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10일 계유정난 발생일 기사(수정).jpg)
『단종실록』 권8, 단종 1년(1453) 10월10일 기사에 계유정난의 첫날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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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그려진 세조 어진(御眞) 초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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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지역을 관할하던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1399-1402년에 걸쳐 조카인 제2대 황제 건문제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기고,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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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숨진 단종의 장릉(莊陵)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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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권32, 숙종 24년(1698) 11월6일 기사에 '단종의 복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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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이 매년 개최하는 단종문화제가 올해는 4월25일부터 27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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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대유학당 대표·성균관대 철학박사
1. 정난(靖難)의 의미와 발생 배경
1453년(단종 1) 음력 10월10일을 피로 물들인 계유정난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뒷날의 세조)이 단종(재위 1452-1455)의 보좌 세력이자 고명대신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1387-1453),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등 수십 인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지금 인터넷에서는 ‘정난(靖難)이 옳다’ 혹은 ‘정란(靖亂)이 바른 표현이다’라는 두 개의 주장이 있으나 ‘정난’은 국가의 위급한 어려움(難)을 평안하게 안정시켰다(靖)는 뜻이고, ‘정란’은 난리가 난 것(亂)을 평안하게 안정시켰다(靖)는 뜻으로 다르다. 당시 아무런 난리가 나지 않았고, 성공한 쿠데타이므로 ‘정난’이 타당하다. 더구나 수양대군 일파가 쿠데타를 성공한 뒤에 어린 단종을 협박해 정난공신(靖難功臣) 43인을 책봉하게 했으므로 ‘정난’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수양대군 세력이 직접 만든 호칭이기도 하다.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제4대 국왕 세종(재위 1418-1450)이 승하하고, 곧이어 장남이었던 문종(재위 1450-1452)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단종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숙부 수양대군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런 야심이 없다는 뜻을 보이고자 명나라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이보다 먼저 명나라에서는, 50여 년 전인 1399-1402년에 숙부(연왕)가 조카(건문제)를 몰아내고 제3대 황제(영락제, 재위 1402-1424)가 되었던 ‘정난지변(靖難之變)’이 있었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조카를 몰아내고 조선의 임금이 되어도, 영락제의 후손인 경태제(제7대 황제, 재위 1449-1457)가 큰 반대를 안 할 것이지만 그래도 명나라의 대신들과 친목을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자빈이었던 어머니 현덕빈(顯德嬪, 1418-1441, 문종 즉위 후 현덕왕후로 추존(追尊)됨)이 본인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문종이 왕비를 들이지 않았으므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할 대비(大妃)조차 없었다. 문종이 승하할 때 고명(顧命, 임금이 유언으로 세자나 종친, 신하 등에게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을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의 대신들과 세종 때부터 부탁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들이 보좌할 뿐이었다.
세종대왕이 ‘늘 형제간의 우애가 돈돈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수양대군 등 왕자들에게 '어린 단종을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으므로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을 경계하지 않았다. 죽이려고 직접 집까지 찾아갔을 때도 김종서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대문 밖까지 나와 맞이했고, 주변을 지키는 이들조차 제대로 없이 방심하다가 수양대군의 종에게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나 궁궐로 들어 가려다가 끝내 붙잡혀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음)된 것만 보더라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종서와 그의 가족은 집에까지 찾아가 은밀히 제거하고, 다른 조정 원로들은 ‘국왕의 명령이니 궁궐로 들어오라’는 가짜 연락을 전하여 경복궁으로 들어오는 대로 곧바로 죽이는 등 과감하고 신속하게 처리했지만 이렇다 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단종에게는 '흉모(兇謀)를 꾀한 간사한 도당을 모두 복죄(伏罪)했다'(『단종실록』 권8, 단종 1년(1453) 10월11일)라고 보고하며 단숨에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한 수양대군은 2년 뒤인 1455년 윤6월11일에 아무런 실권이 없던 단종으로부터 강제 선위를 받아 조선의 제7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명분 없는 왕위 찬탈이었으므로 정사(靖社, 사직을 평안하게 안정시킴)도 아니고, 반정(反正,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음)도 아니며, 그저 어지러워질지도 모르는 것을 안정시켰다는 ‘정난’이라고 한 것이다.
2. 맹인 술사 홍무광(洪武光)과의 만남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의 충고를 듣고 명나라에 가서 대신들과 친분을 쌓고 김종서·안평대군 등을 죽일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다. 하지만 자신도 조카로부터 왕위 찬탈을 한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늘이 도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맹인(盲人) 술사 홍무광과의 야사(野史, 민간에서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가 전한다.
홍무광을 찾아간 수양대군은 밥상만한 크기의 흑판에 글자를 썼다. 홍무광이 더듬더듬 손으로 글자를 읽고는 “밭 전(田)자를 쓰셨군요. 하늘에 두 해가 떴으니(쌍일병립(雙日竝立), 田=日+日) 임금이 둘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수양대군이 세로획(ㅣ), 특히 가운데 세로획을 강하게 눌러쓰니 양쪽으로 ‘날 일(日)’자가 된 것이다.
눈이 보이지도 않는 맹인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깜짝 놀랐으나 곧 시치미를 떼고 “아니, 무슨 사람 잡을 소리를 하오. 다시 써볼 테니 잘 해석해 주시오”라고 말하고는 다시 ‘밭 전(田)’자를 썼다.
홍무광이 역시 더듬거리며 읽더니 “같은 전(田)자지만 이번에는 사방으로 입이 열리게 쓰셨습니다. 백성들의 말이 걱정되셨군요(田=口+口+口+口)” 이번에는 가운데의 ‘열 십(十)’자를 강하게 눌러쓰니 ‘전(田)자가 사방으로 분리되어 ‘입 구(口)’자 네 개가 된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싶어서 모든 준비를 다했지만 백성의 입이 걱정된다는 속마음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을 본 수양대군은 홍무광의 신통함에 홀딱 반했다. 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지 않는가! 그래서 자신의 신분과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찌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겠나?” 이제는 서로 목숨을 내놓은 문답이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쓰신 글자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따르라는 것인가?” “왼쪽을 치고 오른쪽을 치면 왕이 되는 것입니다(좌벌우벌즉왕(左伐右伐卽王, ‘田’자에서 왼쪽 세로획과 오른쪽 세로획을 잘라내면 ‘王’자가 된다)” 홍무광의 말은 더 대담했으니 이 말은 단종의 좌·우 측근을 쳐서 없애라는 뜻이었다.
수양대군은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노루 사냥을 할 때면 일곱, 여덟 마리를 잡으면서 온몸에 피 칠갑을 하는 게 취미였는데, 그동안 사람들을 속이느라 불경을 사경(寫經, 후세에 전하거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경문을 베끼는 일)하고, 번역하는 등 얼마나 억누르고 살았던가! 그런데 하늘이 낸 신통한 술사가 좌우를 닥치는 대로 치라고 하지 않는가! 가슴이 확 트이는 말이었고, 곧바로 한명회(1415-1487)에게 살생부를 만들라고 했다.
1453년(단종 1) 음력 10월10일 거사 당일 밤에 좌의정 김종서를 직접 찾아가 그와 아들 김승규(1416-1453)를 철퇴로 때려죽이고, 곧바로 임금의 명령이라고 조작하여 백관을 불러들이면서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1453), 병조판서 조극관(?-1453) 등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그날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친동생 안평대군(1418-1453)과 문무백관 중 자신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 이들과 가솔들까지 수없이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처와 딸 등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세력은 하급 관리와 하급 무사가 주축이었고, 종1품의 조정 중신은 정인지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 발생했던 무신의 난 정도 수준이었고, 그래서인지 모반죄를 씌운 이들의 가족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처분했다.
3. 술사의 운명
야사에 의하면, 거사를 치르는 날에 수양대군은 홍무광을 한 번 더 방문해 그의 앞에서 ‘한 일(一)’자를 썼다고 한다. 홍무광이 손으로 더듬으며 읽다가 “‘흙 토(土)’자에 ‘한 일(一)’을 더하면 ‘임금 왕(王)’자가 되니 임금이 되실 것입니다”고 하며 벌떡 일어나 수양대군에게 큰 절을 하며 하례를 드렸다.
집으로 돌아간 수양대군은 심복인 권람(1416-1465)을 불러 “지금 곧바로 홍무광의 집으로 가서 점을 보러 왔다고 하고 ‘한 일(一)’자를 써보게. 반드시 한 일(一)자여야 하네”라고 당부했다.
권람이 ‘한 일(一)’자를 쓰며 자신의 앞날에 대해 묻자 홍무광은 “손님이 쓰신 ‘한 일(一)’자는 ‘날 생(生)’자를 쓸 때는 제일 마지막 획이고, ‘죽을 사(死)’자를 쓸 때는 시작하는 획입니다(‘생(生)’자엔 종획(終劃)이고, ‘사(死)’자엔 시획(始劃)이다). 그러니 당신이 죽지 않으면 당신을 낳으신 분이 돌아가시겠습니다”라고 했다. 권람이 ‘한 일(一)’자를 쓸 때, 거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음이 떨린 관계로 중간 획이 끊어지다시피 해서 ‘⚋’비슷하게 써진 것이다. 글자 하나에 끝과 시작을 동시에 나타낸 셈이 되었다.
깜짝 놀란 권람이 다급하게 고향으로 내려갔더니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하직한 후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람은 수양대군, 한명회 등 12명과 함께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되었는데(『단종실록』 권8, 단종 1년(1453) 10월15일), 참여도 하지 않은 사람이 1등이 되었을 리가 없으므로 홍무광과 권람의 대화는 신빙성이 많지 않아 보인다.
혹은 홍무광이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 기록에 없는 것으로 판단하면, 권람이 수양대군의 명을 받아 죽였을지도 모른다. 김종서를 죽일 때도 어둠 속에서 편지를 들이밀고 “읽어보라”하고는 철퇴로 내리쳤는데, 홍무광에게도 글자를 풀이해 보라 하고 철퇴를 내리쳤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생(生) 자엔 종획(終劃)이요, 사(死) 자엔 시획(始劃)이라”는, 홍무광이 자신의 운명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술사가 함부로 입을 놀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이 망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고, 똑같은 ‘한 일(一)’자를 쓰고 풀이하라고 한데서 홍무광 정도 되는 술사가 죽음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는 ‘중국 제일의 파자술사’로 이름을 날렸던 사석(謝石)이 진회(秦檜, 1090-1155)에게 잘못 보여서 죽었고, 조선에서는 인조반정(1623)을 도운 정치가이자 술사인 김치가 3년 만에 죽임을 당했다. 과거의 흑역사를 알고 더구나 모종의 밀약까지 나눈 사람을 살려두기가 불안했던 것이다.
4. 계유정난과 지금의 한국 정치
수양대군에서 국왕이 된 세조는 다방면의 개혁을 하고 나름 최선의 정치를 한다고 했으나 ‘조카를 죽이고 얻은 왕위’라는 원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게다가 왕위 찬탈을 합리화시키겠다는 듯이 급하게 진행한 개혁의 후유증이 컸는데, 특히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정난을 일으켰으나 정작 자신을 도운 한명회 등 정난공신들의 권세를 누르지 못해 오히려 왕권이 약해졌고, 화포부대를 궁수(弓手, 활 쏘는 군사) 위주로 바꾸면서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같은 학자가 정난의 명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제19대 국왕 숙종(세조의 10세손, 재위 1674-1720) 때는 나라의 여론으로 노산군(魯山君)을 단종으로 복위시키는(『숙종실록』 권32, 숙종 24년(1698) 11월6일) 등 세조가 잘못했다는 비판 여론이 형성되었다.
부귀에 고개를 숙였던 술사는 당대에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충신열사를 죽이고 뜻있는 선비의 기상을 꺾어가며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정난도 직계 후손 왕들에 의해 잘못되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오는 6월3일의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갖은 권모술수와 음모를 획책하며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훗날 평가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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