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p)
건원 윤상철(대유학당 대표)
상육은 지나치게 건너다 이마를 멸했기 때문에 흉하니 잘못을 탓할 사람이 없다(대과괘 상육효).
정조(재위 1752-1800)는 조선을 정조 이전과 이후로 가를 만큼 정치·경제·문화의 대전환기를 겪은 임금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민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학이 발전했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주자학 일색이던 유교적 우주관에 변화가 왔던 것이다.
정조는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서학의 과학기술적 측면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규장각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 인원을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초계문신으로 채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한 것이다.
정조는 등극할 때에 정치적 배경이 약한 임금이었다.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노론과 외가(홍씨 일족)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큰 역할을 했으므로 사도세자의 아들이 임금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도세자가 죽자 영조는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영조의 죽은 맏아들)의 후사로 삼았다. 뒤주 안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야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정조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이 김종수이다. 그는 세손시강원이 되자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정조는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하면서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이고, 서경에서 말하는 황극이며, 모든 냇물을 밝게 비춰주는 달이라고 자칭하였다. 우주의 중심이며 시작이고, 백성과 관리의 중심이며 기준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학식이 높은 신하가 임금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경연제도를 임금이 신하를 가르치는 교학제도로 바꾸었다. 그 대표적인 체계가 초계문신제도이다. 이것은 정조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 또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하를 양성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문신 중에 발탁해 40세까지 교육을 시켰고,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경서 및 역사서 등의 공부에 매진해야만 되는 엄청난 양의 과제를 주었다. 얼핏 보면 학자 양성이라는 아주 좋은 제도였지만 대부분의 초계문신들은 과중하고도 강압적인 분위기를 견뎌내기 힘들어 했다.
『주역』 시험을 봐서 합격한 사람에게 곧바로 사서로 비유하면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 묻고, 『대전통편』으로 보면, 『소학』으로 보면 … 등등으로 끊임없이 질문했다. 따라서 아무리 잘하는 사람도 결국 불합격을 맞을 수밖에 없고, 임금 앞에서 진땀을 흘리며 망신과 질책을 받았다.
정조시대 초계문신으로 뛰어났던 정약용도 “이미 합격시켜 백성을 다스리는 지위에 앉혀놓고, 몽매한 학생처럼 시험하고, 다시 고과(考課)하니 이것이 어찌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인가? 또 임금 옆에 앉아 여러 가지 경서를 강하도록 하니 잘못 강할 때는 황송해서 땀이 등을 적시는데 잘못하면 어린 학생같이 때리며 단속한다. 그러니 초계문신을 거친 자는 기상이 움츠러들어 임금 앞에만 서면 감히 일의 잘잘못을 논하지 못하며 종신토록 머뭇거리게 된다”라고 하며 ‘초계해서 시험하는 제도는 당장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신하를 잘 가르쳐서 좋은 관리를 만든다는 훌륭한 뜻도 과정을 급하게 하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상대에게는 좋은 뜻은 보이지 않고 고통만 느끼게 된다. 정조 사후 초계문신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이유이다.
역에서도 ‘지나치면 흉하다. 내가 지나치게 해서 벌어진 일이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