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자의 학덕을 비롯한 역대 성현의 뜻을 본받기 위해 봉행하는 성균관의 석전은 유교의 최대 축제이다. 특히 격식에 맞춰 경건하게 봉행하는 일무는 유교의례의 꽃으로 불린다.
석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이기 때문에 춘⸱추기 석전이 열리면 봉행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사진작가나 기자들의 발걸음도 분주하다.
하지만 여기에 아픈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랬듯이 일제는 조선 병탄 이후 유교의 사상 내용에서부터 각종 의례에까지 광범위한 왜곡을 자행했다.
일제는 성균관의 문묘를 일본의 신사처럼 만들었고, 학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을 정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석전의 일무 역시 일제 강점 시기에 대부분 망실됐다. 일무를 담당하던 예악인들이 모두 흩어지게 됨에 따라 일무의 올바른 전승이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광복 이후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노력으로 석전의 전승은 그 맥이 끊어지지 않았고, 일무는 성균관대 입학생들이 단과대학별로 맡아 공연을 하며 이어갔다.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석전, 그리고 일무의 전승 주체가 성균관과 성균관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석전은 지난 1986년 11월1일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당시 지정조사보고서의 조사자는 성경린 문화재위원과 유승국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이었다.
성경린 선생은 지정조사보고서에서 “종래 안이하고 간략하던 춤사위를 지양하고 ‘반궁예악서(반궁예악전서)’에 빙거하여 문묘 일무의 옛 모습을 돌이킨 것은 가위 획일적인 개선이오, 장거라고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선생은 1972년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일무의 무용을 바로잡는 일, 이것을 더는 미루지 말고 바삐 서둘러야 하겠다.<중략> 궁여지책으로 그런 삼방배와 간척을 뚝딱거리는 간이한 무작이 안출된 게 아닌가. 이것은 정말 하루속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석전의 무형문화재 지정 전후 성경린 선생은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그것의 핵심은 ‘삼방배’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일무는 ‘삼방배’였고 이 ‘삼방배’가 석전 일무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지정조사보고서에서 빙거한 ‘반궁예악서’의 일무도 ‘3진3퇴’이고 세종실록 등 각종 기록도 ‘3진3퇴’인데 이 무슨 궤변인가.
일제에 의해 왜곡된 내용인 ‘삼방배’는 ‘한 자리에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구부렸다 폈다’하는 것으로서 아무런 의미도, 근거도 없다. 반면 ‘3진3퇴’란 각종 문헌에 기록된 것으로 ‘앞으로 세 번 나아가서 공경의 예를 표하고, 뒤로 세 번 물러가 사양⸱겸양의 미덕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난해 추기석전 당시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에서는 지정 당시와 홀기에 일무는 문무와 무무로 구성돼 있으나 문무로만 구성했고, 독축 후 행해지는 일무 누락 등 제례 절차에 따른 춤의 유무 및 형태 등이 지정 당시와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정조사보고서에 기준 근거로 적시된 반궁예악서에는 초헌무 32동작, 아헌무 32동작, 종헌무 32동작으로 구성돼 있고 무무의 동작은 없으며 지정 당시 무무는 어떠한 근거자료도 제시된 바 없다.
또한 지정조사보고서에도 공악 부분에 ‘헌가일무 없음’으로 표기돼 있고 성균관 석전 홀기에도 음악만 연주하는 것으로 명기돼 있다.
지정 당시 기준으로 연행하라고 하면서도 지정조사보고서의 기준 근거도 무시하고 자기들이 말하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내놓지도 않으며, 무려 20여 년 동안 수정 보완은 장기적 연구를 통해 추진하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2006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특성화사업단, 유교문화연구소의 지원과 (사)국가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보존회, 석전교육원, 한국석전학회의 후원으로 복원한 석전 일무는 중국에서도 사라진 세계 유일무이의 의례로서 한국유교 및 문화계, 무용계의 역량을 과시한 쾌거였다.
20여 년 전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노력으로 제대로 복원된 일무를 지키고 보완 계승하는 것은 후속세대의 당연한 의무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음에도 성현에게 거짓 제사를 올리려고 한다면 이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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