록

 

(54) 안종달(安鍾達, 1878-1929) -단애(?), 거주지-경남 밀양, 2018년 건국포장

 

(55) 손상현(孫上鉉) 노상직 제자, 독립유공자 미지정

 

(56) 이이익(李以翊, 1868-1935) -만산(晩山), 본관-광주(廣州), 거주지-경북 칠곡, 2010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57) 유준근(柳濬根, 1860-1920) -벽서(碧棲우록(友鹿), 본관-전주(全州), 거주지-충남 보령, 최익현 문인, 의병운동 전개, 1977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58) 송홍래(宋鴻來, 1876-1948) -회천(晦川), 본관-야성(冶城), 거주지-경북 성주, 장복추·이만영 문인,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59) 송준필(宋浚弼, 1869-1943) -공산(恭山), 본관-야성(冶城), 거주지-경북 성주, 장복추·김흥락 문인, 196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60) 성대식(成大湜, 1869-1925) -오봉(五峯), 본관-창녕(昌寧), 거주지-경북 성주, 구속(징역 1:1919.5.20.)석방(무죄:1919.8.21), 1995년 건국포장

 

(61) 이기형(李基馨, 1868-1946) -성와(惺窩), 본관-성산(星山), 거주지-경북 성주,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62) 이덕후(李德厚, 1855-1927) -면와(勉窩), 본관-벽진(碧珍), 거주지-경북 성주, 이진상·장복추 문인, 체포석방(불기소:1919.4.30.), 1995년 건국포장

 

(63) 안효진(安孝珍, 1879-1946) -법강(法岡), 본관-광주(廣州), 거주지-경남 김해, 1996년 건국포장

 

(64) 강신혁(姜信赫, 1879-1966), -우산(友山), 본관-진주(晋州), 거주지-경남 창녕, 노상직 문인, 체포석방(기소유예 불기소:1922.3.17.), 2003년 건국포장

 

(65) 전양진(田穰鎭, 1873-1943) 본관-담양(潭陽), 거주지-충남 홍성, 체포석방(징역 8,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66) 이정후(李定厚, 1871-1950) -지와(止窩), 본관-벽진(碧珍), 거주지-경남 의령, 장승택·노상직 문인, 2005년 건국포장

 

(67) 노도용(盧燾容, 1878-1952) -인재(認齋), 본관-광주(廣州), 거주지-경남 창녕, 노상직 문인, 2005년 건국포장, 서울현충원 안장,

 

(68) 김태린(金泰麟, 1869-1927) -소강(小岡), 거주지-경북 청동, 국가유공자 미지정

 

(69) 김정기(金定基, 1884-1949) -겸산(兼山), 본관-김해(金海), 거주지-경북 청도, 노상직·조긍섭 문인, 체포석방(1919.4), 2009년 건국포장

 

(70) 송철수(宋喆洙) 국가유공자 미지정

 

(71) 문용(文鑛, 1861-1926) -겸산(謙山), 본관-남평(南平), 거주지-경남 합천, 1996년 건국포장

 

(72) 송호완(宋鎬完, 1863-1919) -의재(毅齋), 본관-은진(恩津), 거주지-경남 합천, 곽종석 문인, 수개월 투옥, 2006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73) 송호곤(宋鎬坤, 1865-1929) -항재(恒霽정산(靖山), 본관-은진(恩津), 거주지-경남 합천, 허전·정백규·곽종석 문인, 2005년 건국포장

 

(74) 권명섭(權命燮, 1885-1960) -춘번(春樊),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봉화, 곽종석 문인, 체포(1919.6.20.)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75) 이돈호(李墩浩, 1868-1942) 거주지-경북 영양, 1995년 건국포장

 

(76) 박정선(朴正善, 1879-1956) -연암(淵菴),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산청, 노상직 문인, 200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77) 황택성(黃宅性) 국가유공자 미지정

 

(78) 이상의(李相義) 본관-성산(星山)?/광주(廣州)?, 거주지-경북 고령, 국가유공자 미등록

 

(79) 최중식(崔仲軾, 1877-1951) 거주지-충남 홍성, 체포석방(징역 8,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80) 김양모(金瀁模, 1850-1935) -응암(鷹菴),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안동, 1996년 건국포장

 

(81) 권병섭(權昺燮)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무죄:1919.7.29), 국가유공자 미지정

 

(82) 권상원(權相元, 1861-1937)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83) 고순진(高舜鎭, 1863-1938) -만취(晩翠), 본관-장흥(長興), 거주지-전북 고창, 1986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84) 김택주(金澤往, 1855-1926) -연사(蓮史회석(晦石), 본관-경주(慶州), 거주지-전남 구례, 1995년 건국포장

 

(85) 정규영(鄭奎榮, 1860-1921) -한재(韓齋), 본관-진양(晉陽), 거주지-경남 하동, 허전 문인, 2013년 건국포장

 

(86) 송호기(宋鎬基, 1866-1935) -정와(貞窩), 본관-은진(恩津), 거주지-경남 합천, 체포석방(1919.6.20.), 2005년 건국포장

 

(87) 이길성(李吉性, 1874-1935) 거주지-충남 홍성,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88) 송철수(宋哲秀, 1863-1955) -상헌(尙軒), 본관-은진(恩津), 거주지-경남 합천, 2005년 건국포장

 

(89) 박익희(朴翼熙, 1853-1922) -죽포(竹圃), 본관-밀양(密陽), 거주지-경남 합천, 2005년 건국포장

 

(90) 송재락(宋在洛, 1860-1929) 호는 계산(桂山), 본관-은진(恩津), 거주지-경남 합천, 2006년 건국포장

 

(91) 권상위(權相瑋, 1895-1943) 본관-안동(安東), 거주지-경북 봉화,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92) 김병식(金秉植, 1856-1936) -만원(晩畹),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안동,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93) 이능학(李能學, 1840-?) 거주지-경북 선산, 대전현충원 안장

 

(94) 이현창(李鉉昌, 1865-1930) -치당(恥堂), 본관-경산(京山), 거주지-경북 성주, 장복추·송준필 문인, 체포(1921.9.16)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8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95) 이수인(李洙仁, 1880-1963) -침산(枕山), 본관-성산(星山), 거주지-경북 성주, 이승희·곽종석 문인, 체포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96) 박준(朴埈) 국가유공자 미지정

 

(97) 이봉희(李鳳熙, 1880-1958) -인와(忍窩), 본관-성산(星山), 거주지-경북 성주, 198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98) 박은용(朴殷容, 1880-1949) -남강(南岡), 본관-태인(泰仁), 거주지-전남 장성, 의병활동, 1977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99) 정근(鄭根) 국가유공자 미지정

 

(100) 백관형(白觀亨, 1861-1928) 거주지-충남 보령, 의병활동·서울 3·1운동 참여로 8개월 복역, 198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01) 전석구(全錫九, 1896-1970) 거주지-경남 합천, 2005년 건국포장

 

(1020 송주헌(宋柱憲, 1872-1950) -삼호재(三乎齋), 본관-여산(礪山), 거주지-전남 고흥, 의병운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대전현충원 안장

 

(103) 전석윤(全錫允, 1894-1966) 거주지-경남 합천, 2005년 건국포장

 

(104) 김영식(金榮植) 국가유공자 미지정

 

(105) 김양수(金陽洙, 1849-1930) -유재(柳齋), 본관-김해(金海), 거주지-전북 정읍, 의병운동 참여, 2001년 건국포장

 

(106) 김상진(金相震, 1897-1946) 거주지-경남 합천, 2005년 건국포장, 최연소 서명자

 

(107) 장영구(張永九) 국가유공자 미지정

 

(108) 이내수(李來修, 1860-1933) -양은(陽隱), 본관-전주(全州), 거주지-충남 논산, 부친 이학순(李學純, 1843-1910) 한일합방시 일본 은사금 거절하고 자결순국, 의병활동 전개, 1983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대전현충원 안장

 

(109) 조재학(曺在學, 1861-1943) -오당(迂堂), 본관-창녕(昌寧), 거주지-경남 의령, 최익현·김평묵·송병선 문인, 의병활동 참여,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 결성 활동, 1980년 건국포장·1990년 애국장

 

(110) 김영찬(金永贊) 국가유공자 미지정

 

(111) 정재호(鄭在浩, 1891-1943) 거주지-경북 영천·만주 동북 3, 여러 차례의 투옥 끝에 용정형무소에서 옥사,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 서울현충원 위패 안장

 

(112) 김덕진(金德鎭, 1864-1947) -낙계(樂溪), 본관-안동(安東), 거주지-충남 청양, 의병활동 참여, 체포(1919.6.13)석방(징역 6, 집행유예 2:1919.7.29), 1980년 건국포장·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13) 손진창(孫晋昌, 1852-1942) -화려(花旅), 본관-경주(慶州), 거주지-경북 경주, 2014년 건국포장

 

(114) 손병규(孫秉奎) 거주지-경북 경주, 국가유공자 미지정

 

(115) 김병식(金炳軾, 1856-1936) -제경(濟卿), 본관-의성(義城), 거주지-경북 안동,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116) 이태식(李泰植, 1875-1951) -수산(壽山), 본관-고성(固城), 거주지-경남 의령, 곽종석 문인,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

 

(117) 이만성(李萬成, 1872-1922) -독산(篤山), 본관-경산(京山), 거주지-경북 성주, 장석영 문인, 1996년 건국포장

 

(118) 이계원(李啓源, 1871-1944) -소강(小岡), 본관-경산(京山), 거주지-경북 성주, 장석영·장복추 문인, 1995년 건국포장

 

(119) 이계준(李季埈, 1868-1929) -암관(岩觀), 본관-경산(京山), 거주지-경북 성주, 이탁소·장석영·장복추 문인, 1995년 건국포장

 

(120) 우성동(禹成東, 1861-1920) 거주지-대구 달성, 서찬규 문인, 1995년 건국포장

 

(121) 김학진(金學鎭) 국가유공자 미지정

 

(122) 우찬기(禹纘基, 1861-1921) -성암(誠菴), 본관-단양(丹陽), 거주지-대구 달성, 서찬규·전우 문인, 1995년 건국포장

 

(123) 이병회(李柄回, 1865-1927) -만회(晩悔), 본관-광산(光山), 거주지-경북 고령, 2009년 건국포장

 

(124) 윤양식(尹亮植, 1866-1944) 본관-파평(坡平), 거주지-경북 고령, 1995년 건국포장

 

(125) 김용호(金容鎬, 1853-1924) -일암(一菴), 본관-김해(金海), 거주지-대구 달성, 송병선·송병순 문인, 2003년 건국포장

 

(126) 이복래(李福來) 국가유공자 미지정

 

(127) 곽걸(郭杰, 1868-1927) -국전초부(菊田樵夫), 본관-현풍(玄風), 거주지-경북 고령, 1998년 건국포장

 

(128) 우하삼(禹夏三) 본관-단양(丹陽), 거주지-대구 달성, 국가유공자 미지정

 

(129) 우경동(禹涇東, 1876-1960) -시식(是湜), 본관-단양(丹陽), 거주지-대구 달성, 1995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130) 박순호(朴純鎬, 1873-1934) -덕암(德巖), 거주지-대구 달성, 서찬규·김용호 문인, 2004년 건국포장

 

(131) 우승기(禹升基, 1875-1948) -월계(月溪), 본관-단양(丹陽), 거주지-대구 달성, 서찬규 문인, 1995년 건국포장

 

(132) 조석하(曺錫河, 1883-1955) -학단(學丹), 거주지-대구 달성, 1995년 건국포장

 

(133) 김동수(金東壽, 1865-1931) -우은(愚隱), 거주지-경남 합천, 곽종석 문인, 2010년 건국포장, 대전현충원 안장

 

(134) 박재근(朴再根, 1881-1950) -후암(後菴운석당(雲石堂), 본관-밀양(密陽), 거주지-대구 달성, 이종기 문인, 2009년 건국포장

 

(135) 이진춘(李鎭春) 국가유공자 미지정

 

(136) 규린(麟, 1856-1937) 호-석암(石庵), 본관-학성(鶴城), 거주지-울산·경남 양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137) 이기정(李基定, 1883-1955) -이재(邇齋), 본관-성산(星山), 거주지-경북 성주, 이승희·곽종석 문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4. 서명의 진행과 결과

 

장서 작성 및 국·내외 발송 사실을 몰랐던 조선총독부는 191942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경북 성주군 성주면의 장날에 맞춰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만세 시위가 밤 11시가 넘도록 진행되며 일제 군경의 발포로 2인이 사망하고 7인이 부상하는 가운데 체포한 주도인물들 중 장서에도 서명한 송준필(宋浚弼) 선생의 아들 송회근(宋晦根, 1877-1949) 선생이 가지고 있던 파리장서 필사본을 적발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명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검거 활동에 들어갔다.

 

영남 유림을 대표했던 곽종석 선생은 한국 유림의 대표로 가장 먼저 이름을 기재했는데, 74세로 당시로서는 매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유치되었다가 재판을 거쳐 2년형이 확정되었으나 병이 악화되어 3개월만에 보석(保釋)으로 풀려났고, 옥고(獄苦)를 이기지 못한 채 1919년 10월17일 서거(逝去)했다.

 

기호 유림을 대표했던 김복한 선생은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는데, 역시 60세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재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었으나 병보석으로 5개월 여만에 풀려났고 사후인 1963년에 곽종석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됐다.

 

 

경북 안동에 거주했던 류필영 선생은 1841년생으로, 당시 79세였음에도 최고령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고, 퇴계 이황 선생의 11대손으로 1910년 나라가 망하자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선생의 동생인 이만규 선생도 형님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의 항일 정신의 맥을 이어 동참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의 9대손으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나섰으며, 곽종석 선생의 권유로 장서 초안을 작성하고 서명도 했던 장석영 선생은 거주하던 경북 성주의 장날에 만세운동을 열기로 계획하여 191942일 실행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경남 밀양의 노상직 선생은 제자들인 배종순, 강신혁, 박상윤, 허평, 이학규, 류진옥, 안효진, 노도용, 이정후, 박정선, 이돈호, 손상현 선생 등과 함께 참여했다.

 

김복한 선생과 함께 홍주읍성 점령을 주도하고 3부자가 의병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안병찬 선생도 서명자에 이름을 올렸으며, 경남 진주의 대표적 유림이었던 하겸진 선생도 몇몇 친척과 함께 서명했다.

 

경남 산청의 하용제 선생은 출소 후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했으며, 경북 성주의 정재기 선생은 191948일 성주경찰서로부터 출두 통보를 받고 이에 불응한 채 다음날인 49일 아침 자택에서 자결 순국했다.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 선생의 문인으로 하동향교 전교를 지내기도 했던 정규영 선생은 당시 경남 최고의 부자로 알려졌는데, 여러 학교의 설립과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고 파리장서에도 참여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모습을 보였다.

 

경남 합천군 출신 11인 중 계산 송재락, 의재 송호완, 상헌 송철수(족보명 송기용(宋箕用)), 항재 송호곤, 정와 송호기 선생 등 5인은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종친으로 함께 했으며, 평소 친분을 유지하던 겸산 문용, 죽포 박익희 선생과 같이함으로써 합천군 대병면에서만 7인이 서명했다.

 

부친 이학순 선생이 일본의 은사금을 거절하고 자결순국한 후 아들 이내수 선생은 평생 의병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경북 영천과 중국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정재호 선생은 여러 차례의 투옥 끝에 중국 만주의 용정형무소에서 옥사(獄死)했다.

 

유림의 항일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연구가 워낙 미진해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내용들이 상당하겠으나 이렇듯 파리장서 서명자들의 활동은 본인의 희생을 넘어 지역과 여론에도 반영되어 3·1 만세운동의 확산과 이후의 독립운동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측의 재판자료에서는 직업을 별도로 표시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으나 예를 들어 곽종석 선생의 재판자료에는 농사짓는 유생혹은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유생을 뜻하는 농유생(農儒生)’으로 적기도 했다.

 

그동안 후손들과 학자들,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으로 137인 상당수가 국가보훈부의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으나 이종경(李鍾璟), 최학길(崔鶴吉), 조현계(趙顯桂), 하재화(河載華), 허평(許坪), 이학규(李學奎), 손상현(孫上鉉), 김태린(金泰麟), 송철수(宋喆洙), 황택성(黃宅性), 이상의(李相義), 권병섭(權昺燮), 박준(朴埈), 정근(鄭根), 김영식(金榮植), 장영구(張永九), 김영찬(金永贊), 손병규(孫秉奎), 김학진(金學鎭), 이복래(李福來), 우하삼(禹夏三), 이진춘(李鎭春선생 등은 확인 가능한 자료의 부재 등으로 지금까지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이들 중 몇 분은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이후의 행적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의 회고에 의하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제의 검거로부터 신진 유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40세 이상에게만 서명을 받기로 했었다고 하는데, 실제 서명자들의 생년을 분석해보면 최고령인 1841년생 류필영 선생부터 대부분은 그 기준을 부합하지만 40세 미만(1881년생 이하)인 김상무(金商武, 1892년생, 28), 이종경(李鍾璟, 1890년생, 30), 곽수빈(郭守斌, 1882년생, 38), 배종순(裵鍾淳, 1890년생, 30), 허평(許坪, 1882년생, 38), 박상윤(朴尙允, 1881년생, 39), 김지정(金智貞, 1889년생, 31), 김정기(金定基, 1884년생, 36), 권명섭(權命燮, 1885년생, 35), 권상위(權相瑋, 1895년생, 25), 전석구(全錫九, 1896년생, 24), 전석윤(全錫允, 1894년생, 26), 김상진(金相震, 1897년생, 23), 정재호(鄭在浩, 1891년생, 29), 조석하(曺錫河, 1883년생, 36), 박재근(朴再根, 1881년생, 39), 이기정(李基定, 1883년생, 37) 17인이 그 기준 아래의 젊은 유림들이었고, 최연소는 1897년생으로 경남 합천에 거주하던 김상진 선생이었다.

 

국가유공자로 등록되면서 유해(遺骸) 상당수가 국립묘지로 이장(移葬)했는데,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서울현충원에는 노도용, 정재호 두 분이 모셔졌으나 정재호 선생은 1943년 중국 만주 용정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유해가 봉환되지 못한 채 위패만 모셔져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대전현충원에는 노상직, 유호근, 김상무, 이경균, 이석균, 하봉수, 우하교, 박종권, 김택진, 정재기, 임한주, 배종순, 류진옥, 김지정, 이인광, 이이익, 송준필, 송호완, 권명섭, 박정선, 최중식, 이길성, 권상위, 이능학, 이수인, 박은용, 송주헌, 이내수, 우경동, 김동수 선생 등 30인이 모셔진 것으로 확인된다.

 

5.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성균관에서 매년 제작하는 벽걸이용 달력에는 411일이 임시정부수립일/유림파리장서독립청원의날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왜 그렇게 했는지 알아봤으나 분명하게 대답하는 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작성한 파리장서 영문번역문을 파리로 보낸 날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파리장서는 ‘19193월 일이라고 하여 특정 날짜를 정하지 않은 채 작성일이 표시됐고, 당시는 음력을 당연하게 사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여기서의 3월은 지금의 양력으로는 4월일 가능성이 높으나 여러 자료를 살펴보더라도 몇 일인지 확정해서 표시되지는 않았다.

 

또한 파리장서 원문의 작성경위에 대해서 아직도 주도했던 이들의 집안마다 주장이 다른 것처럼 중국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의 손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넘어간 날짜도 분명하지 않은 듯하므로 구체적인 증거 없이 지금처럼 411일을 유림파리장서독립청원의날이라고 표시하는 것도 맞지 않는 듯하고, 더군다나 성균관을 비롯해 지역에서도 이날에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을 기리거나 그날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추모 및 기념행사가 열리지 않으므로 지금처럼 성균관 제작의 달력에 표시되는 것은 이후에는 중단되어야 할 듯하다.

 

반면에 임시정부수립기념일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인 임시의정원이 1919410일 밤 10시부터 10개조로 이뤄진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철야 심의한 후 다음날인 411일 오전에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발표하고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이날의 기념식을 1989년까지 주관하다가 지난 19891230일에 국가 기념일이 되면서 1990년 기념식부터는 정부가 주관하고 413일로 시행되던 날짜도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부터는 411일로 변경되어 진행되며 올해 105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도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 주관으로 지난 411일 오전 10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의 서대문독립공원 옆에 위치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비롯해 전국 각 지자체 단위마다 많은 곳에서 진행하는 등 역사적 근거가 존재하고, 관련 단체의 자체적인 기념식이 이뤄졌으며, 국가 기념일 지정과 국가 차원의 기념식 주관 등의 절차를 하나씩 밟아왔으므로 소위 유림파리장서독립청원의 날과는 많이 다르다.

 

파리장서운동은 역사적 의미와 내용,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 미친 영향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유림, 학계, 정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거의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

 

관련 연구도 미미하다보니 파리장서 원문이 작성된 경위 및 변천 과정, 해외에서의 번역 및 배포 과정, 국내 전달체계, 각 서명인의 구체적인 서명 과정, 국내 유수(有數)의 유학자나 영남·호남·충청 이외의 지역에서 단 1명도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와 과정, 영남·호남·충청에서의 서명인 교섭 및 참여·불참 과정, 서명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나 여러 방면에서 장서운동의 성공을 위해 도운 조력자들의 모습, 조선총독부 내부의 논의 및 대응방침 결정 과정, 서명인 체포가 진행되며 달라지거나 변화된 일제의 모습,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되는 서명인들의 공훈 내용이 천편일률(千篇一律)적으로 비슷하게 된 이유, 실제 사용되는 이름과 족보에서의 이름 및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등록 이름이 다른 경우의 처리방법, 파리장서에 대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 주요국 정부와 언론의 반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치했던 중국 상하이의 현지 반응과 중국 정부의 움직임 등 일부 밝혀지거나 아예 알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과 맥락 파악이 필요하다.

 

곽종석 선생이 처음 장서의 초안을 맡겼던 이들 중 한 분인 장석영 선생이 작성했던 소위 회당본(晦堂本)’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지난 20096월 대구 MBC에서 파리장서운동 90주년 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 <붓의 투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장 선생이 출옥 후 자신의 기억에 입각한 일기체 형식으로 1919년 음력 24일부터 111일까지의 292일간의 일을 기술한 흑산록(黑山錄)을 집필했고 그 안에 회당본이 게재된 것이 발견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초안을 맡겼던 또 다른 한 분인 제자 김황 선생이 스승의 명을 받아 고종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서울인 경성(京城)에 오갔던 1919213일부터 529일까지 3·1운동을 전후해 보고 느끼고 파리장서운동을 위해 노력한 과정이 적힌 기미일기(己未日記)도 세상에 알려지며 운동의 진행과정과 성격을 구체화시켰다.

 

이렇듯 파리장서운동의 전체적인 파악과 이해를 위해서는 직접 관련된 당사자인 선배 유림과 조상들이 남긴 문집, 편지와 메모 등 각종 글은 물론 그들과 이웃하며 살았거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기억 속의 이야기 등까지 자료들을 모으고, 이것들을 체계화시키는 연구와 연구를 뒷받침하는 지원 프로그램 구성은 물론 정부와 사회, 국민들에게 진행의 성과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며, 지원을 요청하는 종합적인 시스템이 필요해보인다.

 

이웃종교인 불교는 임진왜란, 한국전쟁, 일제 독립운동을 펼친 스님들의 활약과 희생을 기리는 호국의승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것과 호국불교기념관 건립을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정치권에 요구했고, 정부와 정치권은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굳이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호국(護國)이나 항일(抗日), 독립(獨立)의 주제로 보자면 유교, 유림에 속하는 인사들의 숫자가 훨씬 많고, 활약상의 강도가 대단히 강함은 상식에 속할 정도로 보통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아는 유림 위인들의 이름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나라를 잃고 2천만 동포가 식민지배의 압제(壓制)에 억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던 시절, 내 한 몸 편하게 살면 그만이었을 경제적, 사회적 위상을 가졌던 유림들은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우국충정(憂國衷情, 나라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과 자주독립(自主獨立,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거나 기대지 않고 주권을 행사함)의 마음으로 파리장서운동을 펼쳤다.

 

지금은 부끄럽지 않은 후배 유림, 후손들이 되어야 할 때이다.

 

프로필 사진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