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년 만에 이뤄진 성균관 대성전 보수공사가 35개월 만에 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국 유림의 정신적 고향이자 한국인들의 생활 전반에 깃들어 있는 의식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문화의 정수(精髓)로 불리는 곳이 그동안의 시간 변화에 따라 점점 쇠락해가고 있음을 느껴왔고,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서도 종종 시행되는 보수공사가 왜 성균관에서는 이뤄지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던 참에 이렇게라도 진행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여기에는 문화재를 소중히 여기며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알뜰히 살펴온 국가유산청 및 종로구청, 협의를 통해 시작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던 손진우 원임 성균관장, 장기간의 공사에 여러 가지로 보조를 맞춰준 현재의 최종수 성균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수고가 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균관은 단순한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유적이자 자랑이었기에 여러 번의 소실(燒失) 속에서도 다시 중건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 유생들을 비롯한 선배유림들의 재화(財貨)와 노력이 함께 했음을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과정을 통해 모아진 자금이 공사에 직접 사용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전남광주가 마지막 순간 국립의대 신설 추진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끝내 채우지 못한 한 칸이 있다. 목포대와 순천대의 통합 합의서다. 의대 신설을 둘러ㆍ싼 논의가 대학 통합이라는 벽에 막히면서 전남광주에 배정된 의대 정원 100명은 이제 경북과의 경쟁 구도로 넘어갔다. 그렇다고 100명을 포기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전남광주는 ‘플랜 B’를 통해 통합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한 대학에 의대 정원을 배정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정원 100명을 달라”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교롭게도 의대 정원 신청 마감일, 국립대병원의 관리체계가 교육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넘어갔다. 이 변화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의대는 학생을 가르치는 공간이지만, 병원은 의사를 키우고 지역의 생명을 지키는 현장이다. 결국 의대가 어디에 설치되느냐 못지않게 어디에서 교육하고, 어떤 병원에서 수련하며, 지역의료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이제 의대 신설의 승부처는 ‘대학’에서 ‘병원’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경북은 경국대와 안동시의료원을 연계해 교육병원 체계를 구상하고 있다. 반면 전남광주는 아직 의대와 교
◇ 동양 유교사회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복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원(起源)은 알 수 없으나 복날(伏日)은 지금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여름 더위에 고생하는 몸을 위해 닭, 소, 돼지, 염소, 전복, 장어 등의 각종 보양식을 먹으며 다시 한번 힘을 내자고 다짐하는 날’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굳이 명칭을 ‘엎드리다’ ‘낮아지다’라는 다소 부정적 의미의 복(伏) 대신 ‘이기다’의 승(勝), ‘위로하다’의 위(慰), ‘힘쓰다’의 력(力)을 사용하여 승일(勝日), 위일(慰日), 역일(力日) 등의 긍정적 단어를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기에 동양 유교사회 어른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예로부터 잘난 척, 이기는 척, 멋 부리는 척하는 외면의 허세에 매몰되기보다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올바르기 위해 애쓰고, 욕심내어 뭔가를 억지로 하기보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결국은 몸과 마음을 지키는 근본적인 지름길임을 알았기에 이름 하나에도 그런 의미를 담으려 했다. 따라서 맹렬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뜨거운 화기(火)의 기운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서늘한 금(金)의 기운인 가을이 찾아오기를 ‘엎드려(
땅끝을 찾은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풍경을 기억한다. 사자봉 정상에 횃불처럼 서 있는 전망대와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뻗은 삼각뿔 모양의 땅끝탑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북위 34도 17분 32초’라는 숫자를 확인한다. 다도해 너머로 시선을 던진 뒤에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런데 땅끝점 표지석 옆에는 관광객의 시선이 좀처럼 머물지 않는 석상 하나가 서 있다. 나이 든 여인의 모습이다. 안내판을 읽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기 쉽고, 읽더라도 그 사연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석상의 주인공은 갈두마을 사람들이 오랜 세월 ‘당할머니’라고 부르며 모셔 온 마을의 수호신, 칡머리 당할머니다. 갈두, 칡이 우거진 땅의 이름 땅끝마을의 본래 이름은 갈두(葛頭)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칡 머리’라는 뜻이다. 갈두산 일대에 칡이 무성해 주민들이 예부터 이곳을 ‘칡머리’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로 옮겨 갈두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지역에서 난 칡이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는 말도 내려온다. 바닷가임에도 마실 물이 귀해 본래 갈수리(渴水里)라고 불렀으나, 이름의 뜻이 좋지 않아 갈두리로 바꿨다는 설명도 있다. 어느 이야기가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산불여 두륜, 해불여 땅끝, 곡불여 해남, 문불여 녹우당, 학불여 해남향교” 옛 선조들은 호남 각 고장의 특징과 자부심을 담아 ‘팔불여(八不如)’라는 표현을 남겼다. 이는 어느 지역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각 고장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억하기 위한 문화적 표현이었다. 오늘날 해남에도 새로운 시대의 ‘팔불여’가 필요하다. 해남은 단순히 한반도의 끝에 있는 땅이 아니다. 산과 바다, 넓은 들과 깊은 문화가 함께 살아 숨 쉬는 남도의 중심이다. 산불여 두륜(山不如 頭輪) 두륜산은 해남을 대표하는 영산이다. 천년고찰 대흥사를 품은 두륜산은 자연과 역사, 종교와 문화가 어우러진 치유와 사색의 공간이다. 해불여 땅끝(海不如 地端) 땅끝은 단순한 국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희망의 상징이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은 해남만의 소중한 자산이다. 곡불여 해남(穀不如 海南) 해남은 비옥한 토양과 넓은 들판을 바탕으로 쌀, 고구마, 배추, 마늘 등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농산물을 생산하는 생명의 땅이다. 들판에는 농민들의 땀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불여 녹우당(文不如 綠雨堂) 고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다급한 순간 "해남!"을 외치는 장면을 보며 필자는 '해남을 이렇게 강렬하게 홍보해 주는구나' 하고 반가웠다. 그런데 누군가는 "왜 땅끝 해남이 멀다는 설정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정말 땅끝은 가까워야 하는 것일까. 해남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교통망이 좋아지고 접근성이 개선됐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땅끝의 가치를 '가깝다'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땅끝은 대한민국의 끝이다. 끝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거리 이상의 상징이 담겨 있다. 가장 먼 곳을 향해 떠나는 여정, 그 끝에서 만나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 바로 땅끝이다. 그래서 땅끝은 멀어야 한다. 멀기 때문에 특별하고, 멀기 때문에 신비롭다. 현실을 보더라도 해남은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는 비행기와 KTX, 자동차를 갈아타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반면 일본 후쿠오카나 제주도는 비행기로 3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시대다. 그렇다고 해서 해남의 가치가
이제 사흘 후면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투었던 선거의 막이 내린다. 국민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 정치 질서가 시작되고,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의 갈등과 대립은 끝나고, 이제는 통합과 책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떠올리게 되는 말이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서도 여러 별들이 그 주위를 공손히 따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덕(德)은 단순한 선행이나 도덕적 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옛 학자들은 “덕이란 도(道)를 실천하여 마음속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즉 올바른 길을 따르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덕이다. 정치는 강압과 탄압,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정치는 패도(霸道)에 불과하다. 진정한 정치는 인(仁)을 바탕으로 한 덕치(德治)여야 한다. 백성들이 두려워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스스로 따르게 만드는 정치가 바로 공자가 말한 이상적인 정치다. 공자가 북극성과 별들을 비유한 것도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중심이 바르면 주변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이루고, 지도자가 덕을 갖추면 백성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제자로서 1773년(영조 4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후 19년 간 유생으로 생활하며 학문을 연구하다가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 전시(殿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갔던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 선생은 시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首)를 남겨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그 속에서 생활하던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고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을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꼼꼼하게 작성된 시 하나하나가 모두 볼만 하지만 특히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성묘(聖廟, 문묘)에 대한 정돈 및 청소의 내용을 담은 <성묘수소(聖廟修掃)>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유림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되돌아보게 한다. 수소매당오일조(修掃每當五日朝) : 닷새 아침마다 정리하고 깨끗이 치우기를 전중원급계사초(殿中爰及啓祠迢) : 전각 안과 계성사 멀리까지 이르렀네 장의불래반수체(掌議不來班首替) : 장의가 오지 않으면 반수로 바꾸고 홍의수복주상요(紅衣守僕走相邀) : 붉은 옷 입은
해남 서림공원 단군전에서는 매년 개천절이면 단군성조를 기리는 제향이 엄숙히 이어진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뜻을 되새기고, 민족의 시원을 기리는 이 의식은 지역을 넘어 우리 모두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는 자리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 단군은 과연 ‘진짜’인가? 지금 단군전에 모셔진 존영은 모사본이다. 해남향교에 보관된 것 역시 모사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의 출발점에는 1914년 이종철 선생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가져온 단군 존영이 있었다. 폐허 속에 방치돼 있던 그 존영은 마을 제향의 중심이 됐다. 광복 이후에는 공적 공간으로 옮겨졌고, 오늘의 단군전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처음의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확인된 기록은 없다. 언제 훼손됐는지, 언제 사라졌는지, 누가 관리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50년대 어느 시점, 훼손된 원본을 대신해 모사본이 제작됐다는 증언만 전해질 뿐이다. 이쯤 되면 단순한 아쉬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공백이다. 단군 존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민족의 기원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더구나 북한 지역에서 유래해
성두 김두호 성균관 원임 전인·원임 윤리위원·원임 감사 오월은 따스한 정을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계절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온기가 넘쳐나는 사랑의 달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부모는 스승이고 자식은 자랑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신 부모님은 늘 저 멀리를 내다봅니다 우리 아이가 지치지 않을까, 넘어지지 않을까를 염려하시면서 혹시라도 경쟁에서 낙심할까 일어서지 못할까를 근심하십니다 아버지의 묵직한 사랑은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깊은 사랑을 품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희생은 늘 자식에 대한 깊은 정을 우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고 어머니를 닮은 것에 대한 이유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전부입니다 다 해주고도 부족한 게 없는가를 염려하는 게 우리 부모님의 심중(心中)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은 말합니다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내 곁에 없었다는 걸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그 시간에, 그 날에, 그 부모님 내 곁에 없었음은 내가 그 부모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부모님의 희생 위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요 자식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고단한 삶을 살고 계신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